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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Feb 25. 2024

발전과 진화는 '쪼개짐'으로부터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78

01 . 

가끔 회사의 허가 하에 외부 강의를 진행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예 제 선에서 손사래를 치며 정중히 거절하는 강의들도 있죠. 바로 '트렌드를 주제로 강의를 해달라'고 오는 요청들이 그렇습니다. 저 역시 트렌드를 이해하고 따라가기 바쁜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트렌드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미안해지는(?) 일이거든요.


02 . 

물론 IT라는 필드와 브랜딩이라는 직무를 결합하면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뭔가를 제시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저 뿐만 아니라 비슷한 일을 하는 많은 분들 역시 '내가 트렌드를 선도하는 중이다!'라는 생각으로 일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흐름과 온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그 안에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겪을 삶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인지에 조금 더 민감한 사람들이 많은 거겠죠. 그리고 이건 비단 특정한 직군이나 직무에 묶여있는 고민이 아닌 만인에 대한 만인의 질문일 거라 생각됩니다.


03 .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하는 독서모임에서 이번엔 이 '트렌드'라는 키워드를 꺼내봤습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가장 핫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읽을거리로 선정했죠. 개인적으로도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저자인 송길영 박사님의 인기 또한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다가올 미래의 (혹은 현재 진형형인) 다양한 화두에 대한 이해'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세상이 이렇게 바뀐다는데 어느 정도 공감하나요? 그리고 진짜 이런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에 대한 것이죠.


04 . 

개인이 부각되는 삶을 고찰한 책은 많지만 저는 이 책에서 '핵개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발전과 진화의 시작은 '쪼개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더하고 이어서 더 나아지는 것들도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쪼갤 수 있는 데까지 쪼개서 그 속성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기본 입자를 제외하면) 물직의 가장 작은 단위라는 '원자'의 기원이 되는 라틴어 atomos도 자르다는 뜻의 tomos와 부정어 a가 합해진 단어로, 기원전 450년 전의 그 옛날에도 세상을 분절해 이해하고픈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죠.


05 . 

과학이나 의학처럼 과거에는 끝인 줄 알았던 그 마지막 영역에서 한 꺼풀을 더 벗겨내 발전을 이루는 것들이 있고, 반도체처럼 더 정밀히 가공하여 집약적으로 공간을 쪼개 활용할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 이런 예시들을 떠올려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오늘날 우리를 열광하게 만드는 엄청난 CG 기술은 사실 컴퓨팅 시스템과 렌더링 체계의 발전에 앞서 픽셀과 프레임을 더 정교하게 쪼갬으로써 진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더 작은 픽셀 하나, 더 짧은 프레임 하나에 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화면들이 연출될 수 있었던 거죠.


06 . 

꼭 기계의 힘을 빌리는 영역에만 쪼개짐이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투수가 던지는 공의 종류, 이른바 구종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직구와 극히 제한적인 변화구 몇 종이 다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구속과 구위에 따라서, 또 좌완투수냐 우완투수냐에 따라서 엄청난 조합이 만들어집니다. 심지어 느린 화면으로 리플레이 장면을 보는 중계진조차 명확하게 구종을 분류해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있으니까요, 비약일지 모르지만 이 쪼개짐이 만들어낸 조합이 야구의 재미를 훨씬 높여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07 . 

이렇듯 뭔가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까지 고민하는 노력은 '트렌드를 이해하는 영역'에서도 유효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트렌드를 예측할 때는 그 트렌드에 묻어나는 몇 가지 현상들을 가지고 유추하거나 가장 큰 요인 하나를 끄집어 부각시키기 급급하지만 실제로 트렌드란 마치 '화학식'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즉, A라는 원소가 B와 결합했을 때는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C와 결합하면 요동치기 시작하고 거기에 D가 붙으면 폭발력을 가지는 것과 유사한 논리죠. 그래서 겉보기에 대충 비슷한 화학식을 가지고 트렌드에 한번 접목시켜보려 했다가 헛발질을 하는 케이스가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08 . 

이른바 '본질'이라는 것도, 그 본질을 찾기 위한 '딥 다이브'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서 그걸 본질이라 규정지어 버리지만 사실 본질이야말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그 마지막 지점을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해 무엇으로 발전시킬지를 고민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딥 다이브 역시 늘 그 '바닥의 끝'이 어디인지 저마다의 해석이 달라 논란을 낳지만 가장 작은 단위까지 들여다봤다라고 이해하면 서로의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분야임이 틀림없죠. 

이처럼 쪼개짐이 주는 교훈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고 동시에 치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09 . 

긴 얘기들을 거쳐 돌아왔지만 저는 핵개인의 시대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존재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가족, 친구, 회사 등의 집단에 묻어가며 그들의 색깔을 빌리기도 하고 그들의 후광을 얻기도 했다면 이제는 모두가 원자의 단위로 존재하는 시대가 된 거죠. 그 속에서는 '나'라는 사람 외에 '나'를 증명할 것들은 거의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매력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주 흔한 원자가 되어 다른 무엇과 결합하는 데 있어 선택조차 못 받게 될 수도 있고요. 


10 .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두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역사상 진화와 발전에 소극적인 세대들은 늘 앞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의 것들에서 더 발전하면 마치 무슨 큰일이 터질 것처럼 느끼는 거죠.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뭔가를 낙관하거나 부정하기 전에 저는 일단 '쪼개서 이해하는'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완성된 모습으로의 상상도 좋지만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의 진화에도 관심을 두어야 트렌드든, 패러다임이든, 새로운 세대든, 신인류든 그 모든 시대가 예측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이 핵개인의 시대가 무섭지만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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