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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Aug 31. 2018

스물아홉 전역한, 무직자의 나날들

이젠 창업했던 회사도 없다. 다시 세상에 던져진 나. 돌아온 우리 동네.

스물아홉 7월 5일 전역했다. 그 사이 촛불과 탄핵,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나는 스물 일곱 10월 6일에 입대해서, 스물 아홉, 7월 5일에 전역했다. 사회와 좋을만큼의 고립과 좋을만큼의 접점이 있던, 고생했지만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5~6살은 어린 친구들과 의경생활을 했는데, 이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도 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회로 던져졌다.


내가 의경생활을 하는 동안 세상은 제법 많이 변했다. 말년에 많은 고민을 했지만 계획이란 하기 전에는 공상일 뿐이다. 이제는 입대전 친구들과 7년동안 일궜던 우리회사도 없다. 이젠 새로운 길을 가야만 했다. 2년을 버티기 위해 모아두었던 돈은 이제 거의 바닥이 났고, 내 계좌엔 30만원 정도만 남아있었다. 그 돈으로 머리를 하고 헬스장을 등록했다. 언젠가 나치 수용소에서 씻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은 끝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년만에 돌아온 집. 전역후 2주쯤 지났을까. 내가 자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는 아래와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냥 적었다.




- 전역기념. 걍 뭐 생각나는대로 써봄. 아 이 글은 막썼기 때문에 수정이 없습니다.

전역을 했다. 다시 내가 자란 동네로 돌아왔다
스물 네살 부터 집 밖에서 살았으니까 아주 돌아온 건 5년만이다.

나는 지우처럼 유명한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다며 태초마을을 떠났다가 3번째 체육관 언저리 근처에 갔다가 돌아온 트레이너같다. 왜 3번째냐면 1,2번째 체육관에서는 동료를 만나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그다지 멀리는 못갔다. (하지만 지우도 마지막 스테이지를 깨려면 태초마을로 돌아와야하니 음 잘 온건가 생각 중)

내가 창업이다 의경이다해서 태초마을 밖을 떠도는 지난 몇년 동안 형은 결혼을 했고, 형 아들(조카 aka 문하성)이 태어났고, 동생 희지는 초글링에서 고딩이 됐고, 건강하고 귀엽던 우리집 강아지 문돌이는 열 살이 됐다.
문돌이는 이제 건강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잘 생겨서 볼 때마다 나도 쑥쑥 잘 늙어야지 생각한다. 다행히 브로콜리와 당근을 여전히 잘 먹어서 건치구나 싶다.

조카는 잘 자라고 있다.


오늘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예전 살던 곳에 있던 칡냉면집에 갔다가 동네에 하나뿐인 스벅에 가면 자연스레 동선이 그렇게 된다.
신기하게도 이 동네는 정말 안변했다. 가게들은 조금씩 바뀌는데, 건물들은 다 그대로다. 존버중인 가게는 간판만 바뀌고 주인은 안바뀐다.
이 동네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없어보인다. 부동산 호재가 전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계양역에서 내리면 공기가 참 맑다. 말하자면 마계의 허파 같은 곳.
서울 사람들이 여기에 오는 경우는 1) 서울 산은 너무 높으므로 적당히 만만한 계양산 등정 2) 한강공원은 사람이 많으므로 아라뱃길에서 자전거 타기 정도 밖에는 없을 것이다.
(얼마전 한 정치인이 희대 드립인 '이부망천' -'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이라는 말을 했는데, 정말 희대의 망언이라는 생각을 했다. 네 망천에서 초중고 나옴 ^.^)

여하튼 동네 칡냉면집은 사람들이 대체로 좋아하지만 호불호가 갈린다. (이제와서 보니 양념장과 기름기가 많은 면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은 물냉면 곱빼기를 3년 만에 먹었다. 냉면집 형한테 주문할 때 '칡냉면주세요' 라고 했는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왜냐하면 이 집은 그 흔한 만두도 안판다. 메뉴는 물냉면, 비빔냉면 끝.
여타 냉면 집에 익숙해진 나는 '아 물냉면 곱빼기요'라고 정정해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 사이 경험한 평양냉면 네임드인 필동면옥보다 나았고, 오장동 네임드 함흥냉면보다 나았다.
계산할 때 냉면집 형의 어머니인 주인 아주머니가 날 알아보고는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그 사이 군대도 다녀오고, 회사도 정리하고, 지금은 잘 지낸다고 말씀드렸다. 부산 버스킹에서 받은 현금으로 냉면값을 계산했다.

다시 동네를 걸었다.

나는 초딩 때부터 여름이면 매주 그 냉면집에서 물냉 곱빼기를 먹었다. 사실 내가 초딩때부터 그 냉면집에 자주 갔던 다른 이유는 근처에 '우리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20년 전 엄마의 가게 위치선정은 단군급이었다.(무궁화..삼천리..화려..강...아름다운 강산 ^.^)
가게는 먹자골목에 있는 유일한 수제화 가게였다. 위치선정의 이유를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당시 아마 가게세가 제법 쌌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초4 내 기억에 원래 자리는 장어나 건강원 자리였다. 내가 자라면서 가게도 컸다. 원래는 가게 하나크기였는데, 중간 벽을 부수고 옆가게 자리까지 확장했다.
당시 가겟방에 살았었기 때문에 인테리어 과정을 모두 볼 수 있었는데 콘크리트 벽이 생각보다 잘 부서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연하게도 부순 자리에 철골이 나왔는데, 그것이 안보이게 하려고 철골을 자르고 노출된 콘크리트 벽에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는 등 예쁘게 미장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요즘은 비싼 식당이나 카페에 가도 녹쓴 철골쯤은 운치있게 봐주는데 인테리어 업자들은 슬퍼할 것 같다.(먹는 곳에 철골이 보여도 되나..는 생각은 덤. 석면? 떨어질 것같은데 라는 생각도 덤..)

가겟방 뒷문을 열면 담배를 피던 교복을 입은 형과 누나덜이 가끔 보였다. 지금쯤 30대 중반이 다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이 외졌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사실 그곳은 매우 잘보이는 곳이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말해주고도 싶고, 사는 입장에서는 그들이 매우 거슬렸으므로 무어든 해야했지만 그때는 내가 걔들보다 작았기 때문에 보통은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 한편 그 곳에는 고양이들이 매우 많았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길냥이들이 예쁘다. 밥을 준다라고 하지만,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고양이들의 생태와 부대끼고 또 관찰하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양이의 예쁜 순간'은 어느정도는 정해져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본 고양이들은 사냥을 잘했다. 1년반쯤 전 교통으로 의경 생활을 할 때 도로에 갇힌 날개가 부러진 까치를 구한 적이 있다. 마침 퇴근러시 때라 동묘 앞 신호기도 일시적인 고정상태여서 구하기 쉬웠다.(내가 조작함) 얘를 잡아서 박스에다가 넣어두었는데 경찰 교통 센터에서는 담 옆에 던져놓으라 했다. 그럼 고양이들이 얘를 '감사합니다' 하고 먹을 거 아닌가. 나는 새 사냥을 하는 고양이를 본적이 있으므로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어떤 고양이들은 서로 죽일듯이 싸웠다. 2층 정도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도 떨어지는 와중에도 싸웠다. 한 마리가 도망칠 때까지 싸웠다. 어떨 때는 우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어린 아이같았다. 어떤 날 나는 짱쌔보이는 고양이와 눈싸움을 했다. 나는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녀석이 문앞에 있었다. 녀석의 협조가 필요했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는데 녀석이 비키지 않았다. 당시는 문돌이가 태어나기 전이었으므로 강아지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계속 녀석을 노려보며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다행히 녀석은 한번 울더니 자리를 비켜줬다.

그때 나는 초딩치고는 컸지만, 생물학적으로 작았다. 즉 짱 약했다. 지금도 길을 걸을 때면 작았던 때의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나보다 작거나 약한 상대에 대해 생각한다.
가게방 한 켠에는 연월(2004, 1, 20, 172이런 식)로 키를 표시한 줄이 있었다. 키가 140 남짓일 때부터 183이 될 때까지 가겟방에서 살았다. 나중에는 가겟방도 넓어지고 집 안에 화장실 공사를 해서 자연스레 고양이와 일기토를 할 일도 없어졌다. 집은 근처로 이사해도 가게는 계속 그 자리였다. 다행히 가게는 엄마가 끝내는 날까지도 그럭저럭 됐었고, 아쉬워하는 이가 많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때즈음 친구들과 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방황도 시작이었다.

가게 자리를 지나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사거리를 지날 때 작은 병원(의원)이 보였다. 학교를 다닐 때 늦잠을 자면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그 병원에 가서 어딘가 아프다고 말했고, 진단서를 받고 부족한 잠을 자다가 학교로 갔다. (의사 선생님과 나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형과 나와 희지가 나온 초등학교 옆에는 형과 내가 나온 중학교가 있고 그 옆에는 당시 임학동 중산층들(?)이 살았던 아파트가 있다. 그 때는 그 아파트가 엄청 크고 좋은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보니 흔하디 흔한 적당히 오래된 아파트가 됐다. 주상복합을 보고 나온 탓인가.

스벅에 앉았다. 콜드브루 벤티를 마셨다. 지나가는 길에 형에게 포착당했고, 엄마와 희지가 나를 보았다고 한다.
가족들을 참 자주본다.
한줌도 안되었던 나의 세상에 결국 나는 다시 돌아왔다.
미래 내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 될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여기에서 나지는 않았어도
이 동네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랐다는 것이고, 이 정서가 내 마음 어느 한 켠에는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서 미래 내가 제법 큰 성공에 당한다면 나는 이 동네 계양구에서 분식집에 가서 오징어 튀김을 사먹고, 빵집에서 만원어치 빵을 사서 혼자 다 먹었고
간이 특이한 냉면집에 매주 놀러가서, 담배피는 형 누나들과 싸우는 고양이들을 보면서 계양산가는 584번 버스를 타면서 자랐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말아야겠다.

일단은 다시 무엇이든 시작해보려한다.
어디에든 무엇이든 내 자리와 나의 일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 겨울 광화문 광장에 서있던 순간에도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미래는 생각보다 좋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뭐 지금보다는 잘되겠지
내일도 스트러글!




위 글을 시작으로, 나는 나와 주변의 작은 이야기들이 남기고 싶어졌다. 나무로 만든 오래된 작은 물건같은 이야기들이 쓰고 싶어졌다.


어느새 전역하고부터 거의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다행히 내게는 감사한 기회가 많이 생겨, 필요할만큼의 돈을 벌면서 공부를 더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운이 좋아 큰 성공에 당하는 날에도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들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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