안녕. 언젠가 너를 데리고 이탈리아에 가고 싶었어. 그곳에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모든 행복을 느끼고 평화로움과 안식을 즐기고 싶었어. 그런데 너는 이렇게 어느 날 나의 옆에서 나와 함께 죽어가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걸 너무 늦게 알아차리고 말았구나.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12월의 어느 날. 바다가 보고 싶어 진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짐을 챙겨 제주도로 떠나버렸다. 자동급식기와 반려견 전용 정수기가 있었고, 2박 3일 정도는 별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 급하면 그가 잠시 집에 들러 아이들을 챙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12월의 제주도는 육지보다 춥지 않았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피부를 찢는 듯 파고들어 가슴속의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연애를 시작한 딱 이 시기의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어느 날 그에게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했고, 드라이브가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나의 말 한마디에 부산에서 차를 운전해서 내려온 그는, 가로수길에서 나를 태우고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뚫고 나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그가 잡아주는 따뜻한 손이 좋았다. 여자와 있을 때와는 다른 안정감이 좋았다. 바다처럼 넓은 가슴팍에 안겨 잠들고 일어나면 나를 감싸고 있던 그의 온기와 체취가 좋았다.
제주도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그의 사랑이 흡사 바다와 같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절의 그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던 그의 진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차라리 그렇게 나를 버리고 떠날 거라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떠나지. 왜 그렇게 아련하게도 나를 버리고 본인은 나를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쥐어짜려고 해도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그 걸음에서 더 이상 사랑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동정심일까 아니면 일말의 책임감 같은 부질없는 감정이었을까. 그가 제시하는 사랑은 내가 느끼는 사랑과는 너무나도 멀고 동떨어져서 마치 추운 겨울 바다의 싸늘한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제주도가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의 어떤 바닷가라면 나는 행복할까. 그곳에서 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곳은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할까. 아니면 그건 단지 나의 불안전한 상상에 불과한 작은 희망이자 미련일까. 그곳에 가면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했던 소중했던 추억들을 모두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내가 모든 것을 너무나도 쉽게 저버리고 포기했기에 나는 그 사랑을 다시 구걸할 수도 애원할 수도 없었다.
짧은 3일이 지나고 김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니, 과거에 그를 보러 밥먹듯이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 나는 행복했을까. 그에게 나의 행복을 알려주려고 노력한 적은 있을까. 그에게 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서, 너의 사랑을 받아서 너무 감사하다고 단 한순간이라도 표현한 적이 있을까.
언제나 공항에 도착하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멀어지는 마음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택시에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핸드폰으로 강아지 간식을 주문했다. 어쩐지 나 혼자 다녀온 여행에 막연하게 집에서 나를 기다렸을 강아지들이 떠올라 조금 미안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소와 다른 싸늘한 적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꼬리를 흔들며 나오는 강아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포메도 보더콜리도 짖지 않았다. 단단히 삐진 거라는 생각이 들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집안을 돌아보니 구석에 박혀있던 포메가 눈에 들어왔다. 포메를 안아 들고 보더콜리를 찾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방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변기통과 벽 사이에 머리를 박고 싸늘하게 죽어있는 보더콜리를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웠다.
왜 죽었을까. 대체 왜. 지금 이 순간 나를 떠나간 걸까. 차라리 이게 나은 걸까. 나를 위해 짐이 되기 싫어서 죽은 걸까. 은연중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너를 질식하게 만든 걸까. 사랑하는 나의 벨로. 덩치만 큰 어린아이 같은 나의 벨로. 영원한 나의 아기 벨로. 싸늘한 화장실 타일 바닥 위에서 너는 나를 기다렸을까. 나에겐 그저 짧은 3일이 너에겐 나를 기다리는 영원의 순간처럼 느껴지진 않았을까. 나를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는 그 순간 나는 그저 스스로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며 너의 죽음을 외면하고 모른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의 벨로. 소리 없이 떠나간 나의 벨로. 그곳에서 조금만 더 나를 기다려. 너무 늦지 않게, 네가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내가 너를 찾아갈게.
비가 오면 너를 생각할게. 비 오는 날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던 너를 기억할게. 어느 날 문득 바람을 타고 너의 온기가 느껴지면 네가 나에게 잠시 인사하러 들린 것이라고 생각할게. 너는 내가 이토록 빨리 너를 찾아가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너 조차도 없다면 그래서 남은 평생 너를 그리워하며 매 순간 무너지는 나를 봐야 한다면, 조금만 서둘러서 너에게 갈게. 그곳에선 우리 부디 지금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행복하자. 온 마음을 다해서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나의 벨로. 소중한 나의 벨로. 사랑하는 나의 벨로.
기절했다. 눈을 뜨니 저녁이었다. 기절한 건지 잠에 빠진 건지 모르겠다. 차가운 화장실 타일에서 싸늘하게 식어있는 벨로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기증과 두통이 몰려왔다. 기절하며 이마를 박았는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화장실 문턱 앞에서 포메가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불안했을까. 옷방으로 가서 가장 질 좋은 니트를 챙겼다.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벨로를 안아 들고 니트로 감쌌다. 옷감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져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담요로 벨로를 다시 감쌌다. 침대에 조심히 눕히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간은 저녁 9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대충 호수는 알고 있었기에 집 앞에서 벨을 눌렀다.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몰려와 발로 문을 부수듯이 걷어찼다. 잠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문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나를 보며 분명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 사람을 처음 보는데 그 사람은 분명 나를 알고 있었다. 문으로 발을 찬 부분에 대한 사과는 생략하고 집에 그가 있냐고 물었다. 어딘가 난처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의문의 남자는 그가 현재 집에 없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집으로 향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안쪽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집 안쪽에서 갈색털의 보더콜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왔다. 저 강아지의 목을 따버리면 지금 내 기분이 나아질까.
"강아지 키우시나 봐요."
"네."
"보더콜리"
"아, 네."
신발장에 내가 사준 그의 신발이 보였다. 그 옆으로 똑같은 디자인의 신발이 보였다. 낯선 남자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가 나한테 선물한 반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금색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나는 백금으로, 그는 금으로 커플링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는 같은 디자인의 금색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장엄하게 떠들던 그의 '사랑'이라는 이론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가페 같은 사랑, 영혼의 안식처,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나'. 그 모든 것들이 그저 벨로의 죽음과 함께 빠르게 소멸하고 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갈색의 보더콜리를 봤을 때는 당장 죽여버려야 속이 시원해질 것처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화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빈 깡통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례했습니다.' 짧게 인사하고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날 그는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오지도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오전에 강아지 화장터를 예약했다. 점심에 차를 몰고 화장터로 향하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화장터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절차를 안내받았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화장이 진행되었다. 단 한순간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직원에게 전해받은 유골함을 소중하게 안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벨로와 함께한 7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끝나버렸다. 너를 떠나보내는데 필요한 시간은 그저 3시간뿐이었다. 그날은 나와 그가 만난 지 8년째 되는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으며 공기는 청명했다.
집에 도착하니 아일랜드 식탁에 무화과 두 박스가 올려져 있었다. 몇 년 전 그와 제주도를 놀러 갔을 때 트럭에서 팔던 무화과를 그가 사준 적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생김새에 기겁하기도 잠시 맛을 보니 달고 녹진했다. 그 이후 무화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매년 철이 다가오면 그는 언제나 무화과를 사 왔다. 본인은 잘 먹지도 않으면서 늘 그렇듯 매년 나를 위해 가장 품질이 좋은 무화과를 선물했다. 한겨울에 철도 아닌데 도대체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알 집어 들고 입으로 넣으니 구토가 올라왔다. 그가 사 온 무화과를 대충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하던 일도 모두 멈춰버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타들어가는 갈증에 물은 조금 마셨지만, 뭐라도 위에 들어차면 속이 쓰려서 입만 적시고 말았다. 씻지도 않았다.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놓은 벨로의 유골함을 보며 그렇게 잠들고 일어났다. 그동안 포메는 그저 방치되고 있었다. 억 겹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아주 더디고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짙은 암막커튼으로 세상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빛을 단절했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는 어느 날의 어느 순간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유골함을 보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목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싱크대로 가 물을 틀어 입을 조금 적시고 말했다. '벨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열고 싶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벨로'라는 두 글자 외에 어떤 단어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을 쳐다보니 그 마저도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보니 그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당장 설명하라는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처럼 들려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가 빨리 사라지길 원했다. 그러려면 그에게 대답해야만 한다.
"죽었어."
"왜?"
"몰라"
"병원은 데려고 가봤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냐고. 병원도 안 가고 너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애가 죽어가는데 그동안 병원을 한번 데리고 가지도 않았어? 갑자기 이유 없이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최소한 애가 죽었으면 병원에 데려가서 왜 죽었는지 검사라도 했어야지."
"죽은 애 데리고 가서 배라도 갈랐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
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동안 너는 뭐 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다른 새끼랑 하하 호호 다른 개새끼나 키우면서 행복하게 지내는 동안 나랑 아이들은 여기서 이곳에서 이 집에서 너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수많은 단어들이 차올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무능해, 왜 그렇게 무책임해, 왜 그렇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아. 내가 계속 너한테 수도 없이 이야기했잖아, 네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살면 결국 모든 피해는 나랑 강아지들이 본다고 말했잖아. 최소한의 책임을 다해야지. 아끼고 사랑한다고 말만 하면 뭐 해. 결국 너는 벨로가 죽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애 죽으니까 그냥 화장시키고 끝인 거잖아. 봐바. 너는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야. 모든 일을 결국 내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못해.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 결국 벨로도 죽은 거야. 네가 죽인 거야."
"맞아, 내가 죽였어. 그러니까 벨라도 내가 죽여버리기 전에 네가 데려가."
"그건 안돼."
"왜? 너네 집에 있는 그 개새끼 때문에? 내가 지금 가서 그 개새끼 죽여버리고 화장까지 깔끔하게 시켜줄 테니까, 네가 벨라 데려가. 내가 데리고 있어 봤자 얼마못가 죽을 텐데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
"내가 뭘,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나랑 같이 살면 네가 그토록 아끼던 벨라도 어느 날 벨로처럼 싸늘하게 죽어서 너한테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데려가라고."
"......"
"데리고 가, 그리고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여행이라도 좀 다녀올게. 알아들었으면 애 데리고 내 집에서 이만 나가줄래."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모든 게 텅 비어버린 나는 그의 우는 모습을 봐도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슬프거나 아련하거나 안타깝지도 않았다. 감정이 자리하고 있을 내면의 공간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껴안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네가 많이 힘들면 당분간 벨라는 본인이 데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나도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 어디에도 진심은 없었다. 그냥 빨리 이 순간을 정리하고 그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맞추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벨라를 안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하늘도, 바다도 그 무엇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완벽한 타인이자 남이었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그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너의 오피스텔에 있던 낯선 이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물어봤자 그의 입에서 나올 뻔한 거짓말들이 지겨웠다. 질려버렸다. 그가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매번 그는 바람을 피울 때마다 나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겠으니까 제발 걸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바람피우지 말란다고 안 피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가 다른 곳에서 몸을 섞어도 마음만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궁금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게 다른 사람이라면 왜 나를 이토록 방치하고 내버려 두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나에게 질려버린 거라면, 더 이상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왜 나를 새장에 가두고 날아갈 수 없도록 날개를 자르고 묵어두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헤어지자고 그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애원하듯이 말했다. 제발 내 인생에서 그만 사라지라고 수도 없이 말했다. 그만 나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를 무시했다. 나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단지 지금 화가 나서 내가 아무 말이나 뱉는 거라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내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화가 나서 내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만, 분명 후회할 거라고 말했다. 본인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지금 그를 떠나면 나는 평생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처럼 병약하고 병적이며 히스테릭하며 예민하고 싹수없고 능력도 없고 무기력한 인간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본인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부모조차도 버린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우주에 본인이 유일하다고 되뇌었다.
그가 우리의 집에서 나간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고 그에게 최대한 기대지 않고 자의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를 아무리 멀리하려고 발버둥처도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고, 나한테만 그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도 어느 순간 어떤 날에는 내가 필요할 거라고 필요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가진 모든 허울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내가 그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다투고 때로는 싸웠지만 그를 나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순간적인 욕심으로 비롯한 삶이 너무 황망하게 들이닥쳐 잘못된 길을 선택해야 하는 매 순간 우리는 서로의 옆에서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서로를 도왔다. 우리가 선택한 모든 순간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게 최악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은 아니길 바랐다.
분명 우리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만 끼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 무엇보다 부정적이었고 어찌 보면 불필요한 불행을 구태여 나눠 들었다. 불행이 2배로 불어나는 일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함께 나눠 들면서 보다 수월하게 순간을 지나가기도 했었다.
집에 전구를 깨 먹거나,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고, 내가 고칠 수 없는 무언가가 고장 났을 때. 그리고 내가 아프고 우리의 아이들이 아플 때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하며 수습하기 더 힘들어지게 일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냥 그에게 도와달라고 한마디 하면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아프거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언제라도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그에게 달려갈 것이다.
그는 나를 배척하지도 멀리하지도 않았다. 같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가 집에 있는 강아지들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깊이는 당사자가 아니고선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내 마음대로 속단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결과를 떠나서 내가 나의 인생을 선택해서 살아가듯, 그 역시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저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이러한 사실을 겨우 인지하고 나서 더 이상 우리는 예전만큼 크게 다투지도, 싸우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외면하고 싶었지만 결국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는 게 너무 극명하게 들어놔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단지 그는 우리에게 주어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회만 남을 것 같은 처참한 삶을 살아가며 강아지들과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그와 의미 없는 싸움을 지속하며 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무형한 아름다움은 언제라도 우리의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지레 겁을 먹고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떠나기에는 삶은 너무 지독하게 슬프고 아련했으며 매 순간이 미련이었다. 내가 만든 작은 세상 속에서 나는 가장 불쌍한 인간이었다. 가장 불쌍했기에 부정적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욕하며 그 틈사이로 비집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내가 사랑하던 그 역시도 만만치 않게 불쌍한 인간이었다. 때로는 이런 나보다 더 불행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너무 늦게 깨 닳았다. 일련의 아픔들을 겪으며 나는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같은 곳을 머물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적당한 핑계를 방패로 동굴을 만들고 그 안으로 점점 더 깊숙하게 파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