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았던 엄마는 이제 계좌가 없었다.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유독 만연체네요.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보다는 엄마와 아빠, 심지어는 엄빠가 더 편한 것 같습니다..^^;; 저의 기타는 엄마의 기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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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나의 아빠와 엄마는 결혼을 했다. 형이 태어나고 17개월 후 내가 태어났다. 아마도 내 기억의 시작은 4~5살때 쯤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억이라는 것이 상황과 맥락의 기억이라기보다는 '장면'이 사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형태다. 내 기억속 첫 우리집은 씻는 곳과 방이 구분된 턱이 높은 단칸방이었다. 내 가슴정도 높이는 됐던 것 같다. 그 다음 '장면'은 햇볕이 밝게 비추던 '우리 집' 빌라에서 시작한다. (90년대 초 서민들도 '노력'하면 서울에 집을 살 수 있었다) 아마도 5살때 즈음인 것 같다. 그때 나는 초롱유치원 노랑반이었고, 우유팩을 잘라서 씨를 뿌리고 창가에 올려두면 이따금씩 나는 싹이 나는 것을 바라봤다.
96년, 7살 나는 초록반이 되었다. 형은 화계'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 이모는 내가 지금 사는 인천 계양에서 가방과 수제화 가게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형과 나를 키우던 엄마는 다시 일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이모의 가게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 집을 팔고 가게를 인수했고 남은 돈으로 인천 지역 아파트를 '전세'로 갔다. 아빠의 직장은 여전히 성수동 정비 '공장'이었지만 이 선택에 아빠는 전혀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아빠는 묵묵하고 우직히 엄마의 선택을 따랐다. 아빠는 팔로우십이 정말 좋은 사람이다. (^^;;) 묘한 기분이 드는 지점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왔을 때 엄마의 나이가 고작 서른 둘 밖에 안됐다는 것이다. 그때 내 눈에 엄마 아빠는 어른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들도 참 어리듯 젊었다.
첫 가게를 열었다.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기억나는 다음 '장면'들은 회색이다. '따뜻한 저녁과 웃음 소리'보다는 이상하리만큼 치열한 엄마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98년 한국에는 IMF 환란이 왔고, 경제는 어려웠다. 모두가 그랬듯, 당시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끝내는 전세금을 받지 못했다.
2001년 두 번째 가게를 열었다. 방이 딸린 가게였다. 다시 수제화와 가방을 팔았다. 이번에는 판 제품의 AS 수선까지 했다. 아빠는 자동차를 정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선기술을 금방 배웠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빠는 주말에 수선을 했다. 엄마도 수제화를 팔며 재봉틀을 배웠다. 엄마 아빠는 매일 새벽 2시쯤에 잤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곧 가게는 자리를 잡았다. 마침 동생인 희지도 태어났다. 가게는 점점 커져서 집도 따로 이사를 가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즈음에는 3칸인 1층을 전부 터서 가게로 썼다. 이 지역에는 수제화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게는 곧잘 됐고, 담당 관청의 추천을 받아 엄마는 중소기업청장상도 받았다. 엄마 아빠는 신용이 좋았다. 은퇴한 군인이었던 건물주 아저씨는 차라리 엄마에게 건물을 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작은 건물보다는 '집다운 집'을 사고 싶어했다. 인천에서 제법 오래 살았고, 다자녀에 무주택 신분을 오래 유지했던 우리 집은 그때 즈음 송도의 '많이' 큰 평수 아파트 분양권에 당첨됐다.(이어서는 청라에서도 되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크게 기뻐했다.
고3 여름방학 때 엄마와 나는 송도에서 점심을 먹었다. 허허벌판이었지만 분주하게 큰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 집이 올라가면 일단은 세를 주고, 나중에는 직접 살거나 팔아서 전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두 분이 정말 많이 고생하셨으니 앞으로는 행복하고, 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즈음 기타를 사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가족의 미래를 크게 낙관했다.
해가 바뀌어 나는 경영학과 학생이 되었고, 곧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부르는 게 값이었던, 푸르지오 분양권은 아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경기는 얼어붙었고, 또 누군가 사기에도 너무 큰 평수였다. 엄마 아빠는 그래도 버텼다. 엄마는 정든 가게를 정리했다. 아빠는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끝내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스물 둘, 말그대로 집의 '파산'을 경험했다. 그즈음 나는 친구들과 이후 7년을 함께한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드라마를 보면 집이 망하면(?) 티브이나 가전도구, 가구 등에 빨간쪽지(?) 같은 것을 붙이러 사람들이 오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그건 재벌이나 정말 큰 부자집이 망했을 때 생기는 일이다. 나는 그때 창업을 하며 처음 번 돈으로 엄마의 기타를 사기로 했다. 나는 기타가 가지고 싶었고 기타를 사는 것이 가정 경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엄마에게 계좌를 여쭈었다.
"입금은 새마을금고 문희지 xxx-xxxx-xxxx 고마워 아들!"
한 때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은 엄마는 이제 계좌가 없었다. 파산을 하면 계좌를 만들 수 없고, 거의 대부분의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 엄마는 내 동생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었다. 스물 둘 밖에 안됐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괴로웠다. 방황이 이어졌다. 나는 창업과 음악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스물 넷에 나는 창업을 위해 인천을 떠나 서울로 떠났다.
시간이 훌쩍지나 스물 아홉 7월 전역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행히 괜찮은 조건으로 기획 일을 하며, 남은 학기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창업이다 의경이다 밖에 있는 동안, 형은 결혼을 했다. 집에는 엄마와 아빠와 희지만 있었다. 당연히 큰 집은 필요 없었다. 돌아온 내게 집은 좁았다. 나는 엄마에게 좀 더 큰 집으로 옮기자고 말했다. 엄마는 아직은 남은 빚이 조금 있다고 말했다. 오래전 우리 집은 파산을 했었다. 파산을 하면 변제 책임이 없다. 그런데 왜 빚이 있다는 것일까. 엄마는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내게 '왜 힘든지' 말해준 적이 없었다. 의아했다.
"예전에 파산할 때 금융권 거는 넣었어. 그런데 사람들에게 도움받은 것들은 그럴 수가 없더라. 오랫동안 알고지내던 분들인데 그럴 수는 없지..."
(...)
내가 방황하는 몇년동안 나의 엄마와 아빠는 내 동생 희지를 키우며 묵묵하게 '도움준 이들'의 돈을 갚아왔다. 그마저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얼마전부터 계좌를 다시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형의 결혼식에는 정말 많은 엄마와 아빠의 사람들이 왔었다. 덜 힘들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며칠전 나의 엄마와 아빠가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저 사랑해서 결혼했고 열심히 살았던 한 개인이었으며, 많이 배우지도 많은 자산을 가지지도 못한 어쩌면 그냥 수많은 소시민중 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선하고 정직하고 우직했다. 또 내게 많은 말을 하기보다 내가 무슨 길을 가더라도, 그냥 믿고 지켜봐 주었다. 그들이 내게 준 것은 무제한의 믿음이었고,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는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들은 내게 증명했다.
문득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엄마와 집을 보러가기로 했다. 계양산 근처 수도원 마당이 보이는 발코니가 있는 집이다.
내가 엄마, 아빠, 희지, 문돌이와 다같이 살 수 있는 날이 아주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정말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야겠다.
이 말이, 문장이 무력하지 않도록.
나도 내 삶으로 증명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