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먼 산에 뜬 달 Sep 05. 2023

맥주예찬

카스테라보다 Cass Terra를 더 좋아하는 이야기


내 고향은 서해안에 있는 지금은 제법 유명해진 섬인데, 어린 시절 멀리 사는 친척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엄마는 언니에게 양은주전자를 들려 옆동네인 딴뚝으로 막걸리를 받아오게 했다. 길어지는 술자리에 받아온 술이 모자라 언니는 몇 번이나 술도가를 오고 가기도 했다. 언니가 받아온 술은 어째 양이 부족해 엄마에게 타박을 들었는데 언니는 주전자가 무거워 몸에 닿을때마다 출렁이며 쏟아지는걸 어떻게 하냐며 항변했다. 한번은 언니와 함께 술심부름을 한적이 있는데, 부족한 막걸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언니는 양은주전자 뚜껑에 미리 설탕을 담아왔고, 술을 받아 돌아올땐 뚜껑에 술을 조금씩 부어가며 홀짝이고 왔던 것이다. 나한테도 찰랑하게 막걸리를 따라 권했고 설탕이 녹아 있음에도 술은 시큼하고 텁텁했다. 그날의 주전자는 유독 비어있어 엄마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샀지 싶다.    
  

그만저만 대부분이 평등하게 가난하고 조용한 그 섬을 떠나 부박한 도시로 올라온 후 아버지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는데, 대개 그런 종류의 일들은 해걸음 전에 끝나기 마련이어서 아버지는 같이 일하는 누군가와 초저녁부터 술을 들이켜 피로를 씻으려 했다. 한밤중에 아버지가 술을 같이 먹던 사람을 기어이 집으로 데리고 왔던 날이 몇번인가 있었다. 불콰한 낯의 불청객과 비틀거리는 아버지가 엄마의 눈에 고울리 없다. 아버지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술상을 내올 것을 요구하고, 엄마는 아버지에게만 보이는 각도에서 눈을 흘기고 사나운 말을 복화술로 내뱉으며 그 밤에 술을 사러 나간다. 이리 나와 봐라 어허 예의바르게 인사드려야지!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면 손님은 뒷주머니에서 구깃하고 지저분한 돈을 촛점이 안 맞는 눈으로 한참을 걸려 몇 장 꺼내준다.

다음날이 되어 나와 보면 술상은 김치등의 안주가 밤새 쉬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맥주병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다. 손님은 가고 없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인사불성이 되어 일도 못나가고 잠들어 있고,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차곡차곡 홧병을 키운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반쯤 남은 맥주가 풍기는 그 퀴퀴하고 지릿한 냄새. 이렇게 고약한 오줌 냄새를 풍기는 술이라니. 이것을 목에 쏟아 붓고 붉은 얼굴이 되어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절대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며, 마시더라도 오줌냄새나는 맥주만은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어째 다짐의 결기가 좀 약했던 모양이다. 그 다짐은 지켜지지 못하고 자주 배반당하고 있다. 맥주를 혐오하던 그 작은 소녀는 자라서 병따개를 옆에 두고도 굳이 숟가락으로 맥주 뚜껑을 뻥뻥 따는 아줌마가 되었다. 더운 여름날 차갑게 식힌 맥주의 그 짜릿하고도 구수한 맛을 좋아한다. 아마 아버지도 이 맛을 좋아하셨겠지. 나는 주로 혼자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 혼자 마시는 술은 장려할 만한 것은 못된다.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것이다. 아이 둘을 키우고 일도 해야 하고 이런저런 핑계가 많으니 친구 만나는 것이 여의치 않다. 남편은 술을 즐기지 않는다. 소주는 세 잔, 맥주는 작은 캔 하나로도 온몸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얼른 드루누워 자야 한다. 술 한잔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나에겐 다른 선물이 있으니 그것이 그리 서운한 일은 아니다. 하루의 잡다한 일들이 끝나고 아이들과 남편까지 재우고 나면 사위(四圍)가 조용해지는데 그럴 때 영화와 맥주는 끝내주는 조합이다. 밤은 깊어가고 맥주는 영화라는 효소를 만나 더 깊게 발효된다.


서양문명에서 맥주는 야만과 가난을 상징하는 천대받는 술이었다. 와인은 신이 만든 술로 신에게 바쳐지는 의식에 쓰이며 고귀함과 신성을 의미하는 술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며 시와 음악을 즐겼고, 가난한 사람들은 선술집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랬다. 맥주는 며칠이 안되어 만들어지지만, 와인은 오랜 시간과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쉽게 만들어지고 흔한 것은 귀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법이다.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보리로 만든 맥주나 마시는 족속'이라며 맥주를 즐겨마시던 이집트 사람들을 비웃었다. 로마의 황제 율리아누스는 맥주를 '보리죽'이라고 경멸하며 와인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 이쯤 되면 맥주가 불쌍할 지경이다. 내 식구 누가 욕하는 것 같아서 분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고대로부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위무해왔던것은 맥주임에 분명하다. 맥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소녀의 다짐은 스러졌고, 맥주를 지속적으로 소비함으로써 고대로부터 무시당했던 맥주에 대해 의리와 신의를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남편은 맥주에 대한 의리가 없고 빵이나 떡, 아이스크림에 의리를 가지고 있다. 남편이 저런 단 음식을 너무 즐겨 나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그는 내가 맥주를 너무 좋아한다며 나의 건강을 걱정한다. 남편이 빵이나 떡을 사달라고 하면 나는 맥주도 같이 사겠다고 협박을 한다. 우리는 삐친 척 실망한 척 서로 공평하게 빵과 맥주를 포기한다. 이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인가 즐거움을 빼앗아 벌주는 것인가. 하지만 빵이나 맥주나 다 밀이나 보리로 만든 것이니 우리에겐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믿고 싶다. 서로 적당히 빵과 맥주를 허락하며 살기로 하자.

작가의 이전글 소나기 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