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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Sep 10. 2023

오펜하이머와 노르망디의 나치군복을 입은 조선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생각이 난 한 장의 사진

노르망디의의 나치 군복을 입은 조선인 병사


위 사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복을 입은 한 동양인 병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심문을 받는 장면이다. 노르망디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라는 육군 중위는 어느 나라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심문에 어려움을 겪던 포로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한국인이었다. 위 사진에 찍힌 병사말고도 한국인 포로가 몇 명 더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조선인이 노르망디 해변에서 나치의 군복을 입고 연합군에게 잡히게 됐을까. 사진속 저 왜소한 병사가 본인의 입으로 그 경위를 밝힌 것이 기록에는 없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생겨났고 소설과 영화로 그 상상력이 확대되었다.

(이 사진은 2005년 SBS 스페셜 다큐 - '노르망디의 코리언'에서 소개되었다. 사진에 영감을 받아 영화 <마이웨이>, 소설로는 장웅진 작가 <노르망디의 조선인>, 이재익 작가의 <아버지의 길>, 조정래 작가 <사람의 탈>등이 탄생되었다.)
 
사진속의 저 병사는 본래 조선땅에 태어났다. 일제에 의해 관동군에 징집되었고, 소련과의 전투에서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다른 한 쪽 전선에서는 독일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부족한 병력을 포로중에서 충원해야했다. 이번에는 소련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참가한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연합국에 의해 전방위로 압박받고 있었던 독일은 소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포로들에게 군복을 입혀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세우게 되고 사진 속 저 이름 모를 병사는 결국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꽤 그럴듯하지만, 이 이야기는 추측이다. 그가 실제 어떠한 경위와 경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다른 한 끝으로 옮겨져 이토록 초췌하고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그 곳에 이르게 되었나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의 시선이 떨어진 곳에 그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참혹한 전쟁이 끝났으니 조선땅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일말의 희망을 틔우고 있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전쟁으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자포자기로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을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외부의 거대한 영향력이 나약하고 무력(無力)한 인간을 어디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비극적인 상징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나는 저 앳된 병사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오펜하이머의 얼굴에서도 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 개발의 마지막 실험인 '트리니티'의 성공으로 떠들석한 속에서 그는 공허하고 당혹스런 표정을 하고 있다.  켤수는 있지만 결코 끌 수 없는 지옥의 불을 켠 사람. 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결국은 온 세상을 다 불태워 버릴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 일을 시작한 것은 명성에 대한 욕구든 정의실현이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멈추지 못하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억지로 올려져 어릿광대처럼 위태하게 달리고 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광기와 거대한 폭력은 저기 저 머나먼 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궁금했던 한 물리학자나 반도의 한 어린 소년을 파괴하고 원래 있고자 하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몰고간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여 매일 새로 돋아나는 간을 독수리에게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그는 절대신에게 반항하고 저항하고 인간을 사랑했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불로 인간은 사나운 짐승을 쫒아내고 음식을 익혀먹고 뇌를 키워 문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에게 감사하고 그를 경배했다. 영원한 천형을 고독하게 감내할 만큼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이었다.      


오펜하이머의 별칭은 원자폭탄 개발 이후 프로메테우스가 된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그에게 이 별칭이 합당한가. 더 많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더 적은 죽음을 선택한 것에 죄책감을 안고, 매카시즘에 의해 영광을 빼앗기고 생을 마감한 그는 그 별칭이 자신과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결코 인류가 원하지 않는 불을 안겨주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가 결코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고, 알량한 참회나 후회로 일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할수만 있다면 영원히 살아 새로 돋아나는 간이 쪼이는 고통을 기꺼히 감내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어서 영원히 살수도 용서받지도 못한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손에 피를 잔뜩 묻힌 채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자의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눈빛은 노르망디의 조선인 병사의 눈빛과 어딘가 닮아있다.       




p.s. 언제나 논란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 이름마저 크리스토퍼 놀란인 이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러 갈 분들을 위한 팁. 화장실을 반드시 들르고 영화를 볼것. 커다란 컵에 커피를 가득 담아오지 말것. 영화는 엔딩크레딧까지 포함하여 3시간을 훌쩍 넘긴다. 영화보다가 방아깨비처럼 몸을 움직이며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들로 시야가 가려져 짜증나 하는 말이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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