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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건호 Nov 21. 2021

서울 홍제동 카페 - 아이덴티티커피랩

에스프레소와 La Perruche  앵무새설탕

지도상에서 카페를 검색하여 몇 군데를 미리 봐놓은 다음, 그곳들을 기점으로 동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처음 발길이 닿는 낯선 동네를 둘러보는 일을 좋아했고, 그러던 중 우연히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게 될 때면 하루치 즐거움을 선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홍제동의 골목을 걸었고, 그러다 아이덴티티커피랩이라는 카페 앞에서 발길을 멈추어 잠시 정착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지나쳤던 평점 4.8점의 카페는 손님이 아무도 없고 개인작업실처럼 보이기도 하여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래도 다음에 마주한 이 카페는 준수한 평점에 차분한 인테리어, 그리고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뭔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자리는 만석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냥 나갔을 텐데 낯선 동네이기도 하고 더 나은 카페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곳에 잠시 머물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조그만 간이 벤치가 보였는데, 테이블이 없지만 거기에 앉아 커피를 마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나를 안심시켰다.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요즘 에스프레소병이 든 나는 이곳에서도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아이덴티티커피'랩'이라는 카페 이름 때문에 더욱 에스프레소에 도전해보고 싶어 졌다고 해야 할까. 주문을 하고서는 조금 전에 봐 둔 벤치로 걸어가 잠시 쪼그려 앉았고, 에스프레소가 나올 때쯤 맞춰 소파 한쪽에 혼자 앉을 만한 자리가 생겨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빠르쉐(La Perruche) 앵무새 각설탕과 탄산수. 에스프레소와 함께 딸려온 소재들만 봐도 이곳은 커피에 진심이 카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탄산수를 준 곳은 출근 때에 매일 들르고 있는 경복궁역의 한 에스프레소바가 처음이었는데, 이곳에서도 탄산수를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라빠르쉐(La Perruche) 앵무새 각설탕은 최근에 알게 된 한 바리스타의 유튜브 영상에서였는데, 에스프레소에 딱 맞는 각설탕이라고 소개를 해 언젠가는 한 번 라빠르쉐를 퐁당 에스프레소에 넣어 마셔보고 싶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커피를 건네는 바리스타분께 "어, 이거 앵무새 설탕이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건데"라고 말을 내뱉었다. (사실, '이여니앵츠버어버어...' 혼자 막 흥분해서 얼버무렸던 것 같다. 왜냐면 바리스타분의 눈빛이 조금 당황한 기색이라...) 탄산수와 라빠르쉐 각설탕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역시 오늘 카페 잘 골랐어'라는 생각으로 하루치 즐거움을 만끽했다. 


카페에 왔으니 이제 그림을 그려야지. 

일단 드로잉북과 펜을 무작정 내어놓고, 무엇을 그림으로 담을까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릴만한 대상이 없는지 카페 내부를 눈으로 더듬었고, 이상한 사람처럼 한참 동안 두리번두리번하는 모습을 내보이기가 민망해질 때쯤 느낌이 딱 오는 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소파 끝의 모습과, 의자 위에 올려놓은 화분, 화분에 심어져 있는 식물, 선반 위의 오디오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 있는 테이블은 커피잔을 놓아둘 공간밖에 없는 낮은 테이블이라 다리를 꼬아 무릎과 허벅지 사이에 드로잉북을 올려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쿠라 피그마 마이크론 0.1mm 펜으로 그린 밑그림


현장에서 그리는 그림은 대충 슥슥 그려도 된다는 마음 때문인지 부담이 덜하고 조금 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예쁘게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여느 때나 다를 것 없이 똑같았다. 예쁜 것을 예쁘게 담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그렇게 펜으로 어느 정도 완성하니, 때가 맞게 앞쪽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마카로 채색을 하기에는 내 무르팍이 적당하지 못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고민 중이었는데 타이밍이 좋았다. 직원분께서 자리를 닦자마자 잽싸게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마카를 꺼내어 채색을 하기 시작했다.



채색이 모두 끝났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오갔고, 자리를 두 번 바꾸어 앉았으며, 창 밖으로 해는 뉘엿뉘엿 저물었다. 어느새 2시간이 흘렀고, 조명은 빛을 점점 밝히며 어둑해지는 시간을 알렸다. 할 일도 마쳤으니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해야 할 때였다. 떠나기 전에 현장의 모습과 완성한 그림을 함께 사진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에 카페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으로 담은 공간 근처에는 여전히 카페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피해 사진을 담으려다 보니 잘 담아지지가 않는다. 원래 계획한 것은 드로잉 그림과 그림에 담은 모습이 적당히 잘 어울리게 배치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소심하게 퍼뜩 카메라 셔터 버튼을 누르고, 그림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었다. 실은 이 드로잉 그림을 카페 바리스타분께 보여드리고 '카페가 너무 예쁘고, 커피도 참 맛있었다.'라고 훈훈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거기에 바리스타분이 나의 그림에 감동하는 모습이 포착되면 '쿨'하고 '따뜻'하게 '이거 선물로 드릴게요.'라고 그림을 건네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지만, 소심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빈 에스프레소 잔을 넘겨받은 장발의 남자 바리스타분께서 내게 "커피는 마음에 드셨어요?"라는 물음에, 나는 또다시 "네, 커피 맛있었어요."라고 의도치 않게 간단명료하게 얼버무리며 다시 유리문을 열고 카페 밖으로 길을 나섰다. 


난 정말 커피도 맛있었고, 탄산수와 각설탕에도 감동을 받았었는데 이런 마음을 바리스타분께 제대로 알려드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카페 탐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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