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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pr 10. 2022

한 사람의 캐릭터를 추출한다는 건 이토록 위대한 일이다

크리드의 맞춤 향수 이야기 

'프루스트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이름을 딴 이 용어는, 그가 1910년대 출간한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덕분에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이 책에는 주인공이 마들렌 조각을 홍차에 적시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생히 떠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처럼 어떤 냄새로 인해 특정한 기억이 호출되는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프루스트 효과를 설명하는 그림들도 정말 많습니다. 책의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기도 하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좋아하는 냄새가 있습니다. 비가 내린 뒤 촉촉해진 땅이 틔우는 옅은 흙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코끝이 쨍할 정도로 추운 겨울날 버스 정류장 앞에서 풍겨오는 어묵 국물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저는 특이하게도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스케치북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합니다. 약간의 나무 향과 또 약간의 기름 향이 섞여 올라오는 그 냄새가 의외로 포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쩌면 학창 시절 책상에 엎드려 잘 때 스케치북을 자주 펴놓고 자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냄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해요. 이렇게 맡자마자 본능적으로 기분 좋음을 느끼는 냄새가 있나 하면 앞서 말한 프루스트 효과처럼 특정한 기억으로 연결되는 냄새가 있는 거죠.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감각 중 기억과 가장 밀접한 감각이 바로 후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두뇌에는 냄새를 분석하는 후각 신경구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신기하게도 이 후각 신경구가 위치한 곳이 우리의 기억을 다루는 편도체와 해마 바로 근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냄새가 주는 정보가 우리 뇌를 거쳐갈 때 잠들어있던 기억을 하나둘씩 깨우고 지나가는 셈이죠. 


이런 이유를 일찌감치 간파한 마케팅 업계는 오래전부터 냄새를 이용한 광고와 브랜딩을 시도했었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이 던킨 도너츠 매장 근처에 가까워지면 차내에 고소한 베이글 향이 퍼지도록 자동 디퓨저를 설치한 사례도 있었고, 한때 북미 시장을 호령했던 패션 브랜드 아베크롬비 앤 피치는 아예 전 세계 매장에서 똑같은 향기가 날 수 있도록 매장용 조향 시스템과 전용 향수를 개발하기도 했었죠. 브랜딩이란 모든 감각을 동원해 특정한 인식을 심어주려 노력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기억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단인 후각이 빠질 리가 만무한 겁니다. 



위대한 향기의 시작 


그럼 여기서 관점을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브랜딩 하기 위해 냄새를 이용하는 것과는 반대로 냄새 자체를 브랜딩 해야 하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수단과 목적이 반대가 되는 이 상황에서는 냄새를 브랜딩 하기 위해 어떤 매개체를 이용할 수 있는지 또 그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쯤 되면 다들 예상을 하고도 남으시겠지만 '향수'라는 영역이 바로 그런 영역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수야말로 브랜딩의 끝을 달리는 카테고리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제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케이스로 된 용기를 벗어나는 순간은 무형의 물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다 또 그것이 누구의 몸에, 어느 부위에, 심지어 어떤 체온에 닿느냐에 따라 아주 조금씩 향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브랜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미완성의 상태로 태어나 사용을 거듭하며 완성형이 되어가는 것' 혹은 '우리다움이라는 공동체 의식 대신 지극히 나다움을 상기시키는 개인화의 산물'이 바로 향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이 낯설고도 특별한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해 줄 오늘의 브랜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니치 향수 브랜드 '크리드(Creed)'입니다.  

   

크리드의 역사는 1760년 제임스 헨리 크리드(James Creed)가 '하우스 오브 크리드'라는 이름의 작은 부티크를 열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부유한 귀족들을 위해 비스포크 정장이나 맞춤형 가죽 장갑 같은 제품들을 주로 판매했는데 이때 가죽에 덧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아주 소량의 향수를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수한 품질과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지역 상류층에게 사랑받던 크리드는 1781년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 하나와 마주하게 되는데요. 당시 대영제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3세가 우연히 크리드가 만든 가죽 장갑을 보게 되었고 그 장갑에서 나는 향에 매료되고 말았던 것이죠. 조지 3세는 곧장 제임스 크리드에게 자신만을 위한 향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고, 제임스는 국왕이 맡았던 가죽 향의 기억을 재구성해 그에게 가장 어울릴 수 있는 향수를 개발합니다. 크리드의 공식적인 첫 향수 '로열 잉글리시 레더'는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크리드의 '로얄 잉글리시 레더'입니다.



이후 크리드는 영국 왕실의 공식 향수 작위를 받으며 유럽 전역으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이때부터는 기존에 판매하던 의류, 잡화보다 맞춤형 향수에 대한 주문이 물밀듯이 쏟아지게 되는데 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1800년 대 중반에는 하우스 오브 크리드를 아예 파리로 이전하게 되죠. 

제임스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헨리는 본격적으로 맞춤형 향수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유제니 황후를 비롯해 빅토리아 여왕, 오르세 백작, 엘리자베스 여왕 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향수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향수의 베이스가 되는 원료는 늘 최고급만을 고집했고, 디테일한 조향을 위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험실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죠. 또 사람들의 몸과 옷에 닿으면 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의학과 재료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나를 타인에게 보내는 법, 타인을 나에게로 오게 하는 법 


그런데 이 과정에서 크리드만의 놀라운 전통이 하나 생겨납니다. 오랫동안 특정인을 위한 향수를 제작해오던 그들은 좋은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향뿐만 아니라 그 향을 사용할 사람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제임스가 조지 3세를 위한 향수를 만들 때 그가 매료된 가죽 향의 기억을 복원했듯이 누군가의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있던 기억과 욕망을 발굴해 내는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죠. 


이를 위해 크리드는 두 가지의 매우 흥미로운 작업을 합니다. 하나는 향수를 사용할 사람을 분석하기 위해 의뢰인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들의 기억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거였죠. 평소 본인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지, 어떨 때 의지가 샘솟고 또 어떨 때 만족감을 느끼는지 등을 적게는 수십 가지, 많게는 백여 가지 질문으로 만들어 심리학자에 버금갈 만큼 상세히 탐구했다고 합니다. 18세기의 보수적인 환경 속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의 향수하나 만들어주쇼' 같은 의뢰는 제아무리 높은 사람의 주문이라도 정중히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크리드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의뢰인에 대한 분석이 끝나면 이번엔 그 의뢰인을 둘러싼 주변인들을 인터뷰하는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까운 주변인부터 그저 존재만 흐릿하게 알고 있는 먼 관계의 사람들까지 매우 폭넓은 인터뷰가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의뢰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과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우스 오브 크리드에서는 나와 내 주변에 존재하는 작은 기억의 조각들까지 모조리 수집하고 나서야 조향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또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향이야말로 정말 '그 사람 다운 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향수는 나를 타인에게 보내는 방법이자, 타인을 나에게로 오게 하는 방법'이라는 제임스 크리드의 신념이 그대로 녹아든 향수를 만든 겁니다. 


크리드의 이러한 아이덴티티는 무려 260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윈스턴 처칠, 존 F. 케네디를 비롯해 모나코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개인 향수를 제작하기도 했죠. 그중 가장 유명한 걸작으로 칭송받는 제품은 아마 오드리 헵번을 위해 만든 향수 '스프링 플라워'가 아닐까 합니다. 강렬한 핑크색병 위로 그녀가 로마의 휴일에서 매고 나온 쁘띠 스카프 모양의 리본을 단 이 제품은 오드리 헵번이 평생에 걸쳐 주문한 향수로도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헵번을 그대로 해석한 크리드 '스프링 플라워' 향수입니다. 



사실 크리드는 1970년에 이르러 대중화된 상품을 내놓기 전까지는 철저히 개인 맞춤형 향수만을 제작했기 때문에 당대 유명했던 의뢰인들이 크리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공식적인 사료로 남은 게 별로 없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한 번 주문한 크리드 향수는 아주 오랫동안 수차례에 걸쳐 재주문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크리드라는 이름보다는 자신을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향수를 불렀다는 점'이 대표적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 전문 콘텐츠 기업인 '퍼퓸 소사이어티'의 공동 창업자 로나 맥케이(Lorna McKay)는 그들이 크리드에 열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죠. 


"인생을 살면서 '나로 대표되는 향기'를 가진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의미예요. 누군가 어떤 냄새를 맡고서 나를 떠올려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감동적이고 영광스럽지 않나요? 크리드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겁니다. 단순히 향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진 고유한 향을 추출해낸 것이죠."


향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열린 것은 딱 저 말을 듣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인간이 가진 고유한 향을 추출한다'. 

어쩌면 문학적 수사에 그칠지 모르는 이 문장이 또 한편으로는 향수가 아닌 다른 분야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래 향기란 냄새의 일종인 건 다들 알고 계시죠? 냄새 중에서도 꽃이나 섬유, 향수 등에서 나는 좋은 냄새만을 일컬어 향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이를 확장해 본다면, 꼭 향기는 아니더라도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는 자신만의 냄새가 있고 저는 브랜드에도 생명력이 있다고 믿으니까 브랜드 역시 각각의 냄새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자연스레 한 가지 질문이 따라붙죠. 과연 어떻게 해야 각자가 지닌 혹은 각 브랜드가 지닌 고유의 냄새를 추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굳이 향수를 만들게 아니라면 그렇게 추출한 각자의 향은 또 어디에 어떻게 써야 맞는 걸까요? 



사람의 향기를 빌리다 


어쩌면 저는 그 답도 크리드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군가의 향기를 발굴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캐릭터를 추출하는 것과도 같다고 보거든요. 즉 크리드가 자신만의 향수를 의뢰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다움'을 끄집어 낸 것처럼 한 인물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노력이 때로는 좋은 결과물을 가져다줄 때가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고 브랜딩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면 그 목표를 특정한 인물에 대입해 보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맨땅에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올려야 하는 작업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애먹는 부분은 목표가 선명하지 않을 때나 혹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각자 다른 목표를 떠올리고 있을 때죠. 그러니 이를 한데 모으고 더 또렷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한 인물의 캐릭터를 빌려오는 것은 매우 적절한 도구 사용법이기도 합니다. 


"다정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고, 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거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좀 차별화된 포인트는 뚜렷했으면 하는데... 자연스러우면서도 엣지있는 뭐 그런 거 없을까요?"


아마 이와 비슷한 요구를 들어보신 분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 사람과는 전생에 무슨 악연이었길래 나에게 이렇게도 힘든 과제를 안겨주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저도 여러 번 해봤죠.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 사람 역시 최대한 자세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을 겁니다. 다만 아무 밑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하려다 보니 밸런스를 맞추고 조화를 고려할 틈이 없었던 거겠죠.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틈을 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틈새로 스며드는 빛을 따라 천천히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죠. 

그래서 언젠가부터 저는 과제의 방향성을 논하는 대화 사이사이에 이런 물음을 하나씩 끼워 넣습니다.


"혹시 사람으로 치면 누구와 비슷한 느낌일까요?"


네. 이 질문을 던지면 초반에는 대개 당혹해하는 분들이 많죠.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제품이나 브랜드 혹은 공간을 사람에 비유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반대로 특정인에게서 어떤 구체적인 느낌을 뽑아낸다는 것 역시 익숙지 않을 수 있고요. 

하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모델링을 거듭하다 보면 듣는 분들도 공감하고 함께 집중해 줄 때가 많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캐릭터의 선택지가 다양하다면 훨씬 더 접근이 쉬워지고요.


"캐릭터로 보자면 유재석 님 같은 느낌을 원하시는 걸까요? 누구나 좋아하는 만인의 인물이면서도 뭔가 자기만의 갖춰진 세계가 있는 그런 느낌이요. 아니면 유희열 님이나 윤종신 님 스타일에 더 가까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음악인이라는 뿌리는 딱 서있고 그걸 중심으로 다방면에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는 캐릭터인 거죠. 편안한 호감형이면서도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요."


재미있는 것은 이때부터 사람들 각자의 기억 안에 자리한 데이터 베이스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어떤 느낌이면 좋겠다고, 막연하고 흐릿하게만 존재하던 요구사항들이 특정한 캐릭터의 향을 맡는 순간 선명하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떠오르는 것이죠. 

게다가 묻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캐릭터가 있다면 서로의 목표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도 훨씬 유리합니다. '우리 진짜 멋지고 신나는 거 한번 만들어봐요.'라는 식의 말보다 '우리 브랜드가 비틀스처럼 60년이 넘어도 여전히 사랑받는 그런 클래식이면 좋겠어요.'라는 주문이 명확한 지향점을 설계해 줄 수 있는 것처럼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더할까


가끔은 이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캐릭터를 추출해 볼 수도 있습니다. 

혹시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들이 어떤 식으로 향기를 대하는지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한 문장으로 정의해 본다면 '연결과 해체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땐 그냥 특정한 향을 가진 재료들을 적절히 고르고 배합해서 새로운 향수를 하나 뚝딱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향들을 모두 해체해서 서로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는 작업의 연속인 거죠. A라는 물질이 가진 냄새의 성분을 모두 분리해 그중 하나를 B라는 물질과 연결해 보고, 그렇게 C라는 물질이 되면 또 이걸 완벽하게 다듬기 위해 D를 더하고 E를 빼는 식입니다. 그러니 조향의 세계 역시 새로운 인격을 하나 만드는 것과 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죠. 


조향의 세계가 이렇게나 심오합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특정한 캐릭터에 비유하고 대입하는 수준을 넘어 그 캐릭터를 잘 분석하고 해체한 다음 다른 캐릭터와 결합시켜보는 시도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왜 가끔 토크쇼를 보다 보면 출연한 배우들을 향해 진행자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죠. 


"혹시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나 배역이 있을까요?" 


그럼 배우들은 굉장히 진지한 고민에 빠집니다. 평소 액션이나 스릴러 영화에서 표독한 악역을 도맡았던 배우라면 한 번쯤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멜로 연기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답하죠. 반대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우들은 그동안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깨지고 망가지는 코믹한 역할을 맡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캐릭터에서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하고 싶은지, 이를 통해 대중들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지 그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답변들이죠. 마치 그 옛날 제임스 크리드에게 향수를 의뢰하던 사람들이 자기다움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과 또 한편으로는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두 가지 모두를 담은 향기를 원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제품이나 서비스, 브랜드를 기획해야 하는 어떤 순간과 맞닥뜨렸을 때 특정한 캐릭터들을 연결하고 해체하며 방향 설정을 해볼 수 있는 거죠. 

연습을 한 번 해볼까요? 동화처럼 몽환적이고도 한편으로는 기이한 연출로 유명한 팀 버튼 감독이 동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든다면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을까요? 마이클 잭슨이 여전히 살아있었다면, 그래서 그래미 어워즈 시상식에서 BTS와 한 무대에 섰다면 어떤 곡을 가지고 어떤 퍼포먼스를 선보였을까요? <킹덤>의 김은희 작가가 달콤한 연애 소설을 쓴다면, 백종원 선생님에게 요리를 제외한 다른 주제의 콘텐츠를 제안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어떤 향을 남기고 또 어떤 향을 추가해야 할까요?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이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떤 인물이 가지는 캐릭터를 레고 조립하듯 마음껏 떼었다 붙이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만들고 싶은 상()이 더 큰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그 생명력은 고유의 진하고 깊은 향을 뿜어낼 거라고 보고요. 


개인적으로는 이 크리드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고 또 향기와 캐릭터에 대해 생각이 뻗어가면서 조금 달라진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기획 중인 과제에 방향성을 주고 싶을 때면 주로 이런 말들을 사용했던 것 같거든요. 

(어떤 특정한) 느낌을 주자 / 감정이 들도록 하자 / 인식을 심어주자 / 관점을 제공하자 같은 말들이요. 그런데 이제는 거기에 새로운 표현이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향을 입히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대상의 고유한 향기는 유지한 채 어떤 분위기나 기억으로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특정한 누군가를 생생히 떠올리거나 나아가 새로운 인격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해주자는 의미쯤 되겠죠. 한편으론 다른 감각보다 더 길고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는 후각처럼 '향을 입히는 과정' 역시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와 본질을 가장 오랫동안 머금고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담겨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프루스트 효과'를 잇는 '크리드 효과'라는 용어가 통용되기를 바라봅니다. 어떤 냄새로 인해 특정한 기억이 호출되는 현상이 프루스트 효과라면, 어떤 냄새로 인해 특정한 '누군가'가 떠오르는 현상은 크리드 효과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2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크리드를 사랑해온 수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향을 발굴하고, 담고, 퍼뜨리고, 기억하게 하는데 공을 쏟은 이유도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머릿속에 머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니까요. 

이쯤 되니 왜 향기 뒤에는 항상 '남긴다'라는 표현이 따라붙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설사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더라도 또 예전의 그 쨍한 향기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부르면 언제든 다시 기억의 문을 열고 나올 만큼의 적당한 양은 남겨놓을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좋은 향기를 많이 남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브랜딩이자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누군가의 기억을 차지한다는 것만큼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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