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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pr 28. 2024

하루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선 (자존감 이야기 ③)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92

01 .

자존감을 주제로 한 마지막 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흔히 쓰는 말이지만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의외로 역설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말이 있고, 이율배반적인 말이 있으며, 우리의 관점을 묘하게 바꿔 놓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들과 만날 때면 '내가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고 수십 년을 써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02 .

제겐 '기대에 어긋나다'라는 말이 그랬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지만 사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안목을 한껏 높여 놓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자존감과도 연계되어 있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거든요.

먼저 '기대'란 기다릴 기(期) 자에 기다릴 대(待) 자가 결합된 말로, 사전에서는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의미겠지'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꽤나 양심 없는(?) 말이기도 하죠. 어떤 노력이나 조건이 붙지 않은 채로 그저 '원하는 것'을 '기다리는 모양새'니까요.


03 .

아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달콤한 희망 하나쯤 품고 사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기대가 어긋나다는 말은 이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꿈'이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을 어긋나다라고 표현해버리면 마치 일어났었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늬앙스를 주게 되니까요, 막연하고 추상적인 무엇인가를 바라다가 그게 내 맘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이른바 손해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04 .

그러니 '기대에 어긋나다'는 말을 오용하거나 남용하기 시작하면 '환상'과 '강박'을 동시에 일으킬 확률이 높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마지노선도 없는 채로 더더 추상적인 환상을 가지게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곧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아주 아깝게 빗나간 것 같은 강박을 안겨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죠. 환상을 더 크게 쫓거나 강박에 더 깊게 매몰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05 .

뭐 조금 심각하게 얘기한 것도 같으니 살짝 가벼운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예전에 한 강의를 듣는 와중에 정신의학과 전문의이자 심리학과의 교수로 겸직 중인 스피커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거야!'라는 말은 사실 큰 도움이 안 됩니다.

대신 '혹시 오늘 기분이 더러워지는 순간이 오면 붕어빵이나 하나 사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백 배천 배 나아요. 막연한 기대로 하루를 출발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의 하루를 지키는 겁니다."


06 .

저는 이 말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하자는 식의 발언에는 크게 공감할 수 없었던 저였는데 최소한의 행복을 지키자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니 실제로 제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눈앞에 쏙쏙 나타나는 느낌이었거든요. 흡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낙제점은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았달까요.


07 .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꿈은 커야 하고, 이상은 높아야 하고, 행복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당연히 동감합니다. 그 말의 의미도 대부분 이해하고요.

하지만 앞선 말들에는 한계가 없는 만큼 그 크기나 높이를 체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구체적인 질량의 꿈, 가늠할 수 있는 목표와 이상, D-day가 있는 행복은 잘 그려지지 않더군요. 말은 멋있지만 제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08 .

대신 어떤 상황이 와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행복, 최소한의 자존감이 있다고 생각하자 내 삶이 더 소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손에 꼭 들려있어야 할 행복의 조건들이 체감되기 시작하자 하루를 어떻게 세팅해야 하는지, 내 에너지를 어떻게 나눠써야 하는지,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들이 연이어 술술 풀리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러니 '힘들 땐 붕어빵(?)'이론은 그 어떤 현란한 수식어나 명언 대열에 오른 문장들보다도 제 자존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09 .

글 초반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많은 말들을 큰 고민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걱정 붙들어 매!'라는 말도 그렇더군요. 사실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의미는 '니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을 떨쳐버리라'는 것도, '모든 것이 잘 될 거니 더 이상 그 문제로 씨름하지 말라'는 뜻도 아닐 겁니다. 오히려 '걱정이 너를 망치지 않도록 너의 관리 안에 두렴'이라는 뜻에 훨씬 가깝다는 게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10 .

그러니 자존감이라는 것도 무조건 높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루기보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최소한의 방어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챙기기 시작해 보세요. 그럼 여러분의 하루도 환상과 강박, 기대와 실망 속에 빠져있는 대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좋은 의미로 '관리되기' 시작할 테니 말입니다. 저는 그게 하루치 자존감 섭취하는 꽤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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