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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Dec 06. 2021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네스프레소 한 잔

브랜드의 시선  -  02. Nespresso

철학적인 메시지나 엄청난 담론을 이야기하는 브랜드와는 다르게 늘 자기 자리에서 적당함을 유지하고 있는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매 시즌마다 신제품을 선보이지 않아도, 또 화려한 광고나 캠페인 없이도 편한 친구처럼 우리 주위에 자리하고 있는 브랜드인 거죠. 


우연한 기회로 <셰프의 빨간노트> 라는 책을 낸 세계적인 요리사 정동현 셰프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에겐 절대 미각이 없다'라며 시작하는 그의 말들은 곱씹으면 씹을수록 제게 꽤 진하고 깊은 풍미를 주었죠. 


"푸아그라, 캐비아는 없어서 못 먹지만 떡볶이 국물에 젖어 튀김옷이 질척해진 오징어튀김도 좋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매운 낙지볶음도 좋다. 소나무를 깎아 만든 카운터에 앉아 셰프가 쥐여주는 스시를 먹는 것도 좋지만 마트에서 파는 초밥이 당길 때가 있고 양념하지 않은 김에 맨밥을 싸 먹는 것도 좋다. (...중략...) 간장 살짝 뿌려 볶은 어묵볶음도, 달고 매운 진미채볶음도, 식은 밥도 좋다. 마트에서 파는 아이스크림도 좋고 자판기 커피가 몹시 당길 때도 있다."


특급 셰프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하며 신기해할 때쯤 곧 미식가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보통 셰프라고 하면 대부분 무척 까다롭고 예민한 미각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음식에 아주 관대한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야 더 많은 음식을 접하고, 더 깊은 맛을 이해하고, 더 좋은 포인트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에겐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로 친근해진 영국 요리사 '켄 홈' 역시도 촬영 당시 스태프들마저 마다하는 초라한 로컬 음식들을 매우 맛있게 또 깨끗하게 비웠다는 후문입니다. 

더불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까다로운 취향을 뽐내는 것보다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음식을 껴안을 때 행복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음식은 드물고, 그 드문 확률에 기쁨과 행복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셰프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미각이 둔한 자기 스스로를 매우 행운아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은 세계적인 요리사 Ken Hom. 비판보다 장점에 주목하는 요리평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과학적으로 보면 절대 미각을 가진 사람은 우리 환상에서나 존재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각이 예민한 사람은 일반인에 비해 쓴맛을 조금 더 강하게 느끼는 정도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본인에게는 특유의 쓴맛이 불쾌하니 그 맛이 섞인 음식을 점점 거부하게 되는 거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예민한 미각이란 타이틀을 달고 그저 편식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음식이라는 한 부분에 집중해서 이야기했지만 넓게 보면 주관적인 평가가 따르는 모든 분야가 저 미각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세심하게 느끼고 즐기는 행위보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가치판단을 내리고 호불호 딱지를 붙여주고 싶어 하는 집단이죠.  

물론 제가 몸담고 있는 브랜딩 분야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꼼꼼하게 분석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 저 사람 마음에 드는 브랜드는 태양이 스스로의 수명을 다할 때쯤에나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이건 이래서 별로고, 저건 저래서 별로라며 선을 그어가다 보면 결국 제자리걸음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죠.

반대로 늘 자기만의 답을 정해놓고 출발하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사실 브랜딩을 하는 사람들에겐 몇 가지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브랜드들이 존재하거든요. 그 브랜드들이 위대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알지만 언제나 그들의 방식이 정답이라고만 여기는 것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꼭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를 받은 레스토랑만이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아니니 말이죠.


저는 커피 브랜드들 중 '네스프레소(Nespresso)'를 참 좋아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커피야말로 브랜딩 싸움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야인데요, 커피 본연의 맛도 맛이지만 그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매장, 서비스로 이어지는 일체의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전달되는 산업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커피는 소규모 카페를 중심으로 브랜딩 하기에도 유리할뿐더러 오너십을 가진 운영자나 바리스타의 철학이 깊게 관여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브랜드가 존재하는 카테고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고도 친근한 네스프레소를 꼽은 것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왠지 블루보틀이나 인텔리젠시아처럼 묵직한 가치관이 담긴 브랜드를 다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스텀프 타운이나 커피 슈프림 혹은 최근 각광을 받는 메종 키츠네 카페 같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커피를 소개해야 조금 더 힙해보일 거란 고민 역시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 생기는 게 커피 브랜드지만 네스프레소 만이 가지는 고유의 가치가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늘 그 자체로 충분한 네스프레소가 좋습니다. 캡슐 커피 한 개의 가격이 일반 편의점 커피 반값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그 안에 압축되어 있는 내공은 결코 가볍지가 않기 때문이죠. 게다가 하나하나 이야기를 파고 내려가다 보면 왜 이런 건 널리 자랑하지 않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의외의 겸손함을 지닌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나와 낯선 사람 가운데 커피 한 잔만 놓아둔다면 며칠을 밤새 얘기할 수 있다.'는 일본 커피 장인 '모리미츠 무네오'옹의 말처럼 이번엔 가깝지만 조금은 멀었던 네스프레소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네스프레소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식품회사 네슬레(Nestle)의 커피 브랜드입니다. 지금이야 블루보틀까지 인수했을 정도로 음료와 식품 산업에서 엄청난 지배력을 보이는 네슬레지만 1980년대만 해도 네슬레는 파산 직전에 몰린 기업이었습니다. 

그런 네슬레를 다시 제왕의 자리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였죠. 공교롭게도 네스프레소 아이디어는 당시 제품 포장 부서에서 일하던 에릭 파브르라는 직원에게서 나왔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하던 그는 트레비 분수 인근의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가 내려지는 과정을 지켜보다 새로운 관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커피 분말, 오일, 공기, 수분을 한데 모아 적절한 압력으로 진공 압축을 하면 에스프레소도 보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고온에서 빠르게 추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스프레소를 다시 한번 압축해야겠다는 발상이었습니다. 

그렇게 1986년 세상에 등장한 네스프레소는 2000년대 들어 시작된 전 세계적인 커피 광풍에 힘입어 급성장을 하게 되고, 현재 우리가 아는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지구상에는 1초마다 약 3만 잔의 커피가 소비된다는데 그중 4,000잔 이상이 네스프레소라는 추정 통계도 있을 정도죠.  


에릭 파브르가 처음 프로토타입으로 만든 네스프레소 머신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성공신화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맥도날드나 스타벅스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포인트를 어떻게 표준화하고 관리해가며 전 세계를 집어삼켰느냐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니까요.

하지만 제가 네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만인을 대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브랜딩 방식에 끌려서입니다. 이젠 세상에 널리 알려진 네스프레소의 슬로건 'What else?'는 단순히 고객들을 자극하는 문구라기 보다 자신들 스스로에 대한 사명처럼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네스프레소 커피의 품질입니다. 하이엔드 커피 브랜드들이 셀 수도 없이 넘쳐나는 요즘 같은 환경에선 너도나도 스페셜티 커피임을 자랑하지만, 실제 네스프레소가 사용하는 원두는 전 세계 상위 10%라는 고메 커피 중에서도 다시 1~2%의 최우수 품종만을 고른 것들이죠. 그렇게 엄선하고 또 엄선한 커피를 활용해 사람들의 기호와 소비성향에 맞는 수백 가지 조합의 캡슐 커피를 선보이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최고급 커피라는 사실은 굳이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네스프레소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새로 구입한 커피 머신 브로슈어를 읽어 봐도 품질에 대한 이야기는 몇 단계를 거치고 내려가야 찾을 수 있습니다. 대신 커피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안내하고 고객에게 가장 잘 맞는 커피를 찾아주려 애쓰죠. 이미 충분히 훌륭한 커피를 갖추고 있으니 당신은 그저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네스프레소 홈페이지에선 6가지 질문에만 응답하면 내게 맞는 캡슐 커피를 바로 알려줍니다. 상세한 설명과 함께요.  




이는 본인들이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몇 년 전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네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내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피를 내리고 남은 이 캡슐들은 다 어디로 가나...? 이것도 결국 쓰레기일 텐데...'

호기심에 그 과정을 추적해 보니 커피를 추출하고 남은 찌꺼기와 알루미늄 캡슐을 재활용하는데도 꽤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여과된 커피 분말은 농장 거름으로 다시 사용되고, 캡슐은 100% 재활용되어 음료 캔 이나 자전거 그리고 네스프레소의 커피 머신을 만드는 데 쓰이더라고요. 심지어 매장 방문이나 온라인 주문을 통해 사용한 캡슐을 너무도 간편하게 반납할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그들이 왜 '네스프레소 말고 굳이 다른 걸?(What else?)'이라고 말을 걸어오는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됩니다. 흔히들 '엣지'라고 부르는 그 뾰족함을 들이밀지 않아도, 브랜드를 둘러싼 무거운 이야기와 분위기를 건네지 않아도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세상에 없던 새로운~'이라던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이라는 워딩 대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이라는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죠. '이만하면 됐다. 충분하다.'가 주는 그 부정적인 느낌과 마주하는 순간이요. 왠지 현실과 타협하는 기분도 들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향해 '너는 여기까지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패배감 비슷한 걸 안겨주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한때 그 느낌을 참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자고로 날카로운 칼날이 뭐라도 한 장 더 썰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것들과는 차별화되는 그 한 끗을 찾고 싶어 안달이 났었거든요. 물론 그런 시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진 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기형적인 기획을 낳기도 했습니다. 날카로움만을 강조하다 보면 그 칼날에 제 살이 베이기도 하는 법이더라고요. 반대로 그 엣지가 무뎌지면 모든 게 쉽게 무너지기도 했고요. 가장 처참한 건 우리 스스로는 의미 있는 뾰족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 큰 가치가 아닐 때도 있었습니다. 짝사랑도 그런 짝사랑이 없죠. 


의외로 'What Else?' 시리즈에 주옥같은 광고가 많습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겪고 나니 네스프레소처럼 늘 쉽고 편안하면서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 브랜드들이 더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내세우고 싶은 포인트들이 참 많을 텐데도 언제나 넘치지 않는 여유로움과 밸런스를 무게중심 삼아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저에게 가장 큰 임팩트를 안긴 건 '충분하다'는 개념을 재정의하게 해준 점인 것 같습니다. 

2017년 일본 고베 지역을 여행할 때였습니다. 근처에 UCC (Ueshima Coffee Co.,Ltd) 커피 박물관이 있다길래 시간을 내 투어를 떠났죠. 약 90년의 역사를 가진 UCC 커피는 세계 최초로 캔 커피를 생산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오늘날 고베가 수준 높은 커피 문화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일등공신한 기업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이것저것 흥미로운 커피 세계를 구경한 뒤 직접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장소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했을 때였어요. 어떤 커피를 선호하느냐고 물을 줄 알았던 직원이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오늘 커피를 드셨나요? 그럼 어떤 커피를 드셨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대뜸 오늘 마신 커피를 정보 삼아 그에 어울리는 커피를 추천해 주겠다는 겁니다. 하루에 여러 잔의 커피를 먹는다면 적당한 조합을 느끼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설명과 함께요. 당황하긴 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오늘 아침 호텔을 나서기 전에 방에 놓인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를 먹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조금 강한 맛이었고 캡슐은 짙은 어두운색이었다고 했죠. 


"네. 아마 리스트레토 캡슐일 것 같네요. 비교적 저렴한 데다 물 양만 조절하면 누구나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는 제품이라서 호텔에 가장 많이 비치해 두거든요. 충분히 훌륭한 커피를 드셨네요. 머신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네스프레소만 한 것도 없죠."  


의외의 칭찬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도 본인들 제품도 아닌 타 브랜드의 제품을 말이죠. 경쟁자에 대한 립 서비스라기보다는 동종 업계 파트너로서 존중하는 자세가 느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무엇보다 현란한 수사나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하지 않고 네스프레소가 가진 본질을 딱 짚어주는 게 퍽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저에게 브라질 산토스 원두로 내린 작은 커피 한 잔을 권했습니다. 이미 강도가 높은 커피를 마셨으니 이번엔 단맛과 신맛, 쓴맛이 고루 조화를 이루는 커피를 추천한 겁니다. 커피 맛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게다가 오전에 마신 네스프레소 커피를 기준 삼아 맛을 느껴보니 더 생생한 정보가 전달되는 것 같더라고요. 여행 중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경험 중 하나일지 몰라도 저는 이 기억이 참 특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네스프레소를 베이스로 또 하나의 좋은 커피를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죠.  



좋은 커피 경험 위에 또 좋은 커피가 놓이는 순간. 




'충분하다'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그때였던 것 같아요. 타협과 포기 그 어느 즈음에 위치해 있을 것만 같은 그 단어가 케케묵은 오해의 꺼풀을 벗는 순간이었죠. 

저는 충분하다는 것이란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못한 것들도 많고 더 좋은 것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대부분이 만족할 수 있는 좋은 가치와 경험을 가진 것 말입니다. 때문에 이 충분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기준점으로 삼고 있으면 다른 것들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각이 훨씬 더 넓어진다고 생각해요. 글 초반에 소개한 정동현 셰프님의 말처럼 최고급 스시부터 마트에서 파는 초밥까지 두루 섭렵해 즐길 수 있는 건 절대 미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은 기준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건 이대로 훌륭하고 또 저건 저대로 좋다는 경험의 각도기가 생기는 거죠.

 

한편 충분하다의 또 다른 의미는 '압축된 가치를 가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드러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좋은 요소들을 밸런스 있게 담아 이를 또 다른 가치로 추출해 내는 데 능한 거죠. 이렇게 압축된 가치들은 서로서로 밀도 있게 잘 붙어있기도 하거니와 다른 경쟁자들이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다움을 완성시킨다고 봅니다. 블럭 하나 잘못 뽑으면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젠가 게임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깎고 다듬어 단단하게 만든 조각상에 가까운 셈이죠. 


어쩌면 네스프레소 역시 이 두 가지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훌륭한 커피'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 싶어요. 편협한 커피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기보단 좋은 커피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 더불어 마치 한 잔의 네스프레소를 내리듯 자신들이 가진 강점을 잘 모아 이를 압축된 가치와 경험으로 전달할 줄 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네스프레소가 그들의 브랜드를 공고히 해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네스프레소가 말하는 'What else?'의 진짜 의미는 '나 빼고 다른 커피는 다 별로야!'가 아닌,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포용할 줄 아는 너그러움과 그럼에도 경쟁자들에게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당당함이 함께 공존하는 슬로건이라고 이해해야 더 적절할 겁니다. 



실제 에릭 파브르(우)는 미국식 인스턴트 커피맛에 우울해하던 아내를 위해 네스프레소 개발을 결심했다고 하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혹시 여러분의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줄 '충분히 훌륭한' 브랜드가 있나요? 아니 꼭 브랜드나 제품이 아니더라도 관심 가는 여러 분야에서 그런 기준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저는 날카로운 미식가보다는 온화한 잡식가(?)로 사는 게 몇 배는 더 즐거운 것 같습니다. 세상엔 정말 무수히 많은 브랜드가 있고 저는 그 브랜드들을 되도록 많이 또 풍부하게 만끽하고 싶거든요.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진 롤렉스도 좋지만 여행지에서 하나씩 구매하는 스와치 시계도 좋고, 대를 물려줄 수 있다는 비트라 체어를 꿈꾸면서도 무인양품에서 만듦새 좋은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 역시 재밌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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