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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직장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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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Nov 16. 2020

내 특별휴가를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

지겨우니까 직장이다


  오늘 뭐 하지? 오늘은 누구나 걸린다는 직장인의 불치병 월요병 발병 예정일이다. 특별휴가를 내는 순간부터 행복 바이러스가 퍼져서는 어젯밤은 잠도 못 잤다. 휴가의 시작은 늦잠인데 다른 날보다 눈이 더 빨리 떠지는 이유는 이것이 치료 가능한 병이었기 때문인가? 아이들의 알람 소리에 몸이 번쩍 뜨였다. 먹기 좋게 마른 박대도 굽고 지난주 사놓았던 돼지고기도 볶았다.  아침에 이런 성찬은 없었다. 이렇게 부지런히 움직이게 될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의 특별휴가는 가족들에게는 비밀이다. ‘나의 휴가를 알리지 말라’가 내 휴가의 철칙이다.


  밖에서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시어머니의 문 두드림은 어느 날부터 리듬이 붙었다. “똑또도독똑” 온종일도 보시는 TV 프로그램이 바뀌었다. 매일 TV조선과 건강프로그램을 보면서 식탁에 앉으면 나도 생소한 정치가의 이름을 올리시거나 온갖 성인병에 뭐가 좋다를 혼자서 독백하시더니 이젠 매일 음악프로그램을 들으신다. 요즘 어르신들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영웅이를 들으시나? 훨씬 듣기도 좋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 좋다.     


“어멈, 오늘 출근 안 해?”

“아니요, 어머니…. 1시간 늦게 출근하는 거예요. 출근합니다!”   


밖에서 누군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다. 남의 편. 남편.     


“어, 출근 안 했어?”

“아니, 출근할 거야. 출근한다고!!”    


아니 이 시간에 또 뭘 두고 가셨나? 집에는 왜와?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남의 편님께서는 내가 가끔 이렇게 휴가를 하루씩 즐긴다는 걸 알고 있다.     


 직장인의 꿀맛은 남들 일할 때 휴가를 즐기는 것이다. 거창하게 멀리 떠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는 시간. 나를 보듬어 주는 시간을 나 혼자 갖는 거다. 이제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순간 사랑을 받으려는 자에서 사랑을 줘야 하는 자로 바뀐다. 주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하다. 그럼 나는 누가 사랑해주나. 내가 많이 사랑해주면 된다.


  나르키소스는 자기애이다. 남자들의 태도가 대체로 이렇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했던 에코는 메아리를 뜻한다. 에코는 절대 자기 소리를 먼저 내지 않는다. 누군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때야 사랑한다고 메아리 한다. 여자들의 태도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누군가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기애에 빠진 남자들은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하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채 메아리가 된다.     


  연말에 회계부서는 지옥이다. 사고 이월된 예산이 있으면 연말 안에 집행해야 하고 명시 이월된 예산은 올해 안에 원인행위(계약)를 해야 한다. 예산 불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사업들은 미루고 미루다 연말이 턱이 차야 실질적 계약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이 당해연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는 시간과의 전쟁이다. 입찰공고는 법정 기한이 있다. 공고 후에는 적격심사를 해야 한다. 이 기간도 7일간의 기간을 주게 되어 있다. 심사가 무사히 끝나면 좋은데 금액이 많을수록 부적격자가 앞순위 낙찰이 될 경우가 많다. 작년 같은 경우는 불용처리를 최소화하라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새벽 1시 2시까지 일을 해야 했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긴축재정을 하다 보니 작년만큼은 아니어도 늘어나는 재정 규모보다 인력은 그대로여서 대동소이 바쁘긴 매일반이다.


  공무원이 무슨 일을 새벽까지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회계공무원은 계약만 하지 않는다. 주말이면 교회에 가야 하고 금요일 밤이면 불타는 금요일이니 가요주점이나 단란주점에 가야 한다. 피시방이나 학원도 간다. 나라에 역병이 도니 마스크를 하고 점검부를 들고 현장으로 가야 한다.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맨 앞줄에 서야 하는 게 공무원이다. (다행히 이런 일은 말로만 들었다) 특별한 재주가 없으니 ‘공무원이나 해야겠다’라던 딸이 어느 날 선언했다. ‘나, 공무원 안 해!’


  비가 많이 오던 여름이었다. 나는 안전총괄업무를 맡고 있었다. 빗물이 안방으로 들어온다는 주민의 전화를 당직자로부터 전해받았다. 시간은 새벽 1시가 되어 갔다. 남편을 데리고 현장으로 갔다. 산 말랭이 마을이었고 도시재생사업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 중 빈집을 철거하고 도시를 재생(?)하는 중이었다. 윗집이 철거되자 그 땅으로 내린 빗물이 아랫집 안방 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방수막이 쳐있는 땅 위에 방수막을 하나 더 치자고 했다. 서둘러 사무실에서 방수막을 가져와 그 위에 덮었다. 방수막을 치고 물길을 하수구가 있는 쪽으로 내니 신기하게 그 집으로 스며들던 빗물이 멈추었다. (남편을 두 번째로 존경하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완전 비 맞은 생쥐가 되었다. 야속한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동이 틀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오니 딸은 우리 몰골을 보고 선언했다.        

“나, 공무원 안 해!”

“공무원은 아무나 시켜주니? 하지 마라 하지 마!”    


 오늘은 특별히 좀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친구 연이가 카페 ‘공감선유’에서 한 달간 다문화가정과 소외계층을 위한 기부 전시회를 하고 있다며 커피 쿠폰을 보내줬다. ‘미술로 상생’ 전이었다. 가는 길에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너무 아름답다. 한눈팔다 앞차랑 키스할 뻔했다.

  아무리 좋은 날도 아무하고 키스하면 곤란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옥구로 향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정말 뭐에 홀린 듯 나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옥구 CC에서 예전 옥구염전 자리까지 갔다. 내가 소싯적 사진 찍는다고 니콘 FM4 수동 카메라를 들고 이곳에 자주 왔었다. 쓰러져가는 나무집들 속에 하얀 소금이 쌓여 있던 곳. 뜨거운 태양 아래 소금이 내리던 곳. 보리를 수확하는 계절이면 도요새들이 잠시 쉬어 가던 곳·(도요새는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겨울을 난 뒤 서해안 갯벌에서 잠시 쉬었다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 가서 번식한다. 그 잠깐의 봄날에 하제포구나 옥구염전에서 쉬어 갔다) 그 하얀 새 때들을 찍자고 물이 차는 시간에 맞춰 막걸리를 들고 이곳에 와 낮게 누워있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책이 내 가방에 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돌고 돌아 공감선유에 도착했다. 오는 길은 멀었지만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다시 겨울로 진입하는 계절 동안 토할 것 같은 업무량에서 잠시 벗어나기에 좋은 시간이다. 이런 꿀맛이 있어 나의 직장도 먼 길 가는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날 쉼을 준다. 특별휴가야. 고맙다. 가족에겐 비밀이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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