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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Jan 21. 2021

이제 헌혈 좀 그만해

      

     회계부서의 애로는 12월이다. 연말을 실감하는 나날들의 연속이다. 우리나라는 회계 독립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재정법 제3조, 지방재정법 제7조 1항에 명시되어 있다. 1년 동안 계약과 지출을 마무리해야 하는 회계공무원에게는 12월은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다. 또 하나의 신기는 영원히 쌓여 있을 것 같던 캐비닛의 서류들이 이날을 기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 경험을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카타르시스’ 확실한 배설감이 있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이런 경이로운 감정은 연초 연휴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이런 감정들은 좀 연장시켜 즐겨야 한다. 회사에서 주는 연말 보너스는 없어도 나 자신을 대견해하며 쓰다듬어줄 시간은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새해 첫날 3일간의 연휴 뒤에 나 홀로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직장인의 기쁨은 동료들이 출근할 때 홀로 쉬는 즐거움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글쓰기를 좀 하려 했다. 내년에는 출간 작가가 될 거라는 야심 찬 포부를 스스로 다짐하며 연말을 버텼으니 연휴 동안 어떻게 집중을 좀 하면 단박에 신박한 이야기들이 줄줄 써내려 질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카타르시스를 느낀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정신은 집중되지 않았다. 집중되지는 않았으나 나는 책상에 앉아 있길 고집했다.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이 역시 1분 1초를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어쩌자고 나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이리 글쓰기에 미혹되었단 말인가? 지천명이라, 하늘의 뜻이 진정 나의 글쓰기인가? 설마 글 한 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야심이 있는 건 아니지? 자신을 다독거리면서도 나오지 않는 글들을 움켜쥐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 허리가 조금씩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글이 나오지 않으면 의자에 앉아 죽으리라는 각오로 몸을 꼬아가며 앉아 있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어머니가 나를 보았다면 ‘그러게 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를 하지’하며 혀를 찼을 일이다.     

  

     사달이 난 것은 출근하고 나서였다. 허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허리의 통증은 허벅지로 이어졌다. 통증의학과 선생님은 디스크 초기라 판정했다. 허리가 어딘지 모르고 살아온 나는 허리가 아프다는 게 신기했다. 신기한 것이 아픔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평생 허리가 아프며 살아온 사람이다. 집안 내력이니 불치병이라 생각하며 허리다루기를 갓난아이 다루듯 하며 산다. 허리 통증이 잦을 뿐 디스크가 있지는 않다는 게 자신의 처방이다. 나에게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났는데 정신이 아니라 몸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천명의 뜻을 다시 새기게 되었다. 하늘의 뜻은 진정 나의 몸 관리인가?    

       나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으니 앉으나 서나 허리를 두들기는 일이었다. 오늘도 퇴근하고 누워있는데 남편이 내 옆에 와서 눕더니     

남편 : 책상 위에 도서상품권 봤어?

나 : 또, 헌혈했어?     

     남편은 헌혈로 적십자사에서 헌혈 금장과 은장을 받은 사람이다. 금장은 헌혈을 50회 이상을 하면 주는 적십자 헌혈 유공훈장이다. 내가 쌍둥이를 낳고 헌혈이 필요할 때도 남편이 받은 헌혈증으로 교환해서 수혈을 받았었고 지금도 지인들이 헌혈증이 필요하다고 하면 아낌없이 헌혈증을 기증한다. 몇 해 전 혈압이 올라갔을 때는 이제 헌혈을 못 하게 되면 어쩌냐는 걱정을 먼저 했다. (다행히 혈압은 일시적이었다)

     그중에서도 헌혈하고 받는 영화관람권이나 도서상품권을 나에게 주는 것을 최애로 여긴다. 연애할 때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혹시 헌혈은 언제 할 생각이냐고 묻기도 하는 철없음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남편은 헌혈 후에 받는 최애 상품으로 도서상품권이나 영화관람권을 꼽는다. 헌혈을 했는데 두 가지가 없는 날에는 실망하여 과자를 들고 오기도 한다.(남편은 과자를 좋아한다) 참고로 남편은 책은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만 읽고 영화관은 약촌오거리 사건을 다룬 ‘재심’을 본 것이 마지막이다. 오직 아내인 나를 위한 선물이다. 그런 남편에게 이제 헌혈 좀 그만해. 라며 퉁소를 줬다. 헌혈하고 나면 좀 피로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허리가 아파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말한다.

     “책 좀 그만 봐. 당신은 운동이 필요하다고” 허리가 좀 나아지면 나는 다시 의자에 앉겠지. 그리고 노트북을 켜겠지. 허리 통증이 오면 나는 다시 눕겠지. 그러다 잠이 들겠지. 글을 쓰지 못해서 괴로운 날들이 내 정신이 아니라 몸에 있는 날은 슬퍼지겠지.     

     남편은 잠이 들고 나는 책상에 앉았다. 책상 앞에 문화상품권 5,000원권이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헌혈을 하겠다는 남편의 의지는 나의 잔소리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에게 글쓰기 대신 운동을 하라는 남편의 말처럼, 서로에게 잔소리뿐인 말이다. 남편은 헌혈을 하고 또 문화상품권이나 영화관람권이 있냐고 묻겠지. 헌혈을 오래 하는 것이 남편의 건강이다. 내가 쓸 수 있는 날이 건강한 날인 것처럼. 이 문화상품권으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상품권을 간직하는 일이 훈장을 간직하는 것보다 의미 있겠다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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