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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06. 2024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이끌어내는 '컨버스 효과'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93

01 . 

책을 통해서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저는 컨버스를 정말 즐겨 신습니다. 10번을 외출한다고 치면 그중 9번은 컨버스를 신고 나갈 정도니까요. 어려서부터 신었으니 족히 20년 가까운 세월이 되었고 지금도 신발장에는 다양한 색깔의 컨버스가 있으며 심지어 그중 가장 즐겨신는 검정색 척70 하이 모델은 똑같은 신발이 여러 켤레 자리하고 있죠. 


02 . 

뜬금없이 신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건 이 컨버스가 제게 준 작지 않은 교훈(?)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소 물건을 깔끔하게 쓰는 걸 좋아하는 터라 신발도 비교적 깨끗하게 신는 편인데요, 그런 저를 보고 사람들은 늘 새것 같은 운동화를 신기하게 여기곤 합니다. 비싼 명품도 아니고 뭔가 큰 사연이 담겨있는 물건도 아닌 데다 필연적으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신발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게 조금은 희한해 보이기도 할 테니까요. 


03 . 

하지만 재미있는 건 늘 의외의 포인트에서 발생합니다. 어쩌다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다 보면 친구나 동료들이 실수로 제 발을 밟는 경우가 있거든요. 혹은 도로에 고인 빗물을 튀기거나 실수로 커피나 음료를 떨어뜨려 묻히기도 하죠. 생활하며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흔한 장면이며 사고 축에도 들지 않는 평범한 해프닝인데 이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반응이 너무 놀랍습니다.


04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도영님ㅠㅠㅠㅠ'을 시작으로 '와 넌 이제 도영님한테 D졌다', '나였으면 지금이라도 새 신발 사다 준다' 등 제 컨버스에 실수를 저지른 본인이나 동료를 엄청나게 나무라기 시작하는 거죠. 물론 그중엔 농담과 장난이 섞여있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다면 이 정도 리액션이 아니었을 일을 유독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미안해하거나, 난처해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05 . 

그렇다고 제가 뭔가 컨버스에 엄청난 집착을 떠는 건 아닙니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그런 장면에서 화를 내거나 예민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요........(진짭니다...) 그저 더러워진 건 다시 닦으면 되고 집에도 같은 신발이 여러 켤레 있는데 뭐 그게 대수겠습니까. 심지어 다른 신발에 비해 무척 저렴한 컨버스인 만큼 여차하면 새로 한 켤레 더 사면 그만인 것을 말이죠. 그런데도 괜찮다는 저를 마다하고 먼저 나서서 제 신발의 운명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한편으로 저는 너무 신기할 따름입니다. 


06 . 

그런데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자 의외로 묘한 교훈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티를 좀 내도 되겠구나'하는 것이었죠. 

사실 사람들이 제 컨버스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과한 걱정을 해주는 것 역시 평소 제가 컨버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설사 제가 괜찮다며 몇 번을 타일러도 '내가 저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거죠. 한때는 '신발을 좀 막 신어서 그런 선입견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 역시 다른 사람들이 유독 아끼는 뭔가가 있으면 조심하게 되는 건 당연하니까 굳이 또 그럴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도 들더군요. 


07 . 

그리고 거기에 이런 관점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제가 입으로 뭔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것 보다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며 내가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기는지 학습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 지키고 케어 받고 싶은 뭔가가 있다면 우선 나부터가 그 대상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게 어떤 물건일 수도 있고, 어떤 감정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는 거고요. 


08 . 

그래서 저는 간혹 '누군가가 저를 함부로 대해서 속상해요'라고 말하면 이 컨버스 일화를 들려줍니다. 그리고는 제 나름대로 '컨버스 효과'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정의해 보기도 하죠. 

제게 컨버스 효과란 '내가 그 대상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예의와 주의와 존중을 이끌어내는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누군가와 얼굴 붉히며 강압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호들갑에 가까운 유별난 모습으로 방어막을 치지 않아도 꽤 효율적으로 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인 셈이죠. 


09 .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관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럼 나한테는 어떤 게 컨버스 같은 대상일까?'라고 말이죠. 그저 '이거 좋아', '저거 싫어'라며 호불호의 영역으로만 표현했던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상대로부터 진짜 예의와 주의와 존중을 받고 싶을 정도의 소중한 것이 있나 하고 찾아보게 되는 겁니다. 뭐 사실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의외로 데미지가 큰 영역이 있다면 그걸 소중히 대해볼 수도 있는 거죠. 사람마다 각자가 느끼는 상처의 감도가 다 다른 거니까요. 


10 . 

때문에 저 역시 요즘엔 누군가가 '도영님은 왜 이렇게 신발이 깨끗해요?'라고 물으면 예전처럼 '아... 제가 그냥 물건을 좀 깨끗하게 쓰는 편이라...', '그냥 이렇게 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지고...' 처럼 강박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은 쭈뼛쭈뼛한 멘트들 대신 비교적 당당하게 대답을 하곤 합니다.

'제가 컨버스를 좋아하다 보니 그냥 늘 깨끗하게 관리하고 싶더라고요'라고 말이죠. 

웃는 사람도 있고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의 대답이 곧 컨버스 효과의 시작이라는 걸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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