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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Sep 04. 2019

꼰대가 되지 않기란 어렵다

생물학적 나이보다는 불통과 독단적 태도로부터 발현되는 꼰대 증후군

뭐만 하면 꼰대래? 근데 꼰대가 뭐지...?

꼰대가 나쁘다는 느낌은 있는데 정확히 꼰대가 무엇인지 그 의미는 다들 잘 모르고 있다.

마 내가 느그 서장이랑 밥도 먹꼬! (너무 자주 소환되어서 죄송한 마음)

어느새인가 꼰대라는 단어가 참 많이 쓰이고 있다. 꼰대가 세상에 그렇게나 많다는데, 또 어느 누구도 꼰대가 되기는 싫다는데, 정작 꼰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합의가 없었다. '꼰대'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단다.


꼰대

명사

1.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2. 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

 

어째 좀 모자라다. 이러한 사전의 의미로는 오늘날 쓰이는 '꼰대'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늙은이'가 노인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로 쓰일 수는 있으나 '선생님'이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꼰대는 상당한 멸칭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선해할 수 없는 나쁜 뉘앙스의 말로 인지된다.  

 

사는 곳과 시기가 달랐던 이들에게 '꼰대'라는 단어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교복을 입는 시기 (2003~2008) 나와 내 주변 친구들에게 꼰대라는 단어는 말 자체가 낡아서 좀처럼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꼰대'는 '따봉'이라는 말과 같은 낡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꼰대'라는 말을 10대 때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답답한 어른에 대한 비토를 위한 단어 옵션으로 존재했던 것 같기는 하다.


담임 선생님에 대한 불만 섞인 지칭은 (불경하게도!) 주로 '담탱'이었고, 각 과목 선생님은 각 과목명으로 불렸다. 수학 담당 선생님은 '수학' 이런 식으로. 좀처럼 그런 일은 없었지만 '답답한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주 제한적으로 '꼰대'라는 말이 쓰이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 꼰대가 ~라고 했어" 이런 식이었다.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10대 때 '꼰대'의 용법은 지금 우리가 쓰는 '꼰대'의 용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답답한 부모=꼰대'라는 식이었다. 이러한 활용은 의미의 확대 적용이 어렵고, 지극히 불경하기(!) 짝이 없어서, 잘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때 '꼰대'는 거의 죽은 단어였다.(어디까지나 나의 청소년기 기억에서는)


꼰대의 사전적 정의는

오늘날 꼰대가 활용되는 맥락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실생활에서 꼰대는 '답답한 구세대', 또는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어느새부터인가 '꼰대'라는 말은 아주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나와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인이 되기 시작한 20대 중반 때부터 빈번히 들리는 말이었다. 거의 죽었던 단어가 발굴되어서 시대에 맞는 의미를 입고 되살아났다고 할까. <꼰대>라는 기표는 시대의 부름을 받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야 그 사람 <꼰대>야
주된 활용은 이런 식이다.


정황상 지금 시대에서 꼰대란 '답답하고 고루하고 꽉 막힌' 존재를 지칭하는 명사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꼰대'는 고루한 속성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붙을 수 있다. 꼰대라는 말에서 10대 시절 기억하던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불경하고', '불손한' 의미는 많이 흐려지고 대신 '답답하고 고루한 구세대'나 '꽉막힌 사고방식/행동양식을 가진 존재'를 지칭하는 의미로 옮겨갔다. 원래 존재하는 단어가 재발견되어서 본래 의미는 흐려지고,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어린 꼰대'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꼰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나이 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하고 있지만, 이는 나이와 무관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음도 의미한다. 예전에는 꼰대가 되려면 지긋한 나이의 선생님이거나 부모님 이어야 했는데, 이제는 누구나 될 수 있다! 바야흐로 꼰대의 민주화(?), 대중화 시대가 된 것이다.


내가 꼰대라니!


과거에도 위에 언급한 <꼰대적 속성™>을 가진 이는 있었다. 아니 지금보다도 끔찍하게 많았을 것이다. 또 앞서 말했듯, '꼰대'라는 말 자체는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꼰대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꼰대의 대중화, 민주화(?) 시대는 지금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꼰대적 속성™>을 가진이들에게 '꼰대'라는 착 붙는 명사를 붙일 수 있게 된 배경을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일방적 권위주의 문화가 상당 부분 해체되었음.
2) 기성세대와 기존 문화가 복종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대는 복종할 이유가 줄어듦.
3) 보상은 못하는데 복종을 강요하니 기존 세대와 그 질서에 대한 회의와 자조, 반감은 더 늘어났음.
4) 새로운 세대에서는 언어유희를 활용하는 특유의 해학 문화가 발달했음.

이상의 배경을 토대로 마땅히 불리는 바 없이 <꼰대적 속성™>을 가지고 있던 무엇은 비로소 '꼰대'라는 이름을 입어 '꼰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점잖게 '고지식'하다고 했는데 말이지..


시대가 변하고 내 또래들(뭐..저도 90년대생이긴 합니다.)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꼰대를 성토하는 내 또래들의 꼰대들에 대한 비토도 이어지고 있다. 꼰대를 만난다는 것은 사회생활이 참 많이도 피곤해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꼰대'라는 단어가 가진 '같잖은' 권위주의 느낌과 부정적 느낌이 너무나 크기에, '꼰대'로 치부되지 않기 위한 기성세대의 갖은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각자 먹고 싶은 거 주문합시다! 나는 짜장면!) 하지만 꼰대는 인간 내면에 누구에게나 잠재된 본능과도 같아서 우리는 꼰대를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모두 언제든 꼰대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시대는 꼰대 라벨링의 민주화 시대다.


어디에나 잠재하는 꼰대 증후군의 위협

꼰대, 누구에게나 발현될 수 있는 인간의 본성. 우리는 꼰대라는 본능을 거스르고 있다.

나 때는 말이야~

꼰대 하면 떠오르는 어떤 일반화된 표상이 있다. 왠지 그 존재는 1) 나이가 많을 것이며, 2) 주로 남자이며, 3) 무엇을 배우기보다는 이미 아는 것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4)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아는 것처럼 말할 것만 같다. 게다가 그 '아는 것'이 전하는 내용에는 구체적인 각론은 없고 대강 그렇다는 큰 방향만 있다.


어쩌면 정말로 <꼰대적 속성™>을 많이 가져 '꼰대'로 불리는 이들 중 중년 남성의 비중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꼰대적 속성이 발현될 가능성이 있고 인간인 우리는 모두 그런 인자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꼰대적 속성™>은 무엇인가?

1) 자신이 가진 능력, 매력, 실력 등을 실제보다 과장한다. 과장한 것을 자랑하기 좋아한다.
2) 대접받고 싶어 한다. 즉 특별한 사람처럼 대우받고 싶어 한다.
3) 자신이 이미 결정한 바를 웬만해서는 바꾸고 싶지 않아 한다.
4)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훨씬' 좋아한다. 즉 대화에서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
5) 상대적 우열을 가리는 능력 외 자기 객관화 능력을 상실했다.

이상의 꼰대의 특성은 대체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거나 어리거나 실력이나 경험이 부족한 대상에 대해 발현된다. 꼰대는 언제나 꼰대가 아니다. 사람과 상황을 봐가면서 누울 자리 봐가며 꼰대가 된다. '꼰대질'은 매우 높은 확률로 자신보다 상대적 약자에게 행해지며, 다분히 선택적이다. 게다가 그 선택은 본능적으로 대상에 대한 비교와 우열을 통해 이루어진다. '판단'이라기보다는 '감각'이라고나 할까. 나보다 명백히 뛰어난 대상에게 나는 쉽사리 조언할 수가 없다. 내가 '깜'이 안 되는 탓이요, 얼마나 나를 우습게 볼지 뻔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이미 해본 것과 비슷한 것을 이제 막 해보려는' 이에게 나는? 분명 무언가 한 마디 얹고 싶을 것이다. 이때 이 한 마디를 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너만 그런 거야.라고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거나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 모른다.


상대적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대상 앞에서

우리는 '꼰대적 속성'이 발현될 가능성을 마주한다.

그것은 자기 객관화와 상대에 대한 존중 부족이다.


'비교를 잘하는 것'과 '자기 객관화가 잘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탓에 대체로 우열과 위계에 민감하다.(마찬가지로 자연 상태에서 동물들은 자신보다 강하고 약한 동물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비교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이라면, 자기 객관화는 보다 고등적 사고를 요하는 인간 유기체의 특성이다. 동물적 반사 반응을 넘어 성찰하는 자아가 필요하다. 덧붙여 '비교'가 대체로 힘에 대한 상대적 민감성에 주목한다면, 자기 객관화는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동물적으로 타인과의 우열을 가리고, 힘의 차이에 민감하기에 인간에게는 <꼰대적 속성™>이 발현되기도 쉽다. 왜냐하면 포식 동물이 약한 동물을 먹이로 여기는 것처럼, 우열을 확인했다면 그것을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확인/각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꼰대적 속성™>은 앞 장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재수 없음'과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 다만 보다 특수한 상황에서 드러날 뿐이다.


한편 자기 객관화의 부족은 꼰대적 기질이 더 잘 발휘되는 조건이 된다. 우열 판단의 기준은 얼핏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실제 상대의 잠재적 발전 가능성이나 지금 상대가 이룩한 객관적 성취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냥 '내 기분대로'다. 그런 이유로 자기 객관화 능력이 낮은 상태에 있거나 자기 객관적 판단을 행동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꼰대는 깨어난다.


꼰대적 기질의 발현은 사회관계에서 상대적 약자 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물론 상대적 약자 성을 따지는 기준은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일괄 적용되지는 않는다. 일반화는 어려우나 대체로 <직장 상사-부하직원, 때로는 남-여, 대학생-청소년, 사회초년생-대학생, 감독-선수, 선배-후배> 관계 등에서 전자는 후자에 대해 꼰대적 속성이 발현되기 쉽다.


23살 가을 즈음에 나는 대학 건물 로비 카페에서 친구와 함께 준비하는 기획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친구와 나는 함께 대학생들을 위한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있었다. 한창 열띤 대화를 하고 있는데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름 모를 옆자리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우리 의사를 물어본 적이 없다.


대화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아저씨의 말에는 알맹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복원해보자면 대충 다음 같았다. 당연히 반말이었다. (언제봤다고)

너희 대화가 흥미롭다. 내가 해줄 말이 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보다 좋은 저기 건너편 대학을 나와서 유명 학원의 원장이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다.(대충 망했다는 얘기) 이런 사회 경험 이야기를 해주는 나에게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4번 이상 말함)

지금의 나라면 "선생님 실례지만 지금 저희가 하는 일이 바빠서요"라고 정중히 말하고 대화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니 가신다면 '안물 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로 응수했겠지. 그때는 어른의 말을 끊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은 1) 우리가 기획하는 행사와 맥락상 어떠한 연관도 없고 2) 그마저도 쓸데없이 너무 길었다. 영혼이 털리고 나니 1시간이 지나있었고, 아저씨는 고마운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이후 3일 동안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다.(지금도 불쾌하다.) 저 아저씨. 우리가 서른이 넘는 직장인이었어도 저랬을까. 그 아저씨는 직감적으로 대학생 2~3학년 정도이던 우리가 '만만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가 너보다 잘났으면! 우리는 누구나 꼰대 짓을 할 유혹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대적 우위의 확인인 동시에 상대에게 각인이며,

경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자기 위안을 얻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인간은 왜 '꼰대짓'을 하는가? 단지 본능탓이라고 하기에는 빈곤한 이유다. 잎서 말했듯꼰대짓은 대체로 자기보다 약하거나 모자라다고 생각되는 이를 향한다. 꼰대짓은 상대적 우위에 대한 확인이며, 상대에게 그것을 각인시키려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꼰대 짓을 하는 이는 경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자기 위안과 본질적이지는 않으나 즉각적인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 앞선 사례에서 아저씨는 자기 위안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기분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나는 그 아저씨가 좀처럼 인정받을 기회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불쌍한 사람이다. 비교와 경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인정받음'은 참 희소한 심리적 자원이다. 때문에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인 우리는 언제나 꼰대가 될 위험에 쳐해 있다. 정녕 꼰대 라벨링의 민주화, 대중화 시대라 할만하다.


개인은 왜 기존 질서와 규칙에 회의하는가(feat. 꼰대)

하지만 꼰대와 싸우는 이는 스스로 꼰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 청소는 왜 애들 시키냐

꼰대는 단순히 <꼰대적 속성™>이 발현된 특정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꼰대란 부당한 기존 질서, 규칙, 문화의 구현자이자 의인화된 존재로 타도해 마땅한 대상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어쩌면 인간은 자율을 좋아하고 개입을 싫어한다.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에 의해 떠밀리듯 삶이 결정되는 것은 경계한다. '고나리질'(관리질), '궁예질'(타인의 상황이나 마음에 대해 마음대로 재단하는 행위)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도 그 증거가 아닐까 한다. 개인의 삶에 대한 개입에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마주하는 시스템은 나름대로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규칙과 질서는 시스템을 건재, 유지, 보전하기 위한 성격이 있다. 또 구성원들이 그 규칙과 질서를 수긍할 때 '모두에게 더 좋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규칙과 질서는 더 잘 준수된다. 덧붙여 문화는 규칙과 질서를 개인이 자연스레 내면화하게 한다.


이제 기존 질서와 규칙에 복종해도

개인에게 보상이 늘어나거나 위험이 감소하지 않는다.

개인들은 기존 질서, 규칙을 회의, 거부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회나 조직이 요구하는 규칙과 질서를 지속적으로 잘 준수했을 때, 각 개인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확실하고 마주할 위험이 감소한다면 각 개인은 그 규칙과 질서의 적극적인 수호자가 될 것이다. 고성장기 대기업에서 회사에 복종하면 개인은 큰 집과 빠른 차, 보다 높은 지위를 기대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다 갔다. 이제 고성장기는 끝났고 사회나 조직은 규칙에 대한 복종 그 자체로 개인에게 괜찮은 보상을 줄 수가 없다.


보상 없는 복종 강요에 개인은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거 정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거야?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질서, 규칙, 문화에 대해 제법 많은 개인들이 적극적인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야근과 업무능률은 상관이 있는 것일까? 회사에 충성하고 더 많은 일을 하면 회사는 나를 지켜줄 것인가?



개인주의자로 성장한 개인들에게 어떤 규칙과 질서는 존재 이유가 도무지 물음표일 때도 있다. 중고교 시절 왜 중앙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벌점을 먹어야 했나? 왜 보충학습이나 야간 자율(형용모순 그 자체의 단어다) 학습을 거부할 수 없었는가.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단지 생물학적 나이가 많은 인간에게 애써 예의를 지킬 이유는 무엇인가? 공정하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많은 개인들이 저마다 생각한다. 기존 규칙, 질서, 문화에 열심히 복종해봐야 남는 것은 '사축'(회사의 노예), '호구' 취급이다. 이러한 생각은 요즘 유행하는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세요"라는 말로 대변된다. 요구되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회사와 조직,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은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자력갱생 독자생존. 개인들은 외친다. 나를 위한 일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


기존 질서와 문화에 회의하는 개인에게

'꼰대'는 기존 질서와 문화의 구현자이자 의인화된 존재로

회피하거나 타도해야 할 대상이다.


게다가 이제 개인에게는 '꼰대' 라벨링이라는 기존 질서에 대한 이념적 대응 무기가 있다. 개인이 느끼기에 필요 이상 역할을 강요, 기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꼰대'로 규정하고 적극적 거부, 수동 공격으로 맞설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해 꼰대란 부당한 기존 질서, 규칙, 문화의 구현자이자 의인화된 존재로 타도해 마땅한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꼰대는 태도에 있다. 많은 경우에서 태도는 본질을 규정한다. 꼰대는 불통과 독단적 태도가 발현된 존재라 여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꼰대라고 명사가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도 <꼰대적 속성™>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꼰대'를 거부하겠다는 생각과 행동에서도  <꼰대적 속성™>은 발현될 위험은 도사린다.



문제는 1) 기존 규칙이나 질서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회의와 거부가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버리고, 2) 자신의 기분을 지키는 수단으로만 '꼰대 라벨링'이 남발될 때다. 분명 부당했던 질서나 규칙도 있겠지만, 어떤 질서나 규칙은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 또 오래되어서 낡은 것도 있지만, 그렇기에 검증된 방법과 기술도 분명히 존재한다. 유용하고 필요하고 공정한 질서, 규칙, 문화와 덧붙여 기술은 학습하는 것이 좋다. 스스로 체득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아는 것보다는 먼저 체득한 이로부터 자연스레 교류하고 배우며 아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


준수되어야 마땅한 것의 전수는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과 다른 대상, 이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을 '꼰대'로 라벨링 하는 것은 거부를 위한 편리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같이 살아갈 운명인 우리 모두에게 큰 손해다. 만약 자신이 꼰대로 치부될 위험이 있다면 몸을 사리지 않겠는가? 알아야 할 것을 알기 어려워진다. 꼰대라는 말이 전가의 보도가 되면 안 된다. 사실은 배우기 싫고 듣기 싫은 말을 차단하는 간편한 수단으로써 '꼰대'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은 아닐까? 배울 때는 배워야 한다.


꼰대와 싸우는 이는 스스로 꼰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공정하며 꼭 필요한 질서, 규칙, 문화, 배움에 대한 거부.

아무 데나 붙이는 '꼰대' 낙인은 스스로를 꼰대와 닮게 한다.


니체의 말을 마음대로 바꾸자면 꼰대와 싸우는 이는 스스로 꼰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꼰대적 문화를 들여다볼 때 꼰대적 문화도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가 꼰대를 잘 아는 만큼 우리도 꼰대를 닮아가기 쉽다. 독단과 불통과 맹목적 거부가 꼰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소통하지 않겠다는 일방 선언과 이해 거부는 우리를 역설적으로 꼰대와 가장 닮게 한다. 혐오하다 보니 혐오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이 꼰대 거부의 역설이다.



꼰대는 진심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

꼰대는 인정 욕구, 대우받고 싶은 마음을 채울 길이 도무지 없다.


우리가 꼰대를 볼 때 꼰대도 우리를 본다. 꼰대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 서운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결과적으로 꼰대와 꼰대를 거부하는 이들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대체로 꼰대들은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가해적'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기에 등가적으로 볼 것은 아니다. 꼰대가 확실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배울 것이 있어도 안 배우고 안 듣고 말겠다고 여기고 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꼰대들은 보통 지위가 있더라도 실력은 없다.


꼰대 증후군은 스스로를 세상과 멀어지고

격리시키고 자신과 주변인들을 괴롭게 하는 아주 무서운 사회적 질병이다

진정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그들은 어찌 보면 정말 가련하다.


꼰대 증후군은 스스로를 세상과 멀어지고 격리시키고 자신과 주변인들을 괴롭게 하는 아주 무서운 사회적 질병이다. 꼰대는 자신이 가진 것에서 지속적으로 우위 요소를 찾고 그것이 가진 별 볼 일 없는 권능을 과장한다. 또 '꼰대질'은 다분히 선택적이다. 꼰대 짓은 대체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거나 어린 대상에 대해 일어난다. 꼰대와의 대화와 관계됨은 불쾌함을 유발한다. 많은 이들이 꼰대를 피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할 수 없으니 꼰대도 꼰대를 피하게 된다. 결국 꼰대는 혼자만 남게 된다.


주변에 남은 이가 얼마 없는 꼰대들은 정말 심각하게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상황과 본질을 객관적으로 마주하기가 진정으로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듣는 말은 사람과 상황의 본질을 피하는 말들 뿐이다. 그런 말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가치가 폄하되지 않는 까닭에. 하지만 그런 대화 속에서 무슨 인간적 존중이 있을까. 꼰대들의 말은 들리는 순간에도 진정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얼마 전 친구와 중식당에서 밥을 먹다 건너편 테이블의 할아저씨와 젊은이 일행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들었다기보다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아무튼 어떤 이유로 그들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저씨는 끊임없이 말을 했고 그 내용은 자기자랑의 일색이었다. 듣는 이들은 기계적인 리액션만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랄까. 홍대 앞 한양중식은 맛있는 식당인데 빨리 먹고 나가고 싶어 질 정도였다. 식당을 나섰다. 문득 혼자만 말하던 할아저씨가 가련해졌다. 그의 일상은 끔찍하게 외로울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좀 더 돌려 의경 시절 촛불 집회 현장의 기억이다. 집회 현장에는 수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대답은 할 수 없다. 들을 수는 있다. "고생이 정말 많으세요!" 혹은 "지금 너네는 편한 줄 알아라." 후자의 발화자들은 당연히 80년대 말 90년대 초 전의경 생활을 했다는 아저씨들이었다. 돌이 안 날아오니 얼마나 다행이냐. 나 때는 돌도 맞고 그랬는데.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짜증이 났다. 어쩌라고. 뭐 아저씨도 고생했겠지만, 그렇다고 7시간 서있던 내가 지금 고생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 애써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들은 외치고 있었다. '나 고생했다고', '인정해달라고.' 아마도 그들은 어디에서도 자기가 한 고생을 보상, 인정받을 길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배들에 인정 투정을 부릴 것이 아니라 나라에 대해 인정 투쟁을 해야 할 일이다. 대꾸받지 못한 채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 같았다. 개인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꼰대가 아니게 될 수 있을까?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재수 없음과 불안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단단한 내면, 스스로를 지위와 상황만으로 규정하지 않는 빈곤하지 않은 나, 개입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지혜. 고수하지 않는 용기... 한 인간으로서 참 괜찮은 객관적 현실 인식과 인격적 성장이 필요하다.


아마도 매일 우리는 제법 많은 꼰대를 마주할 것이다.

꼰대들은 즉각적인 자기 위안과 인정 욕구 충족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있다.


한편 꼰대적 본성을 가진 인간인 나를 마주한다.

꼰대를 혐오하면서도 꼰대와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하지만 그들을 피하기란 쉽지 않고 인간의 꼰대적 본성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으니...





꼰대가 되지 않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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