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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Feb 27. 2022

아이덴티티도 숙성이 필요합니다

뵈브 클리코에서 배우는 정체성의 진짜 의미 

저는 문과 출신입니다. 그래서인지 수학이나 과학과 그다지 친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도 그 분야에는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막연한 공포가 있죠. 심지어 이제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어린 조카가 나중에 수학 문제를 물어보면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싶어 벌써부터 대사를 연습 중이거든요. 

하지만 그런 제게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과학 지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물질의 열과 에너지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열역학 법칙이 그것인데요, 0법칙부터 4법칙까지 총 5개의 법칙이 존재하고 이들 모두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큼 매우 의미 있는 발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법칙들 중에서 제2법칙을 유독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무질서한 정도인 '엔트로피' 개념을 설명하는 이 법칙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아마 그 한 줄 정의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세상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네. 제게는 이 문장이 그렇게 철학적으로 다가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과 공간이 무질서가 확장되는 세상이라니 뭔가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차오르는 느낌이더라고요. 근데 정작 이 법칙을 잊을 수 없게 한건 당시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의 부연 설명이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 무질서함 속에서 작은 질서라도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게 인간의 삶일지도 몰라. 나는 물리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생명체의 존재 이유가 거기 있는 거 같더라고."


과학적 사실 속에서도 감성적인 포인트만 찾아내 기억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문과생이다 싶지만 그 이후에도 이 열역학 제2법칙은 저와 조금 특별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무질서함 속의 질서 


브랜드를 다루다 보면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아이덴티티'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이덴티티란 곧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브랜드라는 개념이 발생한 이유 역시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나만의 것, 우리만의 것을 식별하기 위함이었거든요. 실제로 영어 'Identity'의 어원이 '동일하다'는 뜻의 라틴어 '이뎀 (idem)'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 봐도 브랜드란 하나의 동질감으로 그들의 추종자들을 묶어주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물리 시간에 배운 열역학 제2법칙이 다시 떠오른 건 한창 브랜딩 업무에 욕심이 가득해질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늘 좋은 브랜드들을 좋아하고, 동경하고, 탐험하고, 분석하는 편이지만 실제로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일은 무질서함 속에서 일말의 질서라도 갖추려는 과정과 정말 많이 닮아있더라고요. 소비자들의 취향과 관심사는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고 다른 브랜드들은 또 어떤 가치와 형태를 제시하며 존재감을 드러낼지 모르니 이 바닥 역시 열과 에너지를 무분별하게 뿜어내는 엔트로피의 영역임이 분명한 것이죠. 

'그럼 우리는 이 복잡다난한 환경을 어떻게 구분하고 정리해가면서 우리만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브랜딩 하는 사람의 숙명이겠구나 하는 나름의 정의까지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체성과 관련한 브랜드 중에서는 '뵈브 클리코 (Veuve Clicquot )'를 절대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마 어렴풋하게 그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으실 테고 그중에서도 샴페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더욱 반가운 브랜드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돔 페리뇽, 모엣 샹동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샴페인 중 하나이자 특유의 쨍한 오렌지색 라벨이 특징인 뵈브 클리코는 현재 가장 핫하고 트렌디 한 와인으로 꼽힙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처음 이 샴페인을 접했을 땐 유명 아티스트나 셀럽이 론칭한 브랜드가 아닐까 싶었어요. 왠지 역사도 좀 짧을 것 같고 품질보다는 감각적인 마케팅으로 이 자리에 오른 것일 거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깊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 예상은 하나도 들어맞지 않고 모조리 빗나가 버렸습니다. 뵈브 클리코의 역사와 스토리를 조금만 알게 되어도 병에 붙은 라벨부터 브랜드 이름까지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수준이거든요.



이 아름다운 라벨을 처음 봤을 때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네요.




샴페인이 된 여인 


뵈브 클리코는 우리말로 '미망인(widow) 클리코'라는 뜻입니다. 다소 특이한 의미의 이 브랜드는 1775년 프랑스 샹파뉴 지역의 필립 클리코 와인 하우스에서부터 시작됐는데요, 세계 최초로 로제 와인을 출시하며 서서히 명성을 쌓기 시작한 이후 250년이 넘도록 수많은 라인업을 출시하며 살아있는 빈티지로 활약하고 있죠.   

그런데 클리코 와인 하우스는 창업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사실상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창업자인 필립 클리코에게서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프랑수아가 열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일이 생겼거든요. 큰 충격에 빠진 필립은 회사를 모두 청산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 다짐하지만 이때 의외의 인물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바로 며느리이자 프랑수아의 아내였던 '마담 클리코 퐁사르당'이었죠.  


사진 속 여인이 바로 샴페인의 전설, 클리코 여사입니다.



사실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이, 그것도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CEO가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기록에선 마담 클리코가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고 서술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결국 와인 하우스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뵈브 클리코'란 이름으로 가업을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마담 클리코가 사업을 맡고 난 이후로 이 샴페인은 완전히 다른 레벨로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담 클리코는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탁월한 혁신가이자 발명가이기도 했거든요. 


그런 그녀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하게 꼽히는 것이 양조기법입니다. 그 당시에는 술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량의 찌꺼기를 완벽히 제거하지 못해 샴페인 병 곳곳에 많은 부유물이 떠다녔습니다. 그러니 이를 걸러내는 디캔팅 과정이 필수였고, 심지어 샴페인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찌꺼기를 거르는 하인을 따로 데리고 다니는 귀족들까지 있을 정도였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담 클리코는 수많은 실험 끝에 혁신적인 방법을 개발해냅니다. 바로 구멍이 뚫린 나무 틀에 샴페인 병을 비스듬히 세운 다음 매일매일 조금씩 돌려주는 보관법을 고안한 거죠. 이렇게 하면 병의 입구에 침전물이 자연스레 모이게 되어 제거가 훨씬 용이해지거든요. 이 관리 기법을 '르뮈아주(remuage)'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샴페인을 만들 때도 여전히 이 방법을 통해 죽은 효모들을 걸러냅니다.   

또 이렇게 모인 침전물을 급속 냉동 시킨 후 탄산의 압력으로 한 번에 내보낼 수 있는 '데꼬르쥬망(Degorsement)'이라는 마개 역시 클리코 여사의 손에서 탄생했는데요, 사실상 샴페인의 '펑'하고 터지는 그 독특한 오프닝의 시초가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더불어 샴페인을 잔에 따랐을 때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수십만 개의 기포 역시 더 깨끗하고 더 오래 향을 머금을 수 있도록 그녀가 개발한 '발포성 와인 기술'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르미아주' 기법이 도입된 초창기의 보관법을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네요.




그런데 마담 클리코의 이런 탁월한 능력은 제품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비즈니스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둔 위대한 인물이었거든요. 

남편 프랑수아와 사별 후 겨우겨우 사업을 제자리에 올려놓은 그녀에게는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1813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이 실패로 끝나면서 러시아가 프랑스 상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해버렸거든요. 당시 러시아를 큰 수출 통로로 사용하던 뵈브 클리코에게는 사업의 존폐를 다시 고민해야 할 만큼의 날벼락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담 클리코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즉시 직원과 하인을 동원해 최고급 빈티지 샴페인 1만 병을 추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선 이들을 한데 싣고 러시아 왕궁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단숨에 달려가죠.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어지럽게 얽혀있어도 자신이 만든 최고급 와인의 맛을 보여주면 알렉산더 황제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 역시 완벽히 성공했습니다. 높은 도수의 보드카만이 존재하던 러시아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샴페인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상류계급, 그것도 여성들 사이에서 급속히 전파되었거든요. 그로부터 약 50년 동안 러시아 왕실의 샴페인을 독점 공급하게 된 뵈브 클리코는 마침내 러시아 시장 전체를 삼키는 쾌거를 이룹니다.



하나뿐인 색깔을 완성하다


제가 이렇게 한 인물의 장황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글의 초반에 꺼냈던 그 단어, '아이덴티티'를 설명하기 위함이죠. 

사실 주류 브랜드는 다른 어느 시장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브랜드 관리도 엄격히 이뤄지는 분야입니다. 100년 정도의 역사로는 명함 귀퉁이도 못 꺼낼 만큼 클래식한 제품이 수두룩하고 지역, 연령, 맛, 이미지 등 다양한 조건들로 세밀한 포지셔닝이 이뤄지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특정 브랜드에 대해서 사람들이 대충 비슷한 이미지만 떠올릴 수 있어도 꽤 성공했다고 평가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뵈브 클리코는 이런 주류 브랜드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는 '여성'으로부터 시작해 '여성'으로 완성되죠. 

뵈브 클리코는 최고의 샴페인을 위해 일생을 바친 마담 클리코 퐁사르당의 정신을 고스란히 압축해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했습니다. 특히 비교적 순하고 달콤한 맛 때문에 여성들의 술로 각인된 샴페인 시장 속에서 '위대한 여성의 담대한 도전'이라는 굵직한 화두를 던져 차별화에 성공했죠. 다른 샴페인들이 럭셔리와 우아함, 파티 문화 등을 이야기할 때 뵈브 클리코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여성'을 자신들만의 상징으로 부각시킨 겁니다. 그리고 이를 제품 곳곳에 녹여 디테일 한 정체성을 완성했고요.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뵈브 클리코의 노란 라벨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1798년까지 대부분의 와인들은 제대로 된 라벨은 물론 별도의 표식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드라이한 와인과 달콤한 와인을 구분하는 용도로써 몇 가지 색상 띠지를 사용하는 수준이었죠. 그런데 마담 클리코는 미국으로의 수출을 앞둔 1800년대 초,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와인병을 출시하기로 결심하고 뵈브 클리코의 상징이 되는 노란색 라벨을 디자인합니다. 그리고 대담한 여정을 상징하는 커다란 닻 표식을 그려 넣죠. 그렇게 당시로서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던 밝고 환한 노란색 라벨 위에 '미망인'이라는 단어를 내세운 이 와인은 당당한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문양과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색상은 팬톤 컬러 137C, 다른 말로 '뵈브 클리코 옐로'라 불리며 세상에 하나뿐인 색깔로 인정받고 있죠. 


라벨 아이덴티티의 정점을 찍었던 뵈브 클리코의 시티 애로우 에디션입니다.




지키며 변화하는 법 


이처럼 뵈브 클리코는 마담 클리코가 남긴 정신적 유산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플래그십 와인 '라 그랑 담(La Grande Dame)'이 대표적인데요. '위대한 여성'이란 뜻의 이 와인은 뵈브 클리코가 소유한 최고급 포도밭 여덟 군데에서 엄격히 선별된 포도만을 사용해 생산하는 와인입니다. 자신들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와인에 마담 클리코의 애칭을 붙여 경의를 표하는 것이죠. 

또 1972년부터 시작해 약 40년간 이어져오고 있는 '뵈브 클리코 볼드 우먼 어워드'도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하는 중요한 퍼즐입니다. 매년 혁신적인 비즈니스를 이끈 여성 기업가들에게 주는 이 상은 단순히 뛰어난 여성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에게 한 차원 높은 영감과 대담한 어젠다를 던진 인물들에게 수여하고 있거든요. 어워드의 이름에 'Bold'가 들어가는 이유도 250년 전 마담 클리코가 가진 그 당당하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기 위함입니다.  



'여성', '담대함', '옐로' 모두를 한 번에 녹여낸 뵈브 클리코 볼드 우먼 어워드는 그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뵈브 클리코는 작든 크든 더 나은 무언가를 이룬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자주 초대받는 샴페인입니다. 좋은 풍미와 맑은 청량감이라는, 샴페인이 가진 기본 특성에 더해 한 여성의 삶이 보여주는 성공의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꼭 여성만을 타깃으로 하지도 여성 고객들에게만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성별과 문화를 불문하고 뵈브 클리코가 가진 아이덴티티를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다소 무거운 전통성을 강조하는 브랜드들, 반대로 아주 감각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여러 브랜드들 사이에서 그 특유의 라벨만큼이나 선명하고 고유한 색깔을 유지하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가만히 두는 건 숙성이 아니니까


몇 해전 샌프란시스코 나파밸리를 여행할 때 '브이 사뚜이(V.Sattui)'라는 와이너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투어를 담당하던 나이 지긋한 소믈리에 할아버지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더군요. 


"와인은 그냥 저장해 둔다고 알아서 숙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 수확한 포도 품종은 물론이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기후나 환경,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다양한 외부 요인들에 맞춰 계속 관리해야 하는 포인트들이 있죠. 한 달 사이에 오크통의 위치를 여러 번 바꾸기도 하고 증발하는 양에 따라 저장고의 압력을 미세하게 조절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가만히 두는 건 숙성이 아니에요. 숙성은 우리가 원하는 맛을 얻기 위해 계속 '초점을 맞춰가는(focusing)' 과정이에요." 

 

그때는 그냥 와인 제조 과정의 흥미로운 뒷얘기로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브랜드가 아이덴티티를 갖춰가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겠다 싶더군요.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고 아이덴티티로 정립하는 것만큼이나 이걸 얼마나 오랫동안 잘 유지하고 숙성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비밀의 성처럼 보이는 이 와이너리에서 '숙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겼더랬죠. 



많은 사람들이 역사와 전통이 깊은 브랜드는 이야깃거리가 많아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데도 유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시대별로 요구하는 가치들도 달라지고 또 주변 경쟁자들이 내세우는 정체성과 정면으로 부딪히기도, 때론 희미하게 희석되어버리기도 하거든요. 때문에 어느 한 브랜드가 오랜 시간 선명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수없이 많은 풍파 속에서도 배의 키를 유연하게 조절하며 자신들만의 '초점'을 맞춰왔다는 얘기와도 같습니다. 

뵈브 클리코가 마담 클리코라는 인물을 어떻게 전 세계 여성의 롤 모델로 인식시켰는지 그리고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상상이 가실 겁니다. 지금 뵈브 클리코가 가진 아이덴티티는 2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질서하게 팽창하던 그 주류 브랜드 사이에서 자신들만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의 보상이기도 하니까요. 


저도 글에서 여러 번 사용한 단어지만 보통 정체성을 완성하다는 의미로 '정립(定立)하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말 그대로 '정하여(定) 세우다(立)'라는 뜻이죠. 그런데 흔히들 아이덴티티를 찾고 규정하기만 하면 저절로 좋은 브랜드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그 아이덴티티를 바로 세우는 것인데 말이죠. 그리고 이 바로 세우는 과정은 마치 와인이 숙성의 시간을 거치는 것처럼 끊임없이 관리하고 유연하게 변화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그 상(像)에 대한 초점을 맞추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가끔은 제가 만들거나 참여했던 브랜드들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기대만큼 잘 성장하고 있는지, 사용자들에게 잘 인식되고 있는지'에 더해 '우리가 바랬던 그 모습대로 잘 숙성되고 있는지' 말이죠. 아마 그 속엔 거대한 무질서함 속에서 일말의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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