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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r 28. 2024

괜찮아. 새로운 이야기로 '덮어쓰면' 되니까.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6

01 . 

열흘 전쯤 '취소선이 주는 의미'라는 글을 써서 업로드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글을 보시고선 몇몇 분께서 DM을 보내주셨습니다. 그중엔 이런 이야기도 있었죠. (본인 동의하에 메시지 내용을 전해드립니다.)

"원래의 의도와는 달라졌어도 취소한 것 역시 내 인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제 취소선을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보게 되더라도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02 . 

글을 잘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가끔 이렇게 가슴 뭉클한 피드백을 전해주실 때면 저 역시도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해질 때가 있습니다.

더불어 이처럼 특정한 주제로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저도 한동안은 그런 마음가짐을 좀 더 챙기면서 살게 되기도 하고, 또 비슷한 이야깃거리나 생각이 떠오르면 연결 지어 고민해 보기도 하죠. 글이 주는 선순환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순간입니다. 


03 . 

그러다 우연히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방송인 정선희 님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참 좋아하는 라디오 DJ 중 한 명이라 다시 방송계에 복귀한 걸 늘 환영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날은 모처럼 본인이 겪은 인생의 아픔들을 솔직하고 꽤 덤덤하게 풀어놓으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따라 저 역시도 정선희 님의 말들을 더듬어가고 있었는데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04 . 

"포털 사이트에 날 검색하면 내 우는 사진들이 도배돼서 너무 싫었어. 당시 8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그랬거든. 그래서 포털 측에 전화해서 지울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직원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울컥해서 '내 사진인데 못 지우면 어떡하냐'했더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어. 

'새로운 사진을 업로드하시면 됩니다.'

그 대답을 듣고서 정말 뒤통수에서 종소리가 나는 거야. 그래. 나란 사람을 제대로 보여주는 시간들을 업로드해 나가다 보면 어차피 지난 일은 내 인생에서 어느 정도 퍼센티지 밖에 차지하지 않겠구나 싶은 거지."


05 . 

저도 이 문장을 듣고는 정말 뒤통수에서 종소리가 나는 것 같더라고요. 그동안 다른 누군가의 슬픔이나 아픔을 위로할 때 썼던 말들을 돌이켜보면 '다 지나갈 거다', '이제 그만 잊어라', '그냥 무시하고 신경 쓰지 마라', '그쪽은 쳐다도 보지 말고 새로운 인생 살아라'와 같은 말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어찌 되었건 나의 인생이고 지울 수도 없는 기록이라면, 계속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서 기존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밀어내라'는 메시지는 처음 들어본 것이죠. 그리고 포털 직원분의 담담한 설명을 화내거나 비꼬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받아들인 정선희 님도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06 . 

그러게요. 얼마 전 글로 남긴 '취소선'의 개념이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수정한 기록을 남기고 복기하는 거라면, 정선희 님이 들려준 메시지는 '내가 원치 않는 부분의 기억들은 부정하거나 외면할 게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성해서 그 포션을 줄여가면 된다'에 가까울 겁니다. 둘 다 과거를 회고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다루고 있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는 또 분명한 온도차가 있죠.


07 . 

결이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주말이면 주중에 생각해놓은 글감들로 한두 편씩 글을 써보곤 하는데요, 몇 해 전쯤엔 글 한편을 쓰고 나면 오히려 글에 대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운치 못한 기분이 이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글을 쓰지도 않으면서 괜히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해 트집을 잡았던 건 아닐까도 싶고요.


08 . 

그러다 잡지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선배에게 짧게 고민을 공유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얘길 해주더군요.

"야. 그럴 때 더 열심히 써야 된다. 나도 글밥을 먹다 보니 알게 된 건데, 글이라는게 내 맘에 꼭 들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그건 퇴고를 천만번 해도 안 나와. 대신 그 에너지를 다음 글에 실어야 돼. 저번 글은 이런 이유로 아쉬웠으니까 이번 글에서 만회하자는 생각을 매번 해야 한다니까. 거 뭐냐 그거. 컨베이어 벨트! 그 컨베이어 벨트 작업처럼 내가 놓친 거 신경 쓰고 계속 쫓아가면 안 돼. 다가오는 거라도 제대로 만들어야지. 아니면 그냥 계속 망하는겨."


09 . 

어쩌면 '덮어둔다'와 '덮어쓴다'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쳐다보기 싫은 과거를 우선 외면하고 보는 게 '덮어두는'거라면 일단 새로 다가오는 기회들로 나만의 검색 결과를 끊임없이 수정해가는 게 '덮어쓰는' 개념은 아닐까 싶거든요. 그렇게 잘 덮어쓰는 인생을 살다 보면 정선희 님 말처럼 과거의 힘든 기억도 내 인생에 아주 조그만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일부'가 되어있을지 모르니까요.


10 . 

글로 풀어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드네요. 혹시 누군가 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원치 않는 정보들만으로 나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건 참 슬픈 일일 것도 같다는 생각이요.

대신 '와. 제가 당신에게 관심이 많아서 당신 검색 결과의 끝까지 가다 보니 과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정말 상상이 안 가더라고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정도로도 우린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타인이 나에 대해 던지는 쿼리를 막을 수 없더라도, 그 쿼리에 응하는 결과를 어떻게 만들지는 내 두 손에 달려있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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