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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28. 2024

모두가 좋아한다고 해서 나까지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12

01 . 

벌써 6년 전쯤 일이네요. 늦가을 무렵 연휴를 맞아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을 오른 김에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호안 미로 미술관도 한번 들러봤죠. 사실 이름과 대표적인 화풍 정도만 알고 있었던 화가여서 아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고 아기자기한 공간 자체도 퍽 마음에 들었던 기억입니다.


02 . 

그런데 당시 주요한 작품들을 설명해 주던 도슨트 분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습니다.

"호안 미로의 작품은 평이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를 좋아하는 팬들조차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포인트가 호안 미로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도 스스로 늘 강조했거든요. '사(史) 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꼭 그것을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죠."


03 . 

알고 봤더니 그 말은 서양사학에서 꽤 널리 알려진 말이더군요. 특히 시대사와는 별개로 예술의 영역을 다루는 역사 속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과 '개인의 취향과 관점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강조되는 문화라고까지 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맞지만 좋아하는 것은 자유다'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04 .

 이 일화가 쉽게 잊히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팝업 문화와 더욱 가속화된 패스트 트렌드가 제가 일하는 영역에서 큰 존재감을 나타냈기 때문이죠. 그러니 내 취향과 관점을 테스트해 보기도 전에 일단 '요즘은 뭐가 주목받는지', '어디를 가야 핫하고 힙하다는 소리를 듣는지'를 쫓아가는 것만도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버거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요.)


05 . 

그런 와중에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무리 제가 일하고 있는 분야가 브랜딩이라고 하더라도 갈수록 대다수의 업계 종사자들이 그저 도태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뭔가를 인증하고 공유하는 사례가 불 번지듯이 늘어났거든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는 훌륭한 역량임이 분명하지만 단순히 '나 트렌디해요'를 반증하려는 시도라면 이는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것임이 확실하니 말이죠. 


06 . 

소위 SNS에는 이런 풍조가 더 심합니다. 누가 작성했는지 모르는 '마케터라면 꼭 가봐야 할 전시' 리스트업이 올라오고 '브랜딩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로 방문해야 하는 공간'이 넘쳐나기 때문이죠. 심지어 몇 해 전에는 현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사이트를 전해주는 말들로 트위터 채널을 운영하던 한 사용자가 고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던 만큼 가끔은 그런 출처와 순위 매기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무척 궁금한 것도 사실입니다. 


07 . 

저 역시 뭔가 훈수 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한 분야에서 꾸준히 일해온 사람으로 짧게 나마 드리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 바로 '이 신(scene)에서 핫하다고 해서 반드시 나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호안 미로와 같은 대가의 작품 앞에서도 큰 감명을 받지 못하듯이 우리 각자가 일하는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포인트를 이해보려는 것과 그게 나를 움직이지는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분리해 내는 노력이 훨씬 의미일 수 있는 거죠. 


08 . 

좀 씁쓸한 얘기지만 사실 브랜딩, 마케팅 분야에서는 두레나 품앗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태그 해서 칭찬하는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때문에 A가 B를 칭찬해 줬다면 다음엔 B가 A를 칭찬해 주고, 그렇게 A와 B를 모두 팔로잉하고 있는 대중들은 저들끼리만 통하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그 취향을 공유하는 게 트렌드를 따라가는 방식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죠. 작금의 비즈니스가 동작하는 방법이기에 딴지를 거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그 작동 원리를 알고 받아들일 필요는 있습니다. 


09 . 

이 일을 하다 보니 입버릇처럼 생긴 표현들은 대부분 타인과 나를 분리하는 표현들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요~', '이건 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떻게 느꼈냐면 ~', '제가 좀 특이해서 그런 건지~'와 같은 말들을 정말 많이 사용하게 되거든요. 어쩌면 누군가와 다른 의견을 피력해야 할 때 쓰는 일종의 '쿠션어'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과 감정과 의견과 소회를 솔직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은 정말 중요한 노력 중 하나입니다. 


10 . 

'누군가와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은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솔직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오스트리아 대문호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의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함께 좋아하고 공유하는 것도 당연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나의 생각을, 나의 기준대로 잘 설명하고 드러내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도 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대상을 봤을 때는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저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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