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May 20. 2024

'굳이?'라는 말을 즐겨쓰는 당신에게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95

01 . 

"나는 말야. 요즘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 상대방이 '굳이?'라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힘이 빠지더라. 뭔가 아이디어나 의견을 내도 '굳이?', 다른 사람을 좀 설득해 보려고 해도 '굳이?'라고 이야기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싶더라고. 다른 유행어들은 이렇게까지 밉진 않았는데 '굳이'는 진짜 말 그대로 굳이 탄생했어야 하는 유행어인가 싶다니까."


02 . 

친한 친구의 말에 저도 꽤 많은 부분이 동의가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다른 동료들 역시 '굳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은 뭔가 무기력해서 싫다는 얘길 했었고 심지어 남자친구가 자꾸 본인 말에 '굳이?'라고 얘기해서 지하철역 한가운데서 대판 싸웠었다는 후배도 있었죠. 그래서 저도 이 단어를 사용할 땐 다른 단어에 비해 비교적 의식을 많이 하며 쓰는 편이기도 합니다. 이미 피로감이 쌓여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또 한 번 불씨를 당길 필요는 없으니까요. 


03 . 

그런데 세대와 성별과 배경과 상황을 막론하고 요즘 우리에겐 다양한 방향으로 이 '굳이?'라는 습성이 발현되는 것 같아요. 특히 며칠 전에는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현실에 뭔가 직접 발을 담그는 걸 꺼려 하는 세대가 되었다. 시뮬레이션으로 꽤 많은 것들이 가능하니까'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아, 저게 저렇게 연결이 되나?' 싶은 생각까지도 들었죠. 


04 . 

이미 여러 매체들에서 언급한 얘기지만 지금의 시대는 내가 나서서 꼭 뭔가를 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이 간접 체험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즉 타인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필요한 욕구를 채우고 살 수 있는 거죠. 

유튜브에 올라온 여행 영상 보는 게 취미라면서도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많고, 각종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자기 상황에 빙의된 듯 울며 웃는 사람들 역시 굳이(!) 연애는 하지 않는 심리와 비슷합니다. 이른바 타인의 현실(reality)을 가상체험(simulation) 해보며 살아가는 게 더 편한 '리뮬레이션' 세대가 등장한 것은 아닐까 싶은 대목이죠. (그냥 제가 만들어 본 용어입니다... 너무 딥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05 . 

이런 리뮬레이션 세대는 두 가지 큰 특징을 보입니다. 

하나는 (당연하게도) 직접적인 것보다 간접적인 것들을 선호한다는 겁니다.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든 아니면 어떤 감정에 휘말리든 간에 내가 그것을 다이렉트로 마주하기 보다 뭔가 하나 쿠션을 끼고 안전하게 받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을 수도 있는 것이죠. 특히 리스크가 큰 대상 앞에선 이런 성향이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거나, 시간적인 소모가 크거나, 투여한 리소스만큼 돌아오는 리턴이 불확실하다면 직접 손을 뻗는 게 망설여질 테니까요. 


06 .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경험만을 취사선택하고 싶은 심리입니다. 과거에는 뭔가를 선택하면 뭔가를 반납해야 한다는 기조가 강했습니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슬픔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고, 운동을 한다는 건 육체적으로 힘든 대신 뿌듯함이라는 보상과 건강이라는 결과물을 얻는 행위인 것처럼요. 

하지만 리뮬레이션 세대에게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다 거치기 보다 본인이 원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것만을 가려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때문에 모든 걸 온전하게 누리는 대신 일단 세세하게 분절하거나 빠르게 정리해서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게 아주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것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숏폼이라는 형식도 그에 따른 부산물일 수도 있고 말이죠.


07 . 

기성세대가 본다면 '아니 그런 행동은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꼭 젊은 세대의 특징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앞서 설명한 '굳이?'라는 말은 나이 든 분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고 콘텐츠별 취사선택은 연배가 지긋한 사용자들에게도 발견되는 패턴이니까요. 리뮬레이션이라는 것도 특정 세대에 머무는 개념이라기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08 . 

다만 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일지언정 그래도 이런 현상들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시뮬레이션이 고도로 발달하고 풍부하게 제공된다고 해도 반드시 리얼리티를 경험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음을 인정하자는 얘기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들, 우리 주변의 것들을 더 소중하게 대하게 하는 생각들은 간접 체험과 취사선택만으로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 같거든요. 어찌 되었건 삶의 진한 엑기스 같은 그런 순간들은 우리의 얄팍한 판단으로 빠르게 예측되기는 힘들다는 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게 살아본 저의 작은 생각입니다. 


09 . 

돌고 돌아 다시 '굳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굳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단단한 마음으로 굳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굳이와 뜻을 같이 하는 '구태여'라는 의미 역시 '일부러 애써'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정리하자면 '굳이?'라는 의미는 결국 '내가 굳은 마음을 먹고 일부러 애써 할 필요가 있을까?'에 가깝습니다. '굳이'를 영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죠. 


10 .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굳이 해야 하나?'라는 질문 대신 '굳이 해야 하는 것들'이란 답으로 접근한다면 시각은 또 좀 달라지거든요. 우리 삶에서 '굳은 마음을 가지고 일부러 애써 해볼 만한 것들'을 추려본다면 그건 말 그대로 '굳이(!)'해야 하는 중요한 것들에 해당함이 분명할 겁니다. 그리고 그건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내 두 손으로 직접 만지고 싶은 것들이겠죠. 저는 이게 우리의 삶을 시뮬레이션보다 리얼리티에 더 가까이 데려다준다고 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굳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쓰기보다는 긍정적인 용도로 한 번 사용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럼 우리들 인생에도 일부러 애써서 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속속 발견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고의 복수는 '그 사람의 언어를 쓰지 않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