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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Nov 29. 2021

맥락 위에 얹는다는 것

브랜드의 시선 01.  발뮤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유독 '탄생'과 관련한 명언들이 많이 떠돌아다닙니다. 스스로 떠올린 것도 있고 누군가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 놓은 것들도 있죠. 없던 것을 만들고, 있던 것을 고치고, 사라진 것을 되살리기까지 해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늘 자신의 중심을 잡아줄만한 지침 같은 게 필요할 때가 많으니까요. 


'모든 것은 점이 아니라 선에서 만들어진다.'


제게는 이 문장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는 좌우로 고개를 까딱거렸습니다. 물리학 하고는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이지만 그래도 점이 이어져서 선이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무언가의 출발을 선에서부터 하라는 얘기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 위에다 점 하나 더 찍으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어서 살짝 힘이 빠졌습니다. 남들이 안 하는, 기존에 없었던, 멋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큰 브랜드 기획자들에겐 썩 와닿지 않는 표현이라고도 생각했고요. 


그런 제가 지금 저 말을 지침 삼아 일하고 있는 데는 이 브랜드의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바로 '발뮤다(Balmuda)'입니다. 

보통 발뮤다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아 그 이쁘고 비싼 브랜드?'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죠. 발뮤다의 디자인은 늘 미학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극찬을 받는 게 사실이거니와 또 대체 뭘로 만들었길래 이 가격을 받아야만 했을까 싶을 만큼 가격표를 보는 순간 물음표가 뿅뿅 떠오르니까요. 

저 역시도 발뮤다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그저 프리미엄 생활가전 브랜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선풍기 하나에 기꺼이 50만 원을 쓸 수 있는 사람들, 필터 청소가 불편해도 굳이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를 선택하는 사람들, 안되는 요리가 없을 정도라는 대한민국 쿠쿠 밥솥을 마다하고 딱 3인분만 조리가 가능한, 그것도 보온 기능조차 없는 밥솥에 만족하는 사람들. 그런 니치 마켓을 공략하러 세상에 나온 제품이 아닐까 싶었던 거죠.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단순히 허영심을 파고든 브랜드라는 선입견이 제가 발뮤다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발뮤다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창업자 '테라오 겐(Teroa Gen)'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난 후였습니다. 동양의 스티브 잡스라는 별칭으로 그를 소개한 잡지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거든요. 발뮤다를 창업하기 전에는 10여 년간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는 그의 인생 이야기에 솔깃해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는데 테라오 겐 대표 스스로 정의 내린 관점과 철학에 완전히 매료되고 만 것이죠. 예술가이면서도 사업가 같은, 반대로 사업가이면서 또 예술가 같은 그의 성향은 정말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발뮤다라는 브랜드는 다시 처음부터 제대로 뜯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면 발뮤다는 테라오 겐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테라오 겐은 자신과 발뮤다가 하는 일을 한 줄로 설명합니다. 


'저희에겐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형태가 있습니다. 그럼 그것을 실현할 기능을 만드는 것일 뿐이죠.' 


언뜻 보면 너무도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 발뮤다가 선보이는 라인업들을 보면 거의 모든 제품이 이 철학에 맞아떨어집니다.   

앞서 소개한 50만 원짜리 선풍기 '그린팬(GreenFan)'이 대표적입니다. 그린팬을 기획할 당시 테라오 겐이 만들고 싶었던 건 어쩌면 선풍기라는 물리적 제품보다는 자연 바람이라는 무형의 본질에 가까웠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강하고 자극적인 바람 대신 자연에서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의 형태를 구현하고 싶었던 거죠. 

이를 위해 바람에 관한 특성을 연구하기 시작한 그는 우연히 한 공장에서 선풍기를 사람이 아닌 벽 방향으로 틀어둔 채 작업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람이 벽에 한번 부딪혀 깨지고 나면 훨씬 은은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안 것이죠. 그때부터 테라오 겐은 각종 풍향 데이터를 수집하고 바람을 일으키는 모든 날개 형태를 분석하며 약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전 속도가 다른 두 바람이 함께 불면 빠른 바람이 느린 바람에 끌려들어 가 부드러운 바람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그래서 날개 안쪽엔 속도가 느린 바람이, 바깥쪽엔 빠른 바람이 함께 생성되도록 설계한 그린팬이 탄생된 것입니다. 


 제품 설명을 듣고 나면 가격표를 보고 놀란 마음이 조금 안정되긴 합니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구요.



이쯤 되면 이 제품에 선풍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미안해질 정도입니다. 가전제품 카테고리 안에서는 선풍기일지 몰라도 넓은 의미에서는 새로운 바람을 정의하고 발명해낸 것이니까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습니다. 바로 발뮤다의 제품 기획 방식입니다. 테라오 겐은 시장 조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스스로 갖고 싶은 물건을 집요하게 상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그의 말이죠. 사실 이런 류의 발언은 테라오 겐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스티브 잡스도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고 헨리 포드 역시 '대중에게 물어봤다면 자동차가 아닌 더 빠른 마차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혁신이란 더 나음이 아닌 완전한 새로움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게 있습니다. 자동차 공정의 혁신을 이룩한 포드나 아이폰을 내놓은 애플과는 다르게 발뮤다는 늘 이미 존재하는 산업 속에서 자신의 제품들을 만들거든요. 아니 정확히는 모두가 흥미를 잃어가는 분야만 골라 파고든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미 생활가전이라는 시장은 극포화 상태를 맞이한 지 20년이 훌쩍 넘는 산업 군이니까 말이죠. 이런 치열하다 못해 피가 튀는 경쟁 구도 속에서 시장 조사도 하지 않고 고객의 소리도 듣지 않은 채 제품을 만든다는 게 무모해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발뮤다의 제품들은 늘 팬들로부터 열광적인 찬사를 받습니다. 심지어 꼭 발뮤다 애찬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호감을 가지고 보게 되는 그 특유의 끌어당김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발뮤다는 디자인, 기능, 경험 등 제품이 줄 수 있는 모든 측면에서 이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하나의 멋진 조각품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 안에 완벽히 녹아드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무작정 경쟁자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본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을 구현하는 용도로써 기능을 설계합니다. 저 머나먼 우주에 새로운 점 하나를 찍는 식의 발명이 아니라 늘 존재해왔던 우리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의미를 증명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죠. 그러니 테라오 겐은 고객 조사나 시장 조사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시대의 맥락에 대한 조사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이 가습기라고 했을 때의 그 충격을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발뮤다의 제품 중 이런 맥락 이해력의 정점을 찍는 제품이 있습니다. 바로 토스터입니다. 흔히 '죽은 빵도 살린다'며 사용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날 때만 해도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사실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제가 사용해 보고 난 다음에는 제품이 주는 경험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발뮤다 토스터로 빵을 구울 때면 흡사 빵에 대한 기분 좋은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 듭니다. 수직으로 빵을 넣는 기존의 토스터들과 달리 작은 오븐 형태의 창을 열고 빵을 뉘여놓는 것부터 색다른 느낌이 들게 하거든요. 이어 상단에 있는 주입구로 5cc의 물을 부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촉촉한 스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또 볼륨 조절 버튼처럼 생긴 타이머를 작동시키면 째깍째깍하는 아날로그 사운드가 이어지고 빵이 완성되면 가볍고 상쾌한 종소리가 울리죠. 실제로 제품 기획을 맡은 발뮤다의 와다 사토시(Wada Satoshi)는 이 사운드를 설계할 때 피아트 킨퀘첸토라는 자동차의 방향 지시등 소리를 오마주 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빵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까지 디자인 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네요. 

이런 일련의 경험 중 단연 압권은 토스터 내부에 있는 붉은색 발열등입니다. 창을 통해 맛있게 구워지는 빵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도구거든요. 식빵 위의 버터가 녹아 스며드는 모습이나 크루아상 위에 매끄러운 기름이 차오르는 장면이, 빨갛게 달아오른 램프 불빛에 어우러질 때면 저 빵이 내 빵이라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발뮤다 토스터를 사용한 후로는 빵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감상하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경험의 과정을 한 번 거쳐보면 왜 발뮤다가 맥락 위에 존재하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저희 집 주방에 있던 가전제품들이 전해준 경험들이 그렇게 초라해질 수 없더군요. 왜 지금까지는 빵이 구워지는 장면을 직접 감상할 수 없었는지, 왜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퍽 하고 튀어 오르는 빵과 마주해야 했는지, 왜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의 타이머 소리는 그렇게 요란하고 촌스러운지, 왜 사용하지 않을 때는 어디엔가 집어넣거나 가려놓고 싶었던 건지 모든 것에 새로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이렇게 맥락을 잘 이해하고 탄생한 브랜드들은 오랜 시간 같은 선상 위에 있었던 다른 브랜드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곤 합니다. 그 브랜드 하나로 그 산업 전체를 재조명하게 만들고, 그 브랜드 하나로 그 경험이 주는 본질을 새로 정의하게 하는 거죠. 흩어진 점처럼 존재하던 것들이 그제서야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의미 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해주는 겁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이렇게 금방 맥락을 이해하고 이를 브랜드로, 또 제품으로 만들 수 있냐고 물으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테라오 겐 대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가 2015년 발뮤다 토스터를 런칭하는 무대에서 들려준 자전적 이야기는 왜 발뮤다가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입곱살이었던 테라오 겐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방황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남긴 보험금을 경비 삼아 스페인 여행을 떠나게 되죠. 나이도 어린 데다 돈도 부족했던 그는 고난에 가까운 여행을 해야 했고, 며칠에 걸쳐 드디어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론다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온 테라오는 우연히 근처에서 풍기는 갓 구운 빵의 향기를 맡게 되는데요. 그의 표현대로라면 진짜 빵 냄새가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오감을 열어젖히는 냄새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간 빵집에서 빵을 하나 사서 입에 무는 순간 그 맛에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졌다고 해요. 그리고 그때 느낀 빵 맛을 꼭 다시 한번 재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품게 되었고, 그게 오늘날 발뮤다 토스터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제품에 스토리를 담기 위한 고도의 전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발뮤다의 제품을 사용해 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허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단번에 듭니다. 이들이 전달하고 싶은 경험이 무엇인지, 나아가 왜 이 제품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이 자연스레 느껴지거든요. 마치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기 위해 유려한 단어들을 나열하기보다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사용자에게 말을 거는 게 발뮤다다움인 거죠. 그렇게 그들은 브랜드와 제품을 만드는 데도 또 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데도 모두 맥락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브랜딩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선 위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저는 두 개의 선을 예로 드는데요, 

하나는 우리의 브랜드와 제품이 존재하게 될 외부 세계를 다룬 '주변의 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구현하고 싶은 본질을 정교하게 압축한 '경험의 선' 입니다. 

풀어 설명하면, 주변의 선 위에서는 우리 브랜드가 왜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고 경험의 선 위에서는 우리가 사용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면 좋을지를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죠. 브랜딩은 곧 자기다움을 찾는 과정이라고들 하는데 어쩌면 이 과정은 거대한 맥락의 흐름 위에서 내가 놓여야 할 가장 적절한 지점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저처럼 브랜드를 좋아하는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대화 주제가 떠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브랜드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브랜드는 뭘까?"

그때도 제 대답은 망설임 없이 발뮤다였습니다. 언젠가 책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이 관계성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거든요. 서양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 자체에 몰두해 세상을 바라보는 반면 동양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주의를 의식하고 눈치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이지만, 좋은 점에 주목해서 보면 이 땅 위에 그 무엇도 홀로 존재하는 건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결과이기도 한 것이죠. 

그러니 외부환경에서든 내적 경험에서든 그 맥락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브랜드로 표현해낼 줄 아는 발뮤다야 말로 가장 동양적인 브랜드가 아닐까 싶었던 것입니다. 



2021년 11월. 발뮤다는 모바일 폰을 공개했습니다. 이건 소비자들에게 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네요. 



얼마 전 스마트폰까지 공개한 발뮤다의 제품 라인업은 이제 17개 정도에 달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정말 발뮤다가 만들어줬었으면 했던 제품이 실제 출시된 것도 있고, 한편으로는 왜 뜬금없이 이걸 공개했을까 싶은 제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외딴 섬처럼 둥둥 떠있는 제품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따라 하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누구보다 돋보이려고 하지도 않는 발뮤다의 제품들은, 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선'위에서 의미 있는 '점'으로 존재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저는 발뮤다가 생활가전 브랜드라고 소개될 때마다 가전보다는 생활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이 내놓은 제품 자체 보다 그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또 어떤 맥락을 발견했을지가 훨씬 궁금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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