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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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퀴즈⟫에 통역사 두 분께서 출연하신 편을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른 사람의 직업 세계를 엿보는 걸 단순히 '재밌다'라고 표현하는 게 마음 한편으로는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몰랐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신선함과 그 직업에서 더 특별하게 부각되는 직업정신을 보고 있으면 일종의 존경심이 생기기도 하죠. (그래서 사실 저는 유퀴즈에 유명인들이 나올 때보다.. 그 앞에 직업인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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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분들께서 통역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주시는 와중에 제 귀엔 이런 말이 확 다가와 꽂혔습니다.
"AI의 출현으로 사라질 직업 1위에 늘 통역사가 꼽힙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통역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실 경청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발화하는 언어 실력에 주목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하겠다', '당신의 의도를 내가 어떻게든 파악하겠다'는게 통역사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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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야 잘 말할 수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이야기지만 사실 이를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다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게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경청이라는 건 애티튜드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생산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 상대방의 의도를 끝까지 파악해 보고자 하는 그 마음이 때론 우리를 정답에 더 가깝게 데려다주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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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 군상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이 경청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적어도.. 들은 체도 안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일단 좀 제외하고 생각하면) 하나는 정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상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흡수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가진 정답을 쥐고서 그 정답에 필요한 이야기만 걸려들기를 바라는 유형입니다. 그리고 사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게 슬프고도 위험한 포인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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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도 회의를 하건 아님 누군가의 의견을 가볍게 듣건 간에 그 대화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고 저 나름 대로의 생각이 고개를 스멀스멀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상대의 주장에 살짝 빈틈이 보이거나 제 의견과 다른 방향을 짚고 있다고 생각되면 이런 욕망은 더 커지게 되죠.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한때는 그런 대화는 빨리 털어내고 내 나름대로 잘 정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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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대화가 좋은 방향으로 흐르거나 생산적인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제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탓에 상대방 역시 같은 얘기를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혼자 잘난체하다가 모두를 잘못된 곳으로 끌고 가는 형국을 만든 거죠. (그치만.. 뭐 그렇다고 상대방의 대화를 팍팍 잘라먹으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냅다 쏟아내는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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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는 저도 좀 생각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통역사님이 말씀하신 '경청'이라는 걸 저 또한 다시 한 생각해 본 거죠. 그리고 그 고민의 결론은 '그냥 들어준다'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는 능동의 자세였습니다. 상대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포인트에서는 나도 같이 긴장하고, 또 상대가 살짝 어려워하는 지점에서는 더 나은 단어가 없는지 같이 발을 맞춰가며 듣는 방식이었죠. 가끔은 스스로 답답해서 '에이 아니다'하는 사람에게까지 '아뇨 아뇨 저 듣고 있어요. 더 설명해 주셔도 괜찮아요'라며 대화의 속도를 늦추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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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진짜 생산적인 대화가 진행되는 경험을 훨씬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솔직히 모든 대화가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전 같으면 시작하는 문장 몇 개 들어보고서 빠른 판단을 내리려 했던 그 오만함의 대화 역시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지에 따라 내 손에 들려지는 결과물 또한 달라지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제게 있어 경청은 말 그대로 '상대에게 귀와 마음을 모두 기울여 최대한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인 것이기도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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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습관은 꽤 의외의 순간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클럽장이자 모더레이터로 참여한지 2년이 훌쩍 넘었는데요, 아주 가끔씩 멤버들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도영님. 오늘 제가 말하다가 말려서(?) 버벅였는데도 끝까지 이야기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잘 끌어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고 말이죠. 근데 놀랍고도 민망한 건.. 제가 딱히 뭔가를 한 건 없다는 겁니다. 대신 정말 잘 들으려 노력했고, 그 멤버분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게 뭘까를 함께 고민하며 발을 맞춰준 것 밖에는 없거든요. 그런데 그런 행위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게 참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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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그저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라든가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게 예의다'같은 시각을 넘어서 '많이 듣고, 열심히 듣고, 귀와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게 나에게도 이득이다'는 생각으로 경청의 가치를 느껴보는 것도 전 참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손에 정답을 꽉 쥐고서 '응응. 얼른 얘기 끝내라. 내가 제대로 다시 얘기해 줄게'라는 마인드가 스스로에겐 퍽 대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애티튜드로 보나 생산성으로 보나 큰 도움이 안 되는 것도 같거든요. 그러니 남의 말 끊기 전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일단 듣자. 그것도 제대로. 열심히!'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