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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r 14. 2022

본질만큼이나 형태도 중요합니다.

오늘도 '본질병'이 돋은 당신에게 뱅 앤 올룹슨이 보내는 메시지

브랜딩처럼 무엇인가를 만들고 기획하는 사람들에게는 말 못 할 병(?)도 몇 가지 있습니다. 

이른바 '밸런스병'이라고 해서 멋지지만 합리적이고, 트렌디하지만 유행을 타지 않으며, 타깃이 명확하면서도 또 일반 대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신화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무리한 밸런스의 브랜드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끔 있거든요. 

또 뭘 해도 '세상에 없던 새로운'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자 어디 한 부분이라도 남들과 달라야 하고 어느 한 조각이라도 신선함을 욱여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도 있습니다. 좋은 브랜드를 만들고자 하는 그 끊어 오르는 의욕에는 진심으로 박수 보내고 싶지만 브랜딩이야말로 남이 아닌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갈고닦는 과정임을 생각해 보면 의미 없는 구분 짓기에 불과하죠. 



본질의 본질을 찾아서 


이런 증상들 중에서 꽤 오랫동안 공공연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병도 있습니다. 이실직고하자면 저도 한때 이 병을 깊이 앓았던 적이 있었죠. 브랜딩 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이자 모든 개념과 현상들을 한 데 묶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법의 향신료. 바로 '본질병'입니다.      

'본질을 탐구하고 찾아가는 과정은 엄청 중요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하면 저 역시 '그럼요!'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시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어마어마한 간극을 보여주는 법이죠. 특히 본질이라는 워딩이 가지는 무게감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갈림길에서 고민이 깊어지곤 합니다. 


결론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브랜드를 만들고 관리함에 있어 본질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줌은 물론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우리 브랜드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또 소비자들과 사용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니까요. 

하지만 늘 그렇듯 이 과정 속에도 함정은 존재합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고 은근하게 말이죠. 가장 대표적으로는 '기능을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밑바탕이 되는 성질이나 일차원적인 용도를 중심으로만 생각을 거듭할 때 쉽게 빠지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흔히 가방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대다수가 '물건을 넣어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된 본질이 샤넬이나 에르메스 백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브랜드들에게 가방은 이미 기능적인 본질을 한참이나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자동차의 본질을 이동 수단으로, 옷의 본질을 신체 보호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란 기능적인 본질 아래에 숨어있는 그 세심한 욕망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죠. 


한편 '언제나 절대적인 본질이 존재할 거란 믿음'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브랜딩은 수학 법칙이나 우주 원리를 탐구하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본질을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수없이 많은 브랜드가 존재할 수 있는 거겠죠. 각자가 주목하고 싶은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어떻게 취사선택해 자기들만의 관점으로 풀어내느냐에 따라서 브랜드가 가지는 본질도 달라지게 되는 거니까요. 

다만 때때로 '우리가 찾은 것이 이 산업의 본질이고 나머지는 현상일 뿐이다'라는 이기적인 태도를 갖게 되면 그때부터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본질적인 가치가 이동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는 법인데, 처음에 꽂은 말뚝만 붙들고 늘어지면 결국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본질은 어떤 모양인가요?


하지만 제가 가장 경계하는 본질병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형태와 형식을 등한시하는 태도'입니다. 

마치 본질은 늘 앞서고 형태는 그저 따라붙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거나 외형에 집중하는 것을 두고 빈약한 본질을 메우고자 하는 행위쯤으로 치부하는 것이 대표적이죠. 이 바닥에서 경험이 꽤 쌓였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답을 찾았으니 곧 세상 사람들이 이 본질을 알아봐 줄 거다'라고 쉽게 판단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곤 하는데요, 대다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디쓴 고배의 잔을 마시기 일쑤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이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 없음이 답답하다'는 게 그들의 안타까운 변명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본질병을 둘러싼 논란들이 불거질 때마다 제가 늘 언급하는 브랜드가 하나 있습니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덴마크의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 '뱅 앤 올룹슨'이 바로 그 주인공이죠. 

아마 오디오를 포함한 각종 사운드 기기에 큰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이 뱅 앤 올룹슨의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혹여나 이 이름에 익숙지 않더라도 뱅 앤 올룹슨의 제품 사진을 몇 장 보여드리면 '아! 이게 이 브랜드 제품이었어?'라고 반응할 확률이 상당히 높죠. 예술작품 버금가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디자인은 물론이거니와 따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오디오인 줄도 몰랐다고 할 만큼 남다른 존재감을 풍기는 그 특유의 아우라 때문입니다. 


1925년, 덴마크의 젊은 엔지니어인 페테르 뱅(Peter Bang)과 스벤 올룹슨(Sven Olufsen)에 의해 탄생한 이 브랜드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제품이던 라디오 개발을 시작으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경쟁자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기술력과 극한의 내구성 테스트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들은 '오래 사용해도 늘 새것처럼'이라는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특유의 장인 정신을 발휘하며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당시 페테르와 스벤이 사용하던 연구실을 '고문실(Touture Chamber)'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늘날 뱅 앤 올룹슨 실험실의 공식 이름으로 이어져오고 있을 정도죠. 



창업 초기 시절의 피테르 뱅과 스벤 올룹슨의 모습입니다. 패션에서부터 그들의 디자인 사랑이 묻어나는 모습이죠. 



하지만 파릇파픗한 이 두 청년에겐 기술과 품질만큼이나 유독 애착이 강했던 분야가 있었습니다. 바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어느 곳에 자리하던지 관계없이 항상 뛰어난 조형미를 뿜어내주길 바랬고 이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경험이 한층 더 높아지기를 원했거든요. 좋은 기술이 좋은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것처럼, 좋은 디자인 역시 좋은 기술에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던 겁니다.

그래서인지 뱅 앤 올룹슨이란 브랜드는 이 두 창업자보다 지금의 제품 디자인 철학을 완성한 디자이너들이 더 유명한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들 속에는 야콥 옌센(Jacob Jensen)과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라는 입지적인 디자이너가 존재하죠. 



형태의 브랜드, 뱅 앤 올룹슨 


야콥 옌센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외른 웃손(Jørn Utzon)의 애제자로, 당시 웃손이 학계 최초로 만든 산업디자인 학과를 1호로 졸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중반 뱅 앤 올룹슨과 인연을 맺은 그는 훗날 베오마스터, 베오그램과 같은 기념비적인 제품은 물론이고 음향 기기로서는 처음으로 터치스크린이 적용된 베오센터 등을 디자인하며 살아있는 전설의 반열에 오르죠. '제품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야콥은 경험주의 디자인으로 대표되는 뱅 앤 올룹슨의 디자인 근간을 만들었단 평가를 받습니다.


옌센이 디자인 한 베오그램 4000의 모습입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 제품입니다.



반면 데이비드 루이스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며 무려 40년이 넘게 뱅 앤 올룹슨의 제품 디자인을 맡아온 디자이너인데요, 특히 모든 스피커가 직사각형 형태를 고수할 때 홀로 심벌즈에서 영감을 받은 원뿔형 모양의 스피커 베오랩 5를 선보이며 음향 업계 역사상 가장 큰 충격을 준 사람이기도 하죠. 외관적 장점 덕분에 360도 어느 방향으로도 사운드 전달이 가능한 이 모델은 뱅 앤 올룹슨의 모든 제품 중 가장 위대한 걸작 1위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아마 뱅 앤 올룹슨이란 브랜드에 흠뻑 빠진 것도 이 베오랩 5를 처음보고 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얼마나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뱅 앤 올룹슨에 존재했느냐가 아닌 그 너머에 있습니다. 야콥 옌센과 데이비드 루이스를 포함한 뱅 앤 올룹슨의 디자이너는 모두 정식 고용되지 않은 프리랜서이기 때문이죠. 한 명이라도 더 좋은 디자이너를 모셔오고 또 묶어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산업 디자인 업계 분위기를 생각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 뱅 앤 올룹슨은 이 외부 디자이너들에게 최고경영자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부여하거든요. 제품 출시부터 모델 라인업을 완성하는 최종 의사 결정도 모두 디자이너의 몫입니다. 특히 뱅 앤 올룹슨에는 이런 디자이너들이 한데 모여있는 '아이디어 랜드'라는 조직이 있는데요, 모든 제품의 원형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합니다. 디자이너에게 전권을 주다시피 해서 얻어낸 디자인과 콘셉트가 마련되면 그제서야 기술 부서, 제품 개발 부서, 생산 부서가 한 데 모여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현실화할지를 고민하는 것이죠.


2000년대 들어 디자인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브랜드는 셀 수 없이 많아졌지만 사실 뱅 앤 올룹슨 정도의 디자인 철학을 가진 곳은 쉽게 찾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특하면서도 유연하게 디자이너를 관리하고 또 훌륭한 결과물을 내는 곳은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궁금해집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형태에 집중하는 것이고 왜 이런 디자인 철학을 고수하는 걸까요? 



영혼을 받아줄 그릇 


그 이유에 답하기 앞서서 잠깐 화제를 돌려볼게요. 혹시 뱅 앤 올룹슨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왠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이라던가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레 떠오르려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예쁜 스피커'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뱅 앤 올룹슨은 자신들의 본질을 '정직한 음악적 재현'이라고 합니다. 네, 이쯤 되면 그냥 반전의 브랜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죠. 실컷 외형과 디자인 얘기를 하다 왜 또 갑자기 음악적 재현을 추구한다고 하는지 아리송한 것도 당연지사고요.  

그런데 뱅 앤 올룹슨은 실제 그 태동부터 지금까지 원음을 재현하는 것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브랜드입니다. 다른 음향 기기들이 웅장한 사운드, 콘서트홀 같은 현장감, 깨끗하고 따뜻한 음색처럼 조금이라도 차별화된 포인트를 끊임없이 제시하는 가운데 늘 홀로 왜곡 없는 원형 그대로의 소리를 구현하고자 했거든요. 그래서 뱅 앤 올룹슨의 모든 기술은 원음 재현을 추구한 가운데 빚어진 부산물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뱅 앤 올룹슨은 아주 오래전부터 꽤 고차원적인 접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직한 음악적 재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소리 자체를 연구하는 수준을 넘어 형태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어떤 디자인, 어떤 컨셉을 갖추든 간에 그 물체에서 나오는 소리만큼은 본래의 것과 동일해야한다'는 이 불가능한 미션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뱅 앤 올룹슨의 본질도 완성된다는 신념이었죠. 

결과적으로 이 믿음은 완벽하게 통했습니다. 풍뎅이의 등껍질을 닮은 스피커를 내놓든 쌍떡잎식물의 잎사귀를 형상화한 스피커를 내놓든 간에 엔지니어들은 그에 걸맞은 음향 시스템을 설계하는데 성공했거든요.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금기시되던 티타늄이나 패브릭 같은 소재를 아주 일찍부터 자유자재로 사용함으로써 훨씬 진보적인 제품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형태를 중요시하는 뱅 앤 올룹슨의 혜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관에서 오는 시각적 만족감이 본질적인 경험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 역시 간파했거든요. 특히 앞서 소개해 드린 디자이너 야콥 옌센은 이와 관련해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나는 술이라는 액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병에 담긴 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영혼(soul)을 받아줄 그릇(bowl)이 없다면 본질은 떠돌이가 되기 때문이다." 


라는 명언으로 뱅 앤 올룹슨이 추구하는 형태에 대한 집념을 한 방에 정리해버렸습니다. 



답은 찾는 게 아니라 완성해가는 것 


사실 그렇습니다. 저도 일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포인트지만 본질과 형태, 어느 한 쪽의 밸런스라도 무너지면 결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었거든요. 본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형태로 풀어내기가 어려운 법이고, 형태가 힘을 갖지 못하면 본질마저도 뒤틀리고 축소되는 촌극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뱅 앤 올룹슨이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두 가치 사이의 밸런스를 더욱 정교하게 맞춰가기 위한 노력은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에게는 그저 디자인이 화려한 음향 기기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음악이라는 본질은 최대한 지키고, 듣는 경험이라는 형태는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한 브랜드니까요. 이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즐기도록 하는 게 뱅 앤 올룹슨을 만들고 디자인한 사람들의 진짜 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저 개인적으로도 뱅 앤 올룹슨이란 브랜드를 이해해가면서 본질병에 대한 부담감을 꽤 많이 덜어냈다고 확신합니다. 그전까지는 규모와 상관없이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나름의 본질을 규정해야 그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었거든요. 물론 그 과정 역시 매우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무엇이든 과해 지기 시작하면 본래의 목적은 금세 휘발되어 버리더라고요. 본질 찾기에 집착하는 태도로 인해 더 좋고 다양한 가능성들을 차단해 버리는 느낌마저 드니 겁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즈음해서 절친한 디자이너 친구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 역시 세상 모든 브랜드들이 '우리가 곧 본질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아서 피로감을 느끼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체육시간에 나와 똑같은 부위를 다쳐 양호실에 나란히 누워있는 친구 마냥 동질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본질과 형태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꺼내보던 중 거의 동시에 '뱅 앤 올룹슨'이란 이름이 튀어나왔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형태가 본질을 완성시킨다'라는 우리 나름의 그럴싸한 합의에도 도달했죠. 


더 재미있는 건 며칠 뒤였습니다. 원래 그 친구의 책상에는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 하나가 꽤 오랜 시간 붙어있었는데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냈다면, 이제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를 알아내라'는 멕시코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 카를로스 마르시알의 격언이었죠. 그 말이 늘 자기 디자인의 모토라고 했던 터라 저에게도 인상 깊게 자리한 문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화 이후 그 글귀 위아래로 파란색 화살표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저게 뭐냐고 묻는 제 물음에 친구는 이렇게 답했죠.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 고민하다 보면 뭘 말하고 싶은지도 더 명확해지는 것 같더라고. 예전엔 이게 일 방향인 줄 알았는데 우리 같이 얘기한 이후로는 쌍방향인 게 확실해진 느낌이랄까?"


이처럼 좋은 브랜드는 때론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하나 봅니다. 

저도 친구의 말에 120% 동의하는 바입니다. What이 결정되어야 꼭 How로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서로를 자유롭게 오가며 본질은 또렷하게, 형태는 완성도 있게 갖추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브랜딩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세상에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접근할 땐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완성해간다는 느낌으로 다가서는 게 핵심이니까요.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실 오디오에 정통한 사람 중에 뱅 앤 올룹슨을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그것보다 훌륭한 소리를 내는 스피커가 널렸다'는 사람도 있고 '귀로 듣는 오디오에 그런 예술작품 같은 디자인이 왜 필요하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취향과 의견이야 서로 존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저도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때마다 혼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긴 합니다. 


"저분들에게 본질과 형태는 어떤 방향에서든 미완성일 수 있겠구나."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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