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Feb 21. 2024

나 혼자 긍정적인 건 큰 의미가 없으니까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77

01 . 

여느 때처럼 서점을 기웃거리던 주말 뜬금없는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몇 권의 책이 검색될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한 거죠. 도서 검색대에 있는 PC로 검색하니 56권의 책이 나왔고, 인터넷 서점으로 연결해 구매할 수 있는 도서는 무려 116권이 발견되었습니다. 심지어 제목에 직접적으로 '자존감'이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연관도가 높은 책을 분류해 보니 국내 도서만 600여 권에 달하더군요. 실로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02 . 

갑자기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을 하게 된 건 친한 친구의 푸념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앓는 소리를 잘 하지 않는 무덤덤한 성격인데 웬일로 제게 고민 하나를 털어놓았거든요.

"요즘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걸 마치 자기 자존감 지키는 걸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 누가봐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있는데도 '오늘 하루 나를 아끼며 잘 살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지. 세상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게 본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아닐 텐데 말야."


03 . 

그리고는 개인적인 이야기 몇 가지를 풀어놓는데 제가 들으면서도 친구의 이야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고 보더라도 친구가 상황을 비약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인의 한풀이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람들이 올바른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지를 더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죠.


04 . 

흔히 자존감을 self-esteem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이야 대략 의역으로 퉁치는(?) 분위기지만 사실 10여 년 전만 해도 self-esteem과 꼭 맞는 단어를 한국 문화에서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선 자존감이라고 했다가 어디선 자부심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자긍심, 자기존중, 자기애 등으로 표현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산만한 역사를 거쳐온 나름 불우한 단어 중 하나가 self-esteem인 셈입니다.


05 . 

self-esteem에서 esteem의 어원은 우리가 잘 아는 estimate와 어근을 같이합니다. 라틴어인 aestimatus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무엇인가를 뜯어서 살펴보고, 가치를 결정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였죠. 그러니 self-esteem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자신을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가치를 내려보라는 의미에 근간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원에 갇혀서 단어의 뜻풀이를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 단어의 뿌리를 이해하고 나면 그 뜻에 접근하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06 . 

여기서 중요한 점은 self-esteem이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인이 어떤 행동을 했든 간에 막무가내로 스스로를 우쭈쭈(?) 해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과의 연결고리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인 거죠. 그러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존감이란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주관적인 기준을 통해 나를 평가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존감이란 단어 역시 그 뉘앙스가 확연히 달라지죠.


07 . 

개인적인 취향일지 모르지만 저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은 오히려 신뢰하기가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모두가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누구 하나라도 긍정적인 시그널을 주는 건 너무도 값진 일이지만, 그 역시도 사실 맥락이라는 것 위에서 작동해야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는 법이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논리에 갇혀 긍정의 회로부터 가동시키는 사람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08 . 

책을 좋아하는 덕분에 자존감과 관련한 책도 꽤 여러 권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중엔 저에게 신선하고 좋은 관점을 안겨준 책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자존감에 대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책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자존감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 무작정 타인과 또 세상과 단절하는 것부터 들이밀고 보는 케이스가 많았죠. 

그러다 보니 모든 메시지의 끝은 '네가 맞아', '네가 좋으면 좋은 거고, 네가 싫으면 싫은 거야', '남의 말 귀담아 듣지마', '너를 위해 살아',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말고 니 기분부터 챙기렴'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씁쓸하기 짝이 없었죠.


09 . 

벌써 6년도 더 된 일인데요, 당시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는 그룹 면접에 면접관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면접 참가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성격이 쾌활하거나 외향적인 스타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신중함을 우선으로 하다 보면 부정적인 스탠스에 서있을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늘 지향점은 긍정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때문에 저 스스로 긍정적인 판단이 들 때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고 믿게 됩니다."


10 . 

이 말을 듣자마자 '저 지원자님은 참 좋은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주위 상황이 어찌 흘러가건 저는 긍정적입니다'라는 에너지를 무리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닌,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름 냉정하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어가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그 모든 게 타인과 나라는 큰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게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기적인 무한 긍정주의만 설파할 게 아니라, 자존감의 탈을 쓴 그릇된 자기애만 쫓을 게 아니라 진짜 self-estimate를 통한 self-esteem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아마 그렇게 정립된 자존감은 그 어떤 공격으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죠.

매거진의 이전글 치고 달려야 하는 순간 vs 놓치지 말아야 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