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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08. 2024

최고의 복수는 '그 사람의 언어를 쓰지 않는 것'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94

01 . 

'세상에 내 맘에 드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모두를 품으려고 하는 것도 주제넘은 짓이다...', '가뜩이나 힘든 세상 저 사람에 때문에 더 힘들어하지 말자...'란 말을 수십 번 되뇌어도 늘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단순히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수준을 벗어나 누구에게나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면 상황은 보다 심각해지는 법이죠. 


02 . 

얼마 전 한참하고도 또 한참 동생뻘쯤 되는 지인분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딱 봐도 하루를 참 힘들게 보냈겠구나 싶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와중에 대뜸 이런 질문을 저에게 던지더군요.

'도영님은 주위에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나요?'

무슨 고된 일이 있었냐는 질문을 되돌려주기엔 괜히 짐 하나를 더 얹어주는 것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도 같은 질문이었죠.  

그러게요. 저는 저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03 . 

맘 같아서야 속으로 열 번도 더 윽박지르고 싶을 만큼 얄밉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지만 또 그 사람들이 주는 스트레스를 떠안고 살기엔 제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죠. 그래서 매번 모기를 쫓으려 허공에 쉐도우 복싱을 하듯 '근데 그 사람 진짜 너무 한 거 같아... 아니야 괜히 이런 생각에 매몰되지 말자. 그럴 시간에 좋은 생각 한 번 더해야지'라는 혼잣말을 수십 번 반복하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04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쁜 생각을 털어내는 것만큼이나 내가 받은 나쁜 영향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도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걸 몰라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실제로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는 대표적인 행동이기도 하죠. 나 혼자만 이 기분을 떠안긴 억울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표현하자니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망설여지는 순간이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답답한 사람인 것 같은 생각마저 드니까요. 


05 .

대신 저는 분명하게 실천하는 한 가지가 있긴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사용하는 묘하디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아주 얄팍한 방법으로 타인의 감정을 갉아먹는 그 단어와 표현들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 거죠. 

그게 무슨 대응법이냐고 반론을 제기할 분도 있겠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주 현실적이고 우아한(?) 복수이기도 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나쁜 사람이 주는 나쁜 영향을 모조리 튕겨내는 일종의 방수복을 입는 것과도 같은 효과라 할 수 있죠. 


06 . 

사실 우리 주위에서 천벌을 받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을 만나는 건 극히 드문 일입니다. 좋은 사람만큼이나 나쁜 사람도 많은 게 슬픈 현실이지만 적어도 우리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살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알고싶다'에 등장할 법한 인물들은 없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더라도 늘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나쁜 언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욕설을 하거나 험악한 말들을 내뱉는 게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수많은 불쾌감을 안겨주는 표현들을 큰 죄책감 없이 하는 사람들인 거죠. 


07 . 

당연히 저도 그런 사람을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현재진행형이려나요... 암튼)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던 그분은 팀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역량을 발휘하는 순간에도 '끼를 제대로 부렸다'고 표현하거나, 디테일까지 살뜰히 챙기는 동료들을 보고도 '편집증 환자 수준으로 이잡듯이 뒤졌다'고 비유하곤 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날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 나중에는 서로 모여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수준에게까지 이르렀죠. 그 사람이 쓰는 나쁜 용어들로 사전 하나를 만들라고 해도 딱히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처음엔 '꼭 저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제가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달게 삼켜보려 했는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걸 보고서 이건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 사람의 언어 때문에  그 사람과 대화하는 우리 모두가 피해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08 . 

더 경악스러웠던 건 본인도 불쾌하게 들었으면서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언어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후배들은 물론이고 새로 협업하는 동료들에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나쁜 언어들을 전파하고 다녔고, 죄책감은커녕 본인은 쿨한 업계 용어(?)를 쓰는 것 즈음으로 생각하고 말더군요. 나쁜 영향이 대물림되는 전형적인 순간을 목도하고 만 것이죠. 


09 . 

이제는 저도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만큼 나쁜 언어들과 마주할 때면 최대한 정중하게 그런 말을 쓰지 말 것을 권유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대부분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지적하는 사람을 나이브 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많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진 않습니다. 나쁜 언어로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악질에 가까우니까요, 과하다 싶을 때는 현장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을 감안하고라도 그 자리에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옳은 행동임은 분명합니다. 


10 . 

그럼에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가 그 사람의 언어를 함께 공용어(?)로 사용하지 않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몸담은 조직에서 아무리 흔하게 쓰는 표현이더라도, (백 번 양보해서) 상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요만큼도 없이 사용한 장난에 가까운 말들이더라도 그 사람의 언어를 함께 쓰는 순간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거든요. 그러니 친하다고, 익숙하다고, 상대가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해서 찝찝한 말들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그건 나쁜 사람에게서 받은 나쁜 영향을 좋은 사람들에게 묻히고 다니는 진정으로 어리석은 짓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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