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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Sep 25. 2023

탱자나무와 상사화

2023 강화 여행

8월초 강화에 다녀왔다. 여름 휴가는 7말 8초로 고정인데, 없는 살림에 애쓰고 무리해가며 여행을 계획하지 않는다. 딱 그 때쯤 다른 이들도 휴가인 경우가 많아 어디가나 불판에 구운 듯 맹렬하게 뜨겁고 막히고 비싸며 야박하다. 매번 할랑한 주머니 탓을 하기도 민망해 우리는 제 분수를 지키고 작은것에도 만족하고 즐거움을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위안하며 자주 강화로 떠난다.

 

가까이 있어 사람들이 귀하게 대하지 않아 그렇지 강화는 깊고 넘치고 창연한 곳이다. 고인돌만 해도 그렇다. 한반도에는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분포하고 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강화에 있다. 한 이십년 전에 결혼 1주년 기념으로 강화에 있는 고인돌과 돈대들을 둘러보고 오자고 남편과 계획했다. 우린 신석기와 청동기 그 오랜 세월 고인돌을 쌓고 관리하던 사람들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막상 가보니 그 때는 지금처럼 고인돌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우리는 마치 선산 팔아 먹고 이장하기 위해 인적 끊긴 조상묘 찾아가는 것마냥 부숭한 잡초들을 헤치고 산을 올라야 했다.

 

좀처럼 고인돌은 나타나지 않고 결혼 기념일에 고인돌을 보자고 넘의 집 뒷산을 이렇게 올라가고 있는 것인가 현타가 올 때쯤 살인사건 현장처럼 얼레설레 줄이 사방으로 쳐져 있고 그 안에 커다란 돌덩이들이 널브러져 있는 지형에 도달한다. 조악한 나무판자에 적힌 설명이 없었더라면 이것이 고인돌인지 그저 큰 바위가 쪼개져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땀을 닦으며 찬찬히 쳐다보고 있자니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이제 겨우 돌에서 돌을 떼어내고, 그걸 납작하게 갈아 농기구를 만들 정도의 문명을 이룬 시절에, 이런 산속에 커다란 돌들을 자르고 쪼개고 옮기고 돌위에 돌을 올려놓았다고? 도대체 어떻게 왜? 이 작은 땅 강화에 그 시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커다란 바위를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던 키가 한 5미터쯤 되는 거대한 족속들이 죄를 짓고 이 땅으로 쫒겨 왔음에 틀림없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오래 되어서 기억이 흐릿한데 아마 고천리 고인돌군에 있는 한 기(基)를 보고 온 것이지 싶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 때의 신산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 지금은 주변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관리되고 있다. 몇년 전 부모님을 모시고 간 강화 여행에서 본 부근리 고인돌은 고인돌로서의 완벽한 자태와 중량감을 뽐내고 있었지만 어째 고천리 고인돌에서 본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그 고인돌은 억지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고, 문득 그 외딴 산 속 괸돌도 없이 납작하게 엎드려 수런수런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던 그 돌 무더기들이 그리웠다.


강화 고천리 고인돌
강화 부근리 고인돌


사기리 탱자나무

올해 강화행에서 꼭 보고 싶었던 것은 탱자나무다. 탱자나무는 강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정조는 탱자나무를 아랫지방에서 공수받아 강화도에 옮겨 심도록 했다. 탱자나무는 본래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빽빽한 가시울타리로 외적의 상륙을 막고 진군 속도를 늦출 목적으로 강화에 전략적으로 심어진 것이다. 하지만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라기에 너무 춥다. 의도대로 울창하고 빽빽하게 잘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고, 생활하기에도 걸리적거리고 불편했으니 몰래 제거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 심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갑곶돈대에 있는 것과 사기리 이건창 생가 앞에 있는 한그루 정도이다. 탱자나무를 가까이서 본적이 있는가? 책에서 강화의 탱자나무 이야기를 접할때는 뭔 나무따위를 심어 칼과 창으로 무장한 적들을 막는다고 그러나 싶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단박에 수긍이 된다. 아 막겠구나! 이 나무는 막을 수 있겠어! 확신이 든다. 사기리에 탱자나무는 한 그루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거대한 가시가 빽빽하게 들어찬 무성한 가지들을 보고 있자니 아! 이 길로는 안되겠다 당장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나무가 한 그루도 아니고 해안가에 띠를 형성하며 쭉 늘어서 있다고 생각하면 꽤 괜찮은 방책이었겠다 싶은 것이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인에 대한 유배 + 가택연금형이다. 사방에 울타리를 치고 사람을 가두는 것인데 이 울타리로 쓰이는 것이 바로 탱자나무였다. 400년 된 사기리의 탱자나무를 보니 위리안치형에 왜 이 나무가 애용됐는지 실감하게 된다. 이 나무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정도의 상징적 의미로 심는 나무가 아닌 것이다. 상당한 물리적인 구속력과 절망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나무다. 탱자나무는 보통 남도에 주로 자라기 때문에 중죄인들은 전라도의 외딴 섬에 보내지곤 했다. 바다로도 모자라 탱자나무로도 한겹을 두르다니 잔인하다. 지금에야 향이 좋아 모과처럼 차안이나 방안에 두기도 하고, 차로도 즐긴다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탱자나무를 보게 되면 꺼림칙함에 멀리 돌아갔을 것이다. 조정에 반항한 중죄인들의 사상을 닮은 불온하고 사나운 탱자나무. 지나치게 억세서 외로웠을 그 가시가 문득 안쓰러워 부드럽게 쓰다듬어 본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 위리안치



전등사 상사화

우리가 전등사에 도착한 것은 6시가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관광객들의 들뜬 발걸음이 끊겨 산사는 고요하고, 연분홍색 고운 수련복을 입은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닐 뿐이다. 아이들과 함께 대웅전에 들어가 불전함에 빈약한 정성을 담아놓고는 부처님한테 사심 가득 원대한 소원을 빌며 너울너울 절을 올리고 나왔다. 슬슬 경내를 빠져나오고 있는데 어디서 은근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사물 타종 시간이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법고, 범종, 운판, 목어를 사물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되어 속가로 전해진 것이 사물놀이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되어 황공한 마음으로 걸음을 돌려 네 분의 스님이 연주하는 누각으로 향한다.


법고와 범종의 소리는 특히 거대하고 장엄해 한바탕 세차게 몸을 흔들고 나가 절로 진저리가 났다. 사물 타종이 끝난 후에는 템플스테이 수련객들을 조로록 세워 타종을 하는 체험이 있었는데,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타종을 도와주던 스님이 우리를 부른다. 손사래로 마다해도 안사도 돼요 편하게 둘러보세요 하는 모드로 자꾸만 권하시길래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스님과 함께 타종을 한 후 눈을 감고 양손으로 범종을 감싸 그 울림을 한동안 느껴보았다. 아! 왜 범종의 소리를 두고 천년의 소리라고 하는지 알겠다. 공기중에 떠도는 살아있는 모든 소리를 한데 뭉쳐 끈끈하게 닳인 것을 증류시켜 천천히 오랜 시간 한방울 한방울 모은다면 이런 소리가 나겠지 싶다. 하마터면 삭발하고 부처님께 귀의할 뻔 했다. 전등사 스님들은 법력이 높아 영업도 잘하신다. 오래된 고아한 절에 사물 타종 시간과 겹쳐 머무르게 되면 주의할 것. 개종의 위험이 있다.   

  

절을 나서는 길에 유독 상사화(相思花)가 많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방문했던 절에 상사화나 상사화와 형태가 비슷한 꽃무릇이 많이 피어 있었던 것 같다.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나는데 그 잎이 모두 다 진 다음에야 꽃이 핀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애절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보면 스님하고 여염집 부인이 사랑에 빠져 그리움에 사무쳐 죽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한보따리 나오는 꽃이다. 불경한 속설은 그렇다치고 화려하고 송이가 큰 상사화가 금욕과 고행을 상징하는 절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이야기가 있을까 자료를 뒤져보니 다 이유가 있다. 불당에는 탱화나 단청이 많이 올라가는데 상사화나 꽃무릇의 뿌리에는 방부효과가 있어 물감에 개어 쓰게 되면 좀도 안슬고 색도 바래지 않아 예전부터 사찰에 상사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다. 오호~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커다란 꽃송이를 못내 이기지 못하는 기다란 모가지를 하고 위태롭게 휘청이는 상사화가 어딘가 기괴하다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대단한 쓸모가 있었다니 몰라준 마음이 미안하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이번 강화 여행의 키워드는 탱자나무와 상사화로 하기로 하자.



전등사 사물타종



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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