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D에게서 배우는 스토리 가드닝(Story-Gardening)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Sapiens)'를 보다 보면 꽤 흥미로운 접근법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라리 교수는 인간이 종으로써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데는 불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못지않게 이야기를 생성하고, 믿고, 퍼뜨리는 능력이 중요했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특히 종교나 담론처럼 탁월한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이야기들은 인류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하고 또 서로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갖게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합니다.
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이야기를 쏙 빼버린다면 과연 어떤 재미와 의미가 있을까 싶거든요. 더불어 브랜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이야기의 힘을 간과하는 케이스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동일한 조건의 제품이 나란히 놓여있더라도 어떤 것이 더 멋지고 더 진솔한 이야기를 전달해 주느냐에 따라 그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가 쑥 올라가기도 하고, 또 평범해 보이던 제품이나 서비스도 그 뒷면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 하라리 교수의 시각을 빌려본다면 브랜드 역시 누가 더 매력적인 스토리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 스토리를 어떻게 지키고 다듬으며 잘 이어나갈 수 있는가가 브랜드의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와중에도 참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하는 것이죠. 똑같은 팩트를 가지고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수백 년 넘게 반복되며 이어져오는 주제들에도 전에 없던 새로움을 담아 스토리를 완성해 내는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매력적으로 말한다는 것,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 신선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평생의 숙제와도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우리가 흔히 아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주제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스토리텔링만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단어도 드물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의 조건들을 외치고 있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 공통된 법칙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죠. 요즘엔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도 감동과 재미를 전달하는 이야기들이 아주 흔합니다. 기술적인 장치나 방대한 서사 없이도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이야기도 있고요.
그러니 스토리텔링을 대함에 있어서는 결과론적인 기준으로 어떤 법칙들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이야기가 생겨나고 또 퍼질 수 있는 환경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진화의 필수 요소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기보다 어떤 환경이 인류의 진화를 이끌 수 있었나를 관찰한 하라리 교수처럼 말이죠.
혹시 '엘리베이터 스피치(Elevator Speech)'라고 들어보셨나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1분 남짓 한 시간에도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흔히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투자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기술로도 활용하죠.
그런데 저에게는 이 엘리베이터 스피치를 약간 변형한 '서브웨이 스피치(Subway Speech)'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가끔씩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그 시간이 20분을 잘 넘지 않거든요. 그럼 저는 주로 TED 영상 한편을 켜서 보곤 합니다. 각 영상마다 한 명의 발표자와 하나의 주제가 있는 TED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이야깃거리를 다루고 있거든요. 그러니 지하철로 이동하는 그 20분 동안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제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며 시청하는 거죠. 매일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을 하는 저로서는 그 순간만큼은 '그래. 어디 자네가 한번 나를 설득해 보게나.'라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발동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유구한 역사나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브랜드들도 많겠지만 저는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특히 스토리텔링이라는 관점에서는 TED야말로 그 실마리를 풀어줄 가장 적절한 브랜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일한 포맷을 가진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이렇게나 많은 주제들을 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 '사람'과 '이야기'라는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매개체만을 가지고 세상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지는 것도 경이로우니까요. 가끔은 이렇게 기본적인 재료들로 더없이 훌륭한 요리를 완성한 브랜드를 살펴보는 것이 진짜 제대로 된 브랜드 공부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에게 TED라는 이름과 함께 주요 강연 영상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2000년대 후반 무렵이었을 겁니다. 실제 미국에서도 TED Talks라는 제목의 첫 번째 온라인 강의가 포스팅된 것이 2006년 6월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TED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4년 ABC 방송국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해리 마크스(Harry Marks)와 건축가이자 도시 설계자였던 리처드 사울 워먼(Richard Saul Wurman), 이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서부터 그 역사가 출발하거든요.
이들은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던 실리콘밸리의 문화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들이 태동하던 80년대 캘리포니아는 말 그대로 세상을 바꿀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었죠. 서로 다른 분야에 몸담고 있었지만 남다른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었던 해리와 리처드는 어느 날 깊은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기술과 디자인을 더 유연하게 연결해 주는 존재가 있다면 훨씬 멋진 아이디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죠.
그리고는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서 TED라는 이름의 비공개 컨퍼런스를 만들게 됩니다. 소수 정예의 사람들에게 다가올 시대를 먼저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주제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핫한 기술과 디자인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기술력과 디자인 트렌드를 테마로 첫 번째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당시 필립스와 소니가 공동 개발한 새로운 저장매체인 CD(Compact Disk)를 북미에서 제일 처음 선보인 자리도 이 컨퍼런스였고,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의 데모 시연이 가장 먼저 진행된 행사도 이 TED 컨퍼런스였죠. 누가 봐도 혁신의 영혼까지 끌어모은 최고의 행사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이부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거든요. 이때의 적자로 인해 TED의 두 번째 컨퍼런스는 6년이나 지난 199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열리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무엇보다 앞선 미래를 보여주기만하면 저절로 흥행할 거라는 두 사람의 기대가 무너진 것이 가장 큰 데미지였죠. 그리고 훗날 TEDMED(TED의 의학 관련 컨퍼런스)의 의장으로 취임한 자리에서 리차드는 수십 년 전을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때 해리와 저는 기술과 디자인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멋진 것들은 다 그렇게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야기'였죠. 우리의 첫 번째 컨퍼런스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게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한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뼈저린 교훈을 얻은 해리와 리처드는 조금씩 TED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걸음은 기술,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이라는 3가지 카테고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죠. 그들은 정치, 문화, 예술, 과학, 환경, 종교, 사회 문제 등 공유할 가치가 있다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주제를 넓혀갔습니다.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TED의 슬로건 'Ideas Worth Spreading (퍼뜨릴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들)'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 바로 이때 정립된 셈이죠.
한편 발표할 연사를 고르는 원칙도 새로 마련했습니다. 방송국에 오래 몸담았던 해리는 주변 언론인들의 도움을 얻어 단순하지만 명확한 두 가지 기준을 정하는데 성공하죠.
첫째, 그 주제에 가장 정통한 사람을 무대에 올린다.
둘째, 이미 다뤘던 주제라도 새로운 시각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다시 무대에 올릴 수 있다.
즉 해당 분야를 가장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그 분야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관점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TED 컨퍼런스의 스피커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리와 리차드는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두 가지 퍼즐, 말하는 화자와 그 화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오롯이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TED 컨퍼런스는 점차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꽤 저명한 사람들이 연사로 또 참석자로 컨퍼런스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죠. 하지만 아직도 그들에게는 허기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를 공유한다는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여전히 TED는 그저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에 머물렀기 때문이었죠.
이런 고민이 깊어질 때쯤 TED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영국 출신의 유능한 미디어 사업가인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라는 사람이죠. TED가 창립 17년째를 맞이하던 2000년의 어느 봄날, 리차드는 우연히 '컨퍼런스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서 크리스를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크리스에게 TED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하게 되죠. 그 자리에서 TED의 비전을 간파한 크리스는 머지않아 TED가 새로운 미디어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낼 거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이 운영 중이던 '사플링(Sapling)' 재단을 통해 아예 TED 자체를 인수해버리고 말죠. TED가 비영리재단으로 변신한 것도,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버리고 공개 컨퍼런스로 전환한 것도,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TED의 모습을 갖춰가게 된 것도 바로 크리스가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 무렵 즈음의 일입니다.
해리와 리차드에게서 TED를 이어받은 크리스의 목표는 아주 명확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각인시키기 위해 TED 내부 직원들과 가진 첫 번째 회의에서 그는 단 한 번에 TED의 본질을 정의해 내죠.
"이야기가 힘을 가지는 순간이 언제일까요? 전 세 가지라고 봅니다.
첫째, 널리 퍼져나갈 때.
둘째, 누군가에게 의미 있게 다가갈 때.
셋째,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때.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이 세 가지가 가능한 TED를 만드는 것입니다."
소름 돋도록 명확한 비전을 심어준 크리스는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방법도 단 세 가지로 풀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우선 그는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지역을 중심으로만 진행되던 TED 컨퍼런스를 전 세계로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TED Global 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이 컨퍼런스는 이른바 자매 컨퍼런스(Sister Conference)라 불리며 마치 꼬리물기를 하듯이 지구촌 각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죠. 하나의 컨퍼런스가 흥행하면 그 주제를 바탕으로 여러 개의 다른 세부 주제를 파생시켜 다양한 컨퍼런스가 연쇄적으로 생겨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쓴 겁니다. 덕분에 각각의 이야기들이 계속 가지치기를 하며 스스로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되었죠.
두 번째는 TED의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TED Prize입니다. TED는 2005년부터 매년 혁신적인 활동을 하는 인물들을 골라 TED 상을 수여해 오고 있거든요. 브랜드가 자체적으로 수상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지만 TED 상에는 아주 특별한 프로세스가 하나 있습니다.
TED 상을 수상한 사람은 상금과 더불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소원' 티켓을 받게 되는데요, 수상자가 이 티켓에 써낸 소원이 곧 다음 해 TED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공통의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 사람의 바람을 널리 알리고 아예 함께 실천해나갈 과제로 등록해버리는 것이죠. 2018년부터 '대담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리뉴얼 되어 운영되는 TED 상은 그 규모를 훨씬 키워 이제는 세계 곳곳의 커다란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위의 프로젝트로 발전해가는 중입니다. 이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영향력과 실행력을 갖춘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게끔 하는 TED만의 전략인 셈이죠.
그리고 크리스가 설계한 마지막 퍼즐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TED Talks입니다. 크리스는 어떤 이야기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해리와 리차드가 설계한 '발표자를 선정하는 방식'이 핵심이라고 봤거든요.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를 스피커로 내세우거나 아니면 전에 없던 새로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TED의 연사 라인업은 각 분야를 넘어 지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입니다. 빌 게이츠, 스티븐 호킹, J.K 롤링, 일론 머스크, 미셸 오바마, 리처드 도킨스, 프란치스코 교황 등 수많은 인물이 무대에 올랐고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펼쳐냈죠.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 또한 의례적인 것이 아닌 매우 날카롭고 시사하는 바가 분명한 것들이었습니다.
더불어 TED는 '한 명의 발표자가, 지름이 3.3m인 원형 무대에 올라, 최대 18분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동일한 조건도 설정했죠. 이러한 포맷이 TED의 핵심이라고 설명한 크리스는 그 이면에 있는 의미를 진솔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현대판 아고라(Agora)였어요. 고대 그리스의 자유 시민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벌이던 장소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똑같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떤 환경에서든 누구나 그 콘텐츠에 접근 가능하도록 해야 했죠.
때론 우리 직원들이 제게 묻기도 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포맷에 집착하냐고 말이에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했죠. '나는 포맷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 집중하는 거야. 이야기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오직 이 두 가지만이 빛나게 하고 싶다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스토리텔링에 법칙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훌륭한 이야기도 많고 매력적인 전달자들도 많지만 그들의 이야기와 화법이 나에게 꼭 맞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 저 역시 다른 사람의 스토리텔링은 늘 좋은 참고 자료 정도로만 대하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의 인생이 멋지다고 그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이야기가 멋지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는 거니까요.
대신 '어떻게 해야 좋은 이야기가 탄생하는 환경을 설계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는 아주 관심이 큰 편입니다. 마치 크리스가 TED의 DNA를 바꿔놓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그 과정을 우리 개개인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 자신에게서 좋은 이야기를 끌어내려면, 동시에 나 스스로가 매력적인 스피커가 되려면 어떤 조건들을 갖춰나가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게 진짜 이야기꾼이 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싶은 거죠.
저는 그중에서도 다양한 이야기 포맷에 자신을 노출시켜보는 노력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업무적으로든 아니면 개인 프로젝트로든 발표할 기회가 자주 있는 편인데 의외로 주최하는 측에서 요청하는 포맷이 정말 다양하거든요. 어떤 곳에서는 발표 자료를 활용해서 1시간 정도의 세션을 진행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시각적인 자료 없이 15분 정도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가끔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질문들을 기반으로 일대일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을 제안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저라는 사람을 1시간용, 15분짜리용, 대담용으로 쪼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연스레 제가 가진 이야기들을 자르고 붙이고 다시 배열하는 작업들을 하게 되죠. 그런데 타의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만들어준 포맷에 제 이야기를 맞추는 과정은 다시금 저를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게 하는 기회가 되더라고요. 그 포맷이 다양할수록 제가 가진 이야기들 역시 더 생생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요.
어쩌면 TED가 18분짜리 강연이라는 포맷을 강력히 밀고 있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18분이라는 시간동안, 아무 도구 없이, 오직 당신의 이야기 만으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할 수 있는가'라는 전제 조건을 달면 스피커들은 그에 맞춘 이야기들을 들고 올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누군가는 시작부터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충격을 선사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야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거죠. 조건에 제약을 둠으로써 이야기는 더 다양해지고 더 풍부해지는 아이러니가 탄생하는 겁니다.
대신 TED는 TED Talks 외에도 다양한 타입의 이야기 포맷을 추가하며 좋은 스토리를 발굴하고 퍼뜨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적합한 짧은 동영상들은 TED-Ed를 통해 제공하고, 청소년과 여성을 중심에 둔 주제들은 각각 TED Youth와 TED Women에서 다루도록 하죠. 공연과 강연이 함께 어우러진 TED Salon이나 크리스 앤더슨이 직접 연사들을 만나 TED Talks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TED Interview도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비슷한 이야깃거리들이라도 어떤 포맷을 던져주느냐에 따라 이를 전달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죠.
그러니 매력적인 이야기 소재가 없다고 생각되거나 이를 힘 있게 끌고 나갈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땐 타인이 만들어 놓은 포맷에 의도적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TED 무대에 직접 올라선다고 상상해 봐도 좋고 아니면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하는 인터뷰에 참여한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럼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올 테니까요.
한편으로는 내 이야기와 함께 동행할 파트너를 정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함에 있어 가장 힘들어하는 때가 바로 '뭘 얘기해야 하나?'라는 아주 근원적인 고민과 부딪힐 때입니다. 즉 나에게는 스토리텔링으로 풀어갈만한 재미난 에피소드나 남다른 정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야기야말로 늘 발화점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봅니다. 내 안에 갇혀있던 생각이나 감상이 '이야기'라는 형태를 갖추어 타인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동기부여가 있어야 하니까요.
혹시 TED X라는 프로그램을 아시나요? TED X는 일종의 오픈 소스 개념의 컨퍼런스로 특정한 주제나 장소, 대상과 결합해 각자만의 TED 컨퍼런스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개방형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기업이나 대학교, 관공서 등에서 TED X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죠. 재미있는 것은 이 TED X가 어떤 주제, 어떤 상황과 엮이느냐에 따라 정말 기상천외한 이야깃거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10년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에 일어났죠.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는 바람에 유럽 전역의 비행기가 결항되자 런던에 발이 묶인 기업가, 과학자, 예술가들이 서로 연락을 취해 '우리 할 일도 없는데 TED나 할까요?'라며 TED X VOLCANO라는 컨퍼런스를 기획한 겁니다. 정말 아무 연고도, 공통된 주제도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아이슬란드'와 '화산'이라는 주제를 기반으로 각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나간 것인데 이게 소위 말해 대박을 치고 맙니다. 즉흥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심도 있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고, 실제 그 컨퍼런스에서 인연을 맺은 교수진들은 국경을 초월해 공통 연구를 시작하기도 했죠. 해당 컨퍼런스에 참여한 기업들은 이들을 직접 후원하기까지 했고요. 이 모든 게 불과 화산 폭발 48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고 현재는 세계 최초의 플래시몹 포럼으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한때는 글을 쓰든 발표를 하든 좋은 이야깃거리를 찾아 스스로를 쥐어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나라는 대상을 물리적으로만 바라본 결과였죠. 하지만 지금은 내가 다른 무엇과 결합했을 때 어떤 반응이 촉발될까라는 기대감으로 이야기의 소재를 찾습니다. 저 주제에 나를 얹는다면, 저 사람들 무리에 나를 끼워 넣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고 저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일종의 화학적 관계로 다가가는 것이죠.
물론 모든 상황에서 최적의 이야깃 감을 찾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예상보다는 꽤 자주 쏠쏠한(?) 수확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 스토리를 끌어갈 때도 무조건 혼자의 힘으로 몰아 붙어야 한다는 굳은 결심은 잠시 접어두고 괜찮은 동행자를 찾는 것이 훨씬 똑똑한 방법일지 모릅니다.
몇 해 전 가드닝에 관한 책을 한 권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분야인데 그 책만으로도 정원을 가꾸고 식물을 관리한다는 게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일인지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저자에 관련한 내용을 좀 더 찾아보다가 한 언론사와 인터뷰하신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죠. 거기엔 이런 코멘트가 담겨있었습니다.
"세상에 같은 식물은 단 하나도 없답니다. 추운 날씨에도 잘 자라는 품종이 따뜻한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 꽃망울조차 틔우지 않을 때가 있어요. 반대로 남들은 키우기가 어렵다는 식물이 내 손에서는 별 수고로움 없이 쑥쑥 자라기도 하죠. 그래서 식물을 키우는 일은 누가 더 많이 아느냐 보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게 '가꿈'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마음으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다음, 저들 각각의 인생을 응원하는 거죠."
맞아요. 저는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도 식물을 다루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같은 종이라도 각자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기가 다른 것처럼 우리 개개인이 가진 이야기가 스토리텔링으로 연결되는 과정 역시 모두 다를 게 분명하거든요. 그러니까 건강하고, 진실되고, 매력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스토리텔링 역시 그 이야기가 발현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끊임없이 가꿔가는 것만이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다음 저마다의 이야기를 열심히 응원해 주는 거죠. 세상에 또 하나 의미 있는 싹을 틔울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동안 '이야기'라는 단어 뒤에 만들다, 전달하다, 기억하다, 남기다 같은 서술어만 생각하셨다면 이번 기회에 '가꾸다'라는 개념을 하나 추가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여러분 만의 작은 정원에서 다양한 모습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누군가가 놀러와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관심을 보인다면 그 이야기를 심고 가꿔온 과정을 한번 설명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스토리텔링이란 게 뭐 별거인가요. 내가 가꾼 것들을 찬찬히 되짚어 살펴 가다 보면 그게 바로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이자 나만의 스토리텔링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