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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30. 2024

왜? '의무감'으로 하면 안 돼?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13

01 . 

어느덧 7월 한 달도 마지막 날로 접어드는 시점입니다. 시간이 빠르다는 말은 이제 입과 귀에게 미안할 정도로 많이 듣고 또 내뱉는 말이 되었고, 그 앞에 '한 것도 없는데...'라는 말이 붙기 시작하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선물하게 됩니다. 예전에 한 번 글로 소개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저는 매 분기마다 '쿼터 다이어리'라는 회고를 하는데, 올해부터는 저희 독서모임 멤버분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돌아서니 다시 회고 시점이다'는 말이 피부로 실감될 정도로 그 텀이 정말 짧다고 느껴진 3개월이자 상반기였던 것 같습니다.


02 . 

가끔 숏츠나 릴스로 과거 무한도전의 레전드 장면들을 보곤 합니다. 지금 봐도 너무 재밌고, 웃기고, '없없무'라는 말처럼 진짜 무한도전은 밈을 위한 모든 소스를 다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우연히 숏츠 아래 플로팅 되는 사용자 댓글 자막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저게 15년 전이라는 것도 소름 끼치지만 출연자, PD, 스탭들이 매주 저렇게 최선을 다했다는 게 더 소름 끼침...'


03 . 

그 댓글을 읽자 무한도전을 연출했던 김태호 PD의 예전 인터뷰 기사 속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참 멋진 말들이라고 생각해서 메모해둔 분량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볼드 처리해서 써놓았던 걸 다시금 꺼내보게 된 거죠. 

"그 시절 우리에겐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습니다. 그게 나쁘게 작용했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쪽으로 작용한 거예요. 유재석 씨를 비롯한 출연진, 저를 비롯한 연출진 모두 토요일 저녁을 위해 매일을 사는 사람들 같았어요. 물론 각자 스트레스도 받고, 짜증도 나고, 힘도 들었겠죠.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매주 해냈어요. 재미가 있건 없건, 시청률이 잘 나오건 아니건 간에 일단 최선을 다해서 매주 해냈습니다. 무한도전의 도전은 그 도전이었어요."


04 . 

사실 저는 지금 읽어도 이 말에서 짜릿한 전율 같은 걸 느낍니다. 무한도전이 대한민국 예능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그런 위대한 프로그램을 10년 넘게 연출한 PD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는 것이 너무 반가웠기 때문이죠. '저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은 직장인이었구나', '거대한 목표나 멋진 포부가 아니라 일상적인 의무감을 꼽았다는 사실이 훨씬 인간적이다'라는 생각을 했으니 말입니다.


05 . 

사람들은 의무라는 말을 마치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억지로 해야 하는 듯한 뉘앙스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못된 왜곡은 '나는 원치 않은데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다'라는 꽤 치명적인 곡해도 담겨있죠.

하지만 의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의무란, 옳을 '의(義)' 자에 힘쓸 '무(務)'자를 써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 인간의 의지나 행위에 부과되는 구속.'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06 . 

누군가는 이 설명이 좀 무겁고 무시무시하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 의무를 부여하는 주체와 그 의무를 부여받는 대상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무'란 무엇보다 나 혹은 우리가 원해서, 필요로 해서, 그것이 옳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주는 일종의 직무며 책임이고 동시에 구속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무한도전을 연출한 김태호 PD 건 유재석 씨를 비롯한 출연자들이건 간에 그들 모두도 억지로 해야 한다가 아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계속 사랑받는 존재들로 남고 싶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해야 한다'를 추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07 .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 역시 의무감을 가지는 걸 좋아하고 일이든 일상생활에서든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많이 만드는 편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기도 하고, 어쩌면 조금은 말장난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궁극의 자유로운 상태란 내가 나에게 기분 좋은 의무감들을 부여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제가 정말 원해서, 잘하고 싶어서, 더 나은 하루하루를 살고 싶어서 기획하고 설계한 의무감에 해당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눈에는 아주 빡빡하고 타이트하게 보일지 모르는 것들도 저는 아주 행복하게 실천할 수 있는 거죠.


08 . 

간혹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때 (조언이라고 쓰고 참견이라고 읽는 편이 더 나은 것 같긴 합니다만... 암튼) 우리는 '거 너무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지 말고, 좀 내려놓고 살아. 긴장 풀고 좀 막 살아도 돼.'라는 식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의도가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의무감을 넘어서 스스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 속에 살며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기 때문에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함이 맞죠.


09 . 

하지만 세상에는 의무감을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습니다. 내 기분이 내킬 때, 적절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일정 수준 이상의 보상이 주어질 때, 과정과 결과를 온전히 예측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오히려 '일단 해야 하니까 한다'는 마음으로 스타트를 끊어 놓고 나서 '어떻게 해야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정말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해야 한다'는 마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온전히 내가 선택하고 또 추구하는 것들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거겠죠.


10 . 

좀 웃기긴 하지만 저는 지금 쓰는 이 글도 의무감으로 쓰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해서 잘하고 싶다면 어느 정도 양적인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날은 사람들이 좀 공감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예상외의 좋은 호응을 얻는 등 엎치락뒤치락하는 결과가 고스란히 묻어나지만 '어떻게든 써야 한다'는 그 기분 좋은 의무감이 좀 더 나은 글을 쓰도록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역시 의무감이라는 단어에 대한 관점부터 한 번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 싶어요. 여러분의 의지에 기초한 멋진 의무감은 '의무'라는 단어의 뜻처럼 '옳은 데 힘을 쏟게' 만들지 모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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