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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Sep 18. 2023

그러니까 클러치 기어 엑셀 출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오토라는 남자>

유시민씨는 언젠가 방송에서 3T 이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도시가 번성하려면 3T가 필요한데, 기술(Technology), 재능(Talent), 포용(Tolerance)이 그것이다. 미국의 첨단 산업 도시 10개를 꼽았을 때, 그중 6개가 동성애자 거주 비율이 높은 도시와 일치했다. 이것이 이른바 3T 이론을 뒷받침하는 게이 지수(Gay Index)이다. 게이지수는 포용성의 지표가 된다. 동성애자는 제일 마지막까지 차별을 받는 소수집단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등  저마다의 다양성을 지닌 재능(Talent)있는 사람들이 네트워크(Technology)를 통해 어느 동네가 자신과 같은 소수자도 살기 좋은 포용성(Tolenrence)을 가졌는지 정보를 공유하고 모여들어 도시가 번성하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가 오늘날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IT산업의 중심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한 강연에서 인류 문명이 시작된 첫 증거를 묻는 질문에,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찾은 1만 5천년 된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이라고 답했다. 대퇴골은 신체 하중 전부를 고스란히 받는 뼈로 이것이 부러지면 절대로 걷거나 설 수 없다.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은 그대로 두면 맹수의 먹잇감이 되는 동료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곁을 지키고 상처를 살피고 먹을것을 나누어 주어 그가 치유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치유의 흔적은 경쟁적이고 야만적인 사회의 유해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런 곳에는 화살에 의해 뚫린 관자놀이, 몽둥이에 의해 부서진 두개골등 폭력과 야만의 증거가 가득했다고 부연했다. 다정함으로 인류는 문명을 시작한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최소 4종 이상의 다른 사람 종과 공존했음이 밝혀졌다. 이들 가운데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큰 뇌, 또는 더 큰 키와 근육을 가진 종도 있었다. 이들이 진화의 최종 우승자가 될것이 유력했음에도 다른 사촌 종들은 결국 멸종했고 호모 사피엔스만 홀로 남아 번성했다. 인류학자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유중 하나로 호모 사피엔스의 초강력 인지능력을 꼽았다. 바로 친화력이다.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을 읽어내고 협력하는 의사소통 능력, 곧 다정함을 갖추지 못한 다른 종들은 도태되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본질은 다정함이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얼마전 다정함으로 가득한 영화를 봤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오토라는 남자>다. 오토는 까탈스럽고 편견이 가득하며 막말로 무장한 결코 다정하지 않은 노인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얼마전 세상을 떠나자 생의 의미를 잃고 뒤따라 가려한다.


하지만 죽으려고만 하면 자꾸만 일이 생겨 방해받는다. 살기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는데 죽는것도 힘든건 마찬가지다. 아내는 강퍅한 자신을 보듬고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다정함이 워낙 풍부했기 때문에 오토는 그다지 다정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올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내곁으로 빨리 가고 싶어 애가 닳았는데, 옆집에 이사온 멕시코 여자 마리솔은 막무가내로 그의 집에 저벅저벅 들어와 그의 자살을 방해하고 그의 성격을 지적질하고 조용한 그의 일상을 시끄럽게 한다. 마리솔의 남편은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뭘 제대로 하는것이 없다. 손이 많이 가는 인간들이다.


하지만 마리솔을 만난 계기로 오토는 다정함을 배운다. 그는 자신이 여태껏 혼자 꼿꼿히 알아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웃들의 다정한 침묵과 배려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한다. 늦게 배운 도둑질처럼 오토는 다정함에 스며들고 다정함을 배운다. 그리하여 그의 작은 마을은 이민자도 장애인도 트랜스젠더도 노인도 아이도 길고양이도 같이 살아가는 관대하고 따뜻한 공간이 된다.


톰행크스 주연 <오토라는 남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마리솔은 다리를 다친 남편을 대신해 오토에게 운전 연수를 부탁한다. 자동변속차량밖에 운전하지 못하는 마리솔은 클러치가 있는 오토의 차에 적응을 못해 출발조차 제대로 못하고 당황스러워 한다. 경적을 울려대는 뒷차 운전자에게 한바탕 소리를 질러댄 후 숨을 가다듬고 오토는 마리솔에게 말한다.

"이제 잘 들어. 자넨 애를 둘이나 낳았고 이제 곧 셋이 돼. 그리고 이 먼나라까지 왔어. 낯선 말을 배웠고 학교도 다녔고 반푼이 남편 데리고 자네 가족을 잘 건사하고 있어. 운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세상은 꽉 막힌 머저리들로 가득하지만 자넨 꽉 막힌 머저리가 아니야. 그러니까 클러치 기어 엑셀 출발"

오토의 난폭한 위로에 왠지 마음이 채워진 마리솔은 코를 한번 훌쩍이고 눈물을 살짝 찍어내고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킨다.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언젠가부터였는지 알수 없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뭔가 잘못되어 있고 절망의 반죽이 된 채 가라앉고 있다. 그러다 엉뚱하고 다정한 기연(奇緣)을 만나 패스트리처럼 부풀어 올라 한결 한결 결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바닥까지 가라앉았지만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떠오르고 싶다. 일어서고 싶다. 오토의 주문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클러치 기어 엑셀 출발.


               

p.s. 노색(老色)이 가득한 톰 행크스를 보는 것이 서글프다. 하지만 젊어 박제가 된 장국영보다 그의 영화팬들과 같이 늙어가는 톰 행크스는 얼마나 다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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