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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Sep 08. 2018

여름이 ‘여름’했다

무더웠던 이 여름.사랑하는 곳에 왔고, 사랑이 왔고 다시 사랑은 갔다.

얼마전 참 좋아하는 이기주 작가의 브런치 글 <가을에 '가을'하다>를 읽었다.(https://brunch.co.kr/@2kija/86) 작가는 가을에 '가을한다'. 아마도 작가는 이미 가을이 왔다고 느낀 것 같다. 사실 그런 것도 같다. 하늘은 높아졌고 아침과 저녁 바람은 선선해졌다. 밤을 걸을 때 입는 옷은 어느덧 색이 짙어지고 조금은 두터워졌다.

9월은 가을이 맞나보다.


9월의 다른 말은 개강이다.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다. 오랜 창업과 늦은 입대로 끝내지 못한 남은 학기를 마쳐야하는 탓이다. 이 날은 점심을 먹고 홀로 카페에서 아무 생각들을 그리다 시계를 늦게 보고야 말았다. 오후 1시50분. 강의는 2시. 개강 첫 주 강의에 늦고 싶지 않아 조금은 빠르게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땀이 났다.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이내 강의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불리는 이름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리엔테이션이라 강의는 금방 끝이 났다. 나는 좀 더 강의실에 남아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었다. 안으로 오는 바람은 가을인데, 바깥 풍경은 아직 여름이었다.


매미가 울고 있다. 신록이 푸르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원한 음료를 들고 오고 가고 있다. 그래. 아직 여름은 가지 않았다. 계절의 오고 감이 그라데이션이라면 아직 가을은 '여름'하고 있다. 아니 여름이 '가을'하기 시작했다.


올 여름은 참 무더웠다. 살아있는 거의 모든 이가 경험한 여름 중 가장 뜨거웠던, 참 무더웠던 여름이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전 나는 전역을 했고, 사회로 다시 던져졌다. 이 여름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여름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참 무더웠던 여름에 나는.. 사랑하는 곳에 돌아왔고, 사랑이 내게 왔고 다시 사랑은 갔다.


창업과 의경 생활로 방황하다 5년만에 돌아온 집에는 엄마와 아빠, 여동생, 강아지 문돌이가 있었다. 밖에 있을 때 나는 집에 잘 전화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잘 지내고 있을거야. 생각하며 내일을 위한 내 일들을 해나가고 있었다. '내 일'이 끝이 나고 참 길었던 의경 생활도 끝이났다. 초등학생이던 내 동생은 어느덧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건강하고 귀엽던 강아지 문돌이는 10살이 됐다. 엄마 아빠에게도 '나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늘 티격태격하던 형은 결혼하고 집에 없었다. 사랑하는 곳에 돌아온 나는 마냥 어리지못한 스물 아홉에 다시 시작할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내가 해야할 일들도 함께.


참 무더웠던 여름날, 사고처럼 사랑이 왔다. 그리고 다시 사랑은 갔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길지 않아 어쩌면 그것은 사랑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랑이 별건가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의 말들도 단지 하루 동안의 일에 지나지 않은 걸. 어떤 날은 좋아하는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물었다.


"책 좋아해?"

"응 텍스트를 읽는 것은 참 좋지?"

"나는 알랭드 보통의 책이 참 좋아. 여행의 기술은 특히나"

"알랭드 보통은 사랑과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의 해상도가 참 세밀한 것 같아.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고 쓸 수 있을까"

사실 그의 책 하나를 제대로 읽은 적은 없으나 탐독한 몇 문장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 문장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 내가 늘 하는 말이야. 암묵적으로 은근히 인정하고 있던 것들을 문장으로 잘 표현해"

며칠 후 그녀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빌려주었다.


어떤 날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내가 이야기했다.

"이 노래 있잖아 진짜 너무 좋아. 요즘은 너무 좋아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듣는 것 같아"

"그럼 같이 들어보자 우리"

브라이언 맥나잇 이 커버한 Earth, Wind & Fire의 'After, the Love Has Gone(사랑이 떠난 후에)'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VQA8cziG0

브라이언 맥나잇이 커버한 'After The Love Has Gone'


For a while to love was all we could do

잠시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랑 뿐이었어

we were young and we knew

우린 우리가 어리단 걸 알고 있었고

and our eyes were alive

서로의 눈은 살아있었지

Deep inside we knew our love was true

그 깊은 곳에 서로의 사랑이 진실하단 걸 알았어

...

Somethin' happened along the way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긴 거야

what used to be happy was sad

행복은 슬픔으로 바뀌었지

...

and yesterday was all we had

우리에게 남은건 지난날 뿐이었어

And oh after the love has gone

그리고 오, 사랑이 떠난 후에도

how could you lead me on

너는 계속 날 잡아끌어

...

and not let me stay around

가만히 있지 못하게해

Oh oh oh after the love has gone

오 오 오 사랑이 떠난 후에도

what used to be right is wrong

옳은 것이 틀린 것이 되었어

Can love that's lost be found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가사해석은 http://hiphople.com/lyrics/230285을 참고했습니다.)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을 하다, 사랑이 끝나는 여정을 이처럼 격정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며칠 후 그녀가 에릭 클랩튼의 Autumn Leaves를 추천해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매일 '사랑이 떠난 후에' 다음에는 '가을 잎'을 들었다. 우리는 영화와 노래 '봄날은 간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관계의 '시작과 끝'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도 나누었다 우리는



어느 무더운 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명동성당이 달이 보였다. 그러다 내가 말했던 것 같다.

"난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그녀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다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는 안하네~?"  

"음..그 말은 아직은..정말로 아껴두고 싶어서 그래"



참 무뚝뚝하고 성실한 나의 아빠는 같은 직장을 다니던 나의 엄마에게 프로포즈를 따로 하지 않았다. 2년쯤 만났을 때, 아빠는 엄마에게 어느날 '내 월급을 너에게 주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내게 그 순간이 프로포즈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그 다음달부터 아빠 엄마는 같이 통장을 만들었다. 어쩌면 내게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 아빠의 그 말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아빠를 닮았는지 살가운 말을 좀처럼 잘하지 못한다. 심지어 나는 가족들에게도 그 말을 셀 수 있을만큼 적게했다.

말한다고 마음이 닳는 것도 아닌데...


"나는 밥 먹는 것도 좋고, 강아지도 좋고, 커피도 좋고, 에어컨 바람도 좋아해"

조금은 웃음기 머금은 장난스런 말투.

"음..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있는데, 기표(표시된 말)이랑 기의(실제 의미)는 다른거래! 내 '좋아해'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해'보다 더 많이 많이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말이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짧은 대학 교양 지식을 동원해 말했다.사실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나는 조금만 더 아끼기로 했다. 그리고는 이번 여름이 지나기전 말하겠다고 마음대로 다짐해버렸다.



...




9월 첫 주의 밤, 이 글을 쓰다 창문을 열었다.

가을이 '가을'하고 있다. 내일 낮은 잠시 가을이 '여름'하겠지만 오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옷의 색은 짙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가디건과 긴 셔츠를 꺼내입어야만 하는 날씨가 올 것이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여름은 다 지나가 버렸다.


살아있는 이들이 느낀 가장 뜨거운 여름.

나는 사랑하는 곳에 돌아 왔고,

사랑이 왔고 다시 사랑은 갔다.

여름의 색이 옅어지고나서야

나는




사랑한다

말할 걸.




올 여름

여름이 참 '여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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