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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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 '설득'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이어가 보겠습니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합니다. 요즘이야 AI라는 개념이 산업과 기술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든 그 중요성이 커져가고 있지만 사실 우리 인류에게 있어 인공지능의 발달에 큰 도움을 준 대상 중 IBM이 개발한 왓슨(Watson)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기원을 되짚자면 1950년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거든요. 심지어 그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거대언어모델의 원형이 되는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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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왓슨의 인공지능 능력을 끌어올리는 실험 도구로는 인류에게 사랑받는 게임 중 하나인 '체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왓슨의 조상벌쯤 되는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Deep Blue)가 체스 그랜드 마스터 게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를 꺾은 이후부터는 사실상 인류는 컴퓨터와의 체스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IBM의 개발자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인공지능이 인간과 호흡을 맞추며 체스를 둘 수 있을까를 연구하기 시작했죠. 발전의 속도를 조절하는 진화의 역설이 일어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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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IBM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한 프로그래머이자 훗날 월드 퀴즈 챔피언으로 이름을 알리는 켄 제닝스(Ken Jennings)라는 인물이 그 답을 인공지능에게 물어보기로 결정합니다. 왓슨에게 '어떻게 하면 너와 조금이라도 더 길게 체스를 둘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죠. 그런데 이때 인공지능 역사에 꽤 굵직한 흔적을 남길 만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럼 우리 먼저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면 어때요? 당신이 나를 이기려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지려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훨씬 예측하기 어려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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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닝스는 그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보다 작정하고 지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상대가 나를 더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을 사는 새로운 지혜를 얻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왓슨의 대답뿐 아니라 제닝스의 대답을 들으며 또 한 번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말은 그냥 지는 걸 합리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변명이라고 생각해왔던 저 자신을 꽤 부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열어놓는 것이 결국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관점을 전해줬다고 보는 게 적절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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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설명으로 돌고 돌아왔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그건 일단 지는 게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설득해 볼게'라고 호기롭게 나서는 사람 중에 '저 사람 하나 굴복시키는 게 뭐가 어렵다고'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설득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 옛날 인공지능조차 조금 더 길게 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지는 게임을 제안했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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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저는 '무조건 져줘라', '일단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줘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 첫 번째로 든 생각이 '어떻게 해야 기준을 가지고 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를 잘 지키면서도 남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였으니 말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누군가를 계속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면 어떤 이는 마치 자신에게 엄청난 결정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적어도 타인을 이해하고 설득하기 위한 마지노선은 꼭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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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마지노선으로 저는 '내가 용납하지 못하는 것들부터 미리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나와 설득의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을 익혀야 하는지 알려주는 거죠.
두 번째로는 '숨 고르기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의견에 반하는 주장을 했을 때 곧바로 대응하거나 성급히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해보겠다고 먼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땐 그냥 시간을 갖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내가 어떤 쪽으로 고민을 할 예정인지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게 좋습니다. 그럼 상대도 그 시간 동안 내가 어떤 고민을 할지 예측해 볼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서 타인도 나를 이해하게 된다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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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해해 보기로 작정한 사람임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당신을 이겨먹으려 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거죠. 작은 행동 하나하나 받아치며 까칠하게 구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 우리 역시 더 예의를 갖추게 되는 것처럼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보는 겁니다. 저는 이게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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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제닝스가 몇 가지 기준을 적용해 이른바 '지는 체스'를 프로그래밍한 다음 왓슨과 대결을 했을 때도 결국 번번이 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제닝스는 왓슨이 이길 때마다 화면에 뜨는 문장 한 줄이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요. 본인이 왓슨의 킹을 쓰러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땐 화면에 이런 문구가 떴다고 하거든요.
'내가 당신으로 하여금 내 킹을 쓰러뜨리게 만들었으니, 내가 이겼습니다. (I made you take down my king, I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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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끊임없는 설득의 쳇바퀴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역시 가끔은 이 왓슨과 제닝스가 벌인 체스 시합처럼 현명하게 지는 게임을 한 번 시작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꼭 뭔가 하나를 쟁취해야 하는 논쟁의 영역이 아니라면, 정말 누군가를 제대로 한번 설득해 보고자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정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바탕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도 되는 거니까요, 상대가 나의 킹을 쓰러뜨리고 호탕하게 웃는 그 모습을 유도하는 짜릿함도 꽤 괜찮은 느낌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