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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강

다시 해가 바뀌고 여름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보더콜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했고 포메도 잘 걷고 잘 뛰어다녔다. 나는 그동안 꽤 여러 번 건강상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해서,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끼니도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었다. 덕분인지 별다른 노력 없이 수면제의 용량을 점차 줄여나갈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멀쩡하게 생활이 가능했지만 이제 몸도 나이를 먹었는지, 불현듯 찾아오는 숙취에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게 싫어서 한동안 술도 마시지 않았다.


추가적으로 지속적인 음주가 공황장애에 매우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더 술을 멀리한 부분도 있었다. 아무리 생활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해도 불현듯 찾아오는 공황장애가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우울증이고 나발이고 그냥 공황장애만 없어져도 살아가는 게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 같았다.


혼자 생활한 이유로 아주 가끔씩 자다 말고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악몽이라도 꾼 건지, 아니면 수면제의 부작용인지 그것도 아니면 안 좋은 음주 습관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외부의 요인을 찾을 수 없는 집에서 일으키는 발작은 평온한 삶과는 상관없이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조금씩 좀먹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새벽에 자다 말고 불현듯 과호흡을 동반한 공황장애가 찾아오면 어디선가 보더콜리가 쏜살같이 뛰어와서 내 옆에 가만히 앉아서 나를 지켜보았다. 그럼 나는 머리맡에 준비해 놓은 종이봉투로 입을 막고 나머지 한 손으로 보더콜리를 꽉 끌어안았다.


잠든 사이 심장마비라도 일으켜서 다음날 아침 해를 맞이할 일이 없길 바라던 어느 날 이렇게 삶을 연명하는 게 지겨워서 그냥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이렇게 기한 없이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순간을 선택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아이들을 등지고 떠나야 한다는 죄책감이 일순간 가슴속에 일렁였지만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변명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완벽하게 아무런 문제도 없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수면제가 없어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악몽도 꾸지 않았다. 죽음을 결심한 이후로부터 단 한 번도 공황장애가 찾아오지 않았다. 과호흡도 없었다. 심지어 식이장애도 사라졌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우울하지도 않았다. 거의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무엇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것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더 이상 약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 꾸준하게 병원을 다니며 수면제를 끓어 모았다.


온전히 나 자신을 돌보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매 순간 내 마음은 고요했고 평안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죽음을 계획했다. 모든 것을 저버리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지만, 최소한 남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 자동차 등 정리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온전하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것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결국 그와 엮여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어차피 나의 것들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그가 알아서 정리할 것이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이였다. 나 같은 불안정한 인간이 아닌 정서적으로 안정된 누군가에게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포메는 그에게 보낸다고 하더라도 보더콜리의 거처를 정하는 게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선택권 없이 타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니, 이건 분명 어떤 말로 변명해도 파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같이 죽을까를 잠시 고민했었는데, ‘아빠는 사는 게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이제 그만 죽을 건데, 너네도 나랑 같이 죽을래?’ 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몸만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양육비의 개념으로 최대한 가진 돈을 전부 현금화시켜서 함께 보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금액이 좀 커서 증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도 처리해야 했고 타인에게 아이를 위탁할 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 법적인 효력을 가진 유언장과 이를 받쳐줄 공증도 필요했다.


사실, 어느 날 내가 자살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당연히 아이들은 그가 모두 데려가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에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나면 분명 그는 보더콜리를 보면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떠올릴 것이다. 먼 훗날 보더콜리마저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과연 그가 훌훌 털어버리고 멀쩡하게 생활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눈에서 치워버리는 게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그한테, ‘나 이제 죽을 건데 애들 네가 다 데려가서 키울 거니?’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것저것 다 준비하고 마무리하면 대충 겨울쯤 될 것 같았다. 기왕이면 너무 춥거나 덥지 않을 때 떠나고 싶었지만, 내년 봄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었다. 살면서 처음 찾아온 마음의 안정과 평화로움에 언젠가 사라질 소중한 시간들에 대해서 그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추석이 지나고 아이들이 보고 싶다던 누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별안간 식사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사람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데, 혹시 내가 잘못되면 애들은 어떻게 하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벌써부터 하고 있냐 등 잔소리폭격이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그가 두 마리를 모두 데려갈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이 보더콜리를 맡아서 키워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기적인 동생을, 가족을 둔 누나는 이렇게 나의 마지막까지 뒤치다꺼리를 하게 생겼구나.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아예 모르는 집으로 보더콜리는 보내는 것보다 어느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맡아준다면, 책임감은 길바닥에 버렸다 손치고 마음이 조금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 누나한테 보낸다고 유언장에 남겨도, 그가 생각했을 때 본인이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다시 데리고 올 테니. 아예 남한테 보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죽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지 생각해 보았다. 최대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그래 그런 방법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집에서 죽는 게 가장 편하겠구나, 어차피 죽을 거 떠나는 순간만큼은 뒤처리 생각 안 하고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밀폐된 방안에 백합을 가득 채워 넣으면 질식해서 죽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터넷에 유언장 양식을 검색하면 상당히 많은 양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2가지 유언장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하나는 법적인 효력을 가진 유언장과 나머지 하나는 남아있는 이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 같은 느낌의 유언장을 준비했다.


상당히 많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수정했었다. 법적 효력이 있는 양식을 동반한 유언장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보더콜리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아예 쓰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만 작성했었다. 직업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최종 완성본을 쉽사리 도출해내지 못했다.


유언장. pages, 유언장 수정. pages, 유언장 수정 1.pages, 유언장 수정 2.pages, ~ 유언장 수정 14.pages, 유언장 최종. pages, 유언장 최최종. pages, 유언장 최최최종. pages, 하. pages, 죽을 생각은 있는 거니. pages, 유언장 끝. pages, 유언장추가. pages, 유언장만 쓰다 언제 죽을 거니. pages, 등등


하염없이 버려지는 글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데 무슨 죽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불현듯 어떤 파일을 열어보면 어느 날은 마냥 가볍게 남겼다가 또 어느 날은 세상 우울하게 글을 이어나갔고 저 중 마무리하지 못한 글도 상당히 많았다. 유언장을 다시 읽어보며 매일 달라지고 있는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어떤 날은 글에서 죽음을 앞두고 행복함이 느껴졌고 어떤 날은 슬픔, 또 다른 날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 모든 감정을 복합적으로 적용하면서 너무 길지 않게 유언장을 남기려고 애쓰다 보니 저렇게 많은 파일들이 생성되었나 보다. 그중 그에게 남겼던 몇 가지를 끄집어 보자면,


유언장 4.pages

이런 식을 너를 배신하고 떠나는 나를 부디 용서하길 바라.

우리가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들 중 너는 단 한순간만큼이라도 충분히 행복했었을까.

나의 존재가 비집고 들어오는 너의 행복을 막아서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삶에 불현듯 들어와 나를 끌어준 너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나와 함께 더 불행하자고 너의 삶을 좀먹고 있던 건 아닐까 가끔 생각했어.


중략


늘 내가 너에게 이야기했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제가 죽음을 맞아야 해. 그리고 나는 어느 날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내가 먼저 죽음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어. 우리가 함께 한 세월보다 앞으로 네가 살아가야 하는 세월이 더 많으니 나 따위는 훌훌 털어버리고 보다 행복한 삶을 보내면 좋겠어.


중략


끝까지 아이들을 책임지지 못해서 미안해. 언젠가 내 품에서 아이들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결국 이렇게 내가 먼저 떠나가게 되었네.


유언장 7.pages

이렇게 먼저 떠나서 미안해. 아이들 잘 부탁해.


유언장 12.pages

내가 너한테 내 인생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해? 그때 내 옆을 떠났어야지. 내가 아무리 죽을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함부로 남의 인생에 관여하지 말았어야지.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었어. 행복했던 순간도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내 존재가 너에게 상처만 남기는 마지막으로 기억될 테니 차라리 나를 원망하며 그리워하지 말고 살아. 그렇게 원망하다 어느 날이 찾아오면 다 잊고 온전하게 너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


유언장 최종. pages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123456. pages

나 꼭 화장시켜 주면 좋겠어. 무덤 싫어. 나무도 싫어. 화장해서 적당히 아무 데나 뿌려주면 좋겠어. 죽어서 답답한 항아리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


유언장만 쓰다 언제 죽을 거니. pages

너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유언장은 꽤 여러 번 수정해서 나온 마지막 결과물이란다. 죽는 마당에 이런 쉰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지금의 나는 제정신은 아인 것 같아. 언젠가 네가 나한테, 너는 이기주의 자기 주의 끝판왕이라는 이야기를 꽤 여러 번 한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해? 당시에는 너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금은 그게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 어차피 죽기로 마음먹은 거 남겨진 타인에 대한 감정등을 내가 굳이 왜 신경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 그래도 문득 나를 위했던 너의 마음을 알아서 이렇게라도 글로 남겨보려고 해. 만약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알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우리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알고 과거로 돌아가면 절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 같아. 애들도 절대 키우지 않았을 거고. 그게 너를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서인지 지금의 나는 구분조차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불행을 좀먹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사상에 빠져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포메는 네가 데려가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보더콜리는 우선 우리 누나한테 맡기려고 해. 네가 보더콜리를 볼 때마다 나의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하진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어서. 아예 네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보내려다가, 그래도 네가 보더콜리를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서 혹시라도 네가 데려가서 키우고 싶어지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마음대로 결정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것 같아. 강아지들이 보호자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젠가 보호자가 죽으면 마중 나온다고 하잖아. 언젠가 네가 충분히 살아서 더 이상 삶에 미련이 남지 않았을 때, 너의 명이 다해서 그곳으로 온다면 나와 아이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너를 등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삶이 너를 피폐하게 만들어도 최선을 다해서 버티고 열심히 살아남아.


뭐 하나 제대로 된 내용이 없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행여나 혹시라도 그가, 나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을 가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의 죽음을 본인의 잘못으로 여기고 평생 불행하게 살길 바라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역시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데 앞서 나에게 미련이 되어주고 있는 존재였다. 비단 우리의 강아지들뿐 아니라 그 강아지들을 나에게 보내준 그의 존재 자체가 내가 죽을 수 없는 가장 큰 미련이었다. 내가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날이 추워지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는 어차피 곳 죽을 건데 뭐 하러 이렇게 까지 열심히 하나 싶어서 매사에 대충대충 건성으로 임했다. 어느 날 저녁 집 앞 공원에서 포메를 유모차에 태우고 보더콜리를 산책시키던 중 골든 리트리버와 마주쳤다. 황금빛의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해맑은 눈으로 보더콜리와 인사하러 오던 그 강아지는, 보더콜리가 경계를 하며 낮게 으르렁거리자 자연스럽게 산책하던 반려인의 방향을 틀어서 옆으로 매끄럽게 지나갔다.


한 손에 리드줄을 꽉 지고 순간 긴장하고 있던 나는, 일순간 나를 쳐다보던 보더콜리와 눈이 마주쳤다. 여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리트리버와 나도 모르게 비교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보더콜리의 윤기 나는 털은 사라지고 푸석거렸으며 발바닥 털은 삐쭉 자라서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모차에 앉아서 밖을 구경하던 포메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사랑이 아닌 불안과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고 어딘가 공허하게 보였다.


죽음을 계획한 이후로부터 나는 기계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가고, 빗질을 하고, 밥을 챙겼지만 그 외에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쏟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목욕시킨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으며, 부엌 선반에는 그 흔한 간식조차 없었다. 이토록 내가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 순간에도 언제나 나의 아이들은 내 옆을 맴돌며 나를 살피고 나를 기다리고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발을 씻기다 말고 그대로 주저앉아서 펑펑 울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이렇게 쉽게 버리고 돌아서는 나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다. 보더콜리의 해맑은 눈망울에는 생기가 없었고 살가죽은 갈비뼈에 달라붙어서 비쩍 꼴아있었다.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동안 나의 보더콜리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병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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