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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by 월량


지난겨울,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으며 그동안 소설로만 알고 있던 인기작가가 아닌, ‘인간 하루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하루키 작가는 글쓰기 외에도 재즈와 피아노, 요리, 달리기, 번역, 그림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 깊은 조예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요리나 재즈가 종종 등장하는데 꽤나 구체적일 뿐 아니라, 묘사도 굉장히 섬세하다. 덕분에 반가움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곤 한다.


얼마 전 서점에서 표지가 유난히 예쁜 두꺼운 양장본 책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노르웨이의 숲>. 망설임 없이 집으로 데려왔고, 책장을 펼친 순간 무서운 속도로 빠져들어갔다. 그동안 엄두도 못 내었던 벽돌책을 단 일주일 만에 완독 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뿌듯함이 몰려왔다.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감각적인 책 표지에 이끌려 사온 책. 바뀐 제목보다 예전의 "상실의 시대"가 더 와닿는 건 나 뿐일까.


와타나베는 스무 해 전, 나오코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니"


나오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의 기억에서 자신이 조금씩 사라질 것임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와타나베는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나오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등학생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친구 기즈키의 죽음으로 같은 시기에 상실의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함께 걷고 또 걸으며 서로의 깊은 상처를 다독이며 단단한 신뢰를 쌓아간다.

'동병상련'의 감정에서 싹튼 둘의 사랑은, 여느 또래의 설레고 경쾌한 사랑이 아니었다. 또 상처받을까 두려워 조심스럽고, 서로를 위해 힘이 되어주고 싶은 조용하고 묵직한 사랑이었다.




그러던 중, 와타나베에게 같은 과 ‘미도리'라는 여자친구가 생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도통 마음을 내주지 않지만, 미도리는 한결같이 와타나베를 갈구한다. 온순하고 내면에 깊은 슬픔을 안고 사는 나오코와 달리, 미도리는 솔직하고 당돌하다. 그는 미도리의 생기와 에너지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사라진 나오코(건강 상의 문제로 요양원에서 생활했다)로인해 울적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미도리가 없었다면, 아마도 끝없는 방황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p.519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하고 상냥하며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게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땅을 밟고 서서 걷고 숨 쉬고 고동치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뒤흔듭니다. -(중략)-
도대체 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오코는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또 한 번 그는 상실을 겪는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 법이 없는걸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두 번째 이별, 잔인하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존재하고, 인간은 언제나 외롭고 연약하며 고독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애틋할 것만 같은 청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상처와 무력감 속에서 성장통을 견뎌내는 고통과 성찰을 동반한 사랑이었다.





삶은 본래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것. 우리는 자신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책의 마지막 장면.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너 지금 어디야?"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와타나베는 끝내 주저앉지 않았다. 새 삶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직 확실히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너(나오코)'를 붙잡아두려고 찾아 헤매지는 않겠다는 결심만큼은 확고하다.

불완전한 미도리는 불완전한 와타나베를 따뜻하게 끌어안아줄 것이다. 각자의 상처를 품고, 조금씩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리라 믿는다.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 속에서 청춘의 방황과 고뇌는 그 무엇보다 귀하다.

와타나베의 등을 조용히 토닥이며 속삭이고 싶다.


마음껏 방황해도 괜찮아.

절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찬란한 시간임을, 꼭 기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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