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겁니다.
어느 아침, 매일 진료 전에 하는 짧은 회의를 끝내고 나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중 한 명이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냅니다.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선생님, 앉으세요."
태연하게 말하지만 이미 제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릅니다. 보통 면담을 신청하는 이유가 유쾌하고 즐거운 일인 경우는 드물거든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일이 힘드신가?! 샘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나? 내가 모르는 사고가 있었던 건 아닌가. 혹시.. 그만두시려는 걸까!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다음 말을 기다립니다.
"샘,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마침내 마주 앉은 그와 저 사이에 아주 짧은 정적이 흐르는 찰나, 이 작은 사업장에서 처음으로 대표라는 자리에 서게 된 제게 이보다 더한 스릴과 서스펜스가 교차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영업을 시작하면서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입니다.
이제까지 꽤 오래 직장생활을 했지만 막상 대표가 되고 보니 상황이 달라진 겁니다. 친근하게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고,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보면 이 구멍가게만 한 조직에서 무슨 내외인가 싶고,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먼 속없는 허허실실이 실체인데, 자리가 자리인만큼 칼처럼 냉정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다가섰다 멀어지는 썸처럼 이 관계 속에서 꽤 오래 갈팡질팡 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모든 직원들과 매일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워크숍이라는 명목으로 1박 2일 엠티를 가거나 개원 기념일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축하 회식을 하기도 했지요. 처음으로 모셨던 치료실과 데스크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첫 부원장과도 언니동생처럼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쁜 경험이 없었기에 좋은 면만 볼 수 있었던, 어찌 보면 행복했던 시기였지요.
회사에 다닐 때 회식을 싫어했던 저는 모임에 참여하기 싫은 직원이 있을까 봐 늘 살피곤 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걱정을 사서 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가기 싫으면 싫다고 하겠지!") 그는 오히려 시간이 날 때마다 직원과 일대일로 만나 한의원의 비전과 사업 계획에 대해 수시로 공유했습니다. 저에게도 종종 어떤 직원과 앞으로 어떤 일을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기대가 컸고 애정이 있었던 거였겠지만 저는 또 속으로 생각하곤 했지요. '나라면 좀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함께 일한 동료들과의 심리적인 거리가 그만큼 가까웠던 시절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만두겠다고 말했던 직원과의 면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가 뭘 잘못했냐고, 불만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설득하고 달래고 애원하기까지 했던 면담 끝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지요. 그 후로도 하나둘, 오래 함께 일할 거라 믿었던 직원들이 차례로 그만두었습니다. 모두가 내 마음 같지는 않아서 뜻밖의 일로 속을 썩인 직원도 있었고 무책임하게 사라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일로 만난 사이에 뭘 더 바란 거냐' 싶지만 관계를 끊는 것에 서툰 초보 사장의 마음고생은 꽤 길었습니다.
그래도 애초에 개인주의자인 저는 직원들과 제 사이에 놓이는 거리감을 빠르게 받아들였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 직원의 마음도 백 프로 이해합니다. 근무시간이 끝난 뒤 혹은 근무일이 아닌데도 회식에 참여하기 위해 불려나오는 게 싫은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기꺼이 오는 사람이 더 신기하다!). 그저 현장에서 각자의 맡은 바 일만 잘하면 되는 거죠.
그러나 남편은 달랐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직원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프로젝트를 시도하거나 TFT를 꾸리기도 했습니다. 기대하고 또 실망하기를 반복하고 일을 주고 결과에 대해 가차 없이 평가해서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남편은 결국 더 좋은 근무 환경을 만들어 더 좋은 인력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양입니다.
한창 코로나로 상황이 악화되던 시기에 직원 모두의 연봉을 올려주자는 말을 했을 때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최근에는 월급에 큰 조정 없이 모두의 근무 시간을 더 줄이는 방향으로 스케줄을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주 4일 근무가 대부분인 저희 한의원에는 이제 주 3일 근무인 선생님들도 꽤 많습니다.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고용시장에서 시대를 앞서간다고 말하곤 합니다.
지금은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열 명이 넘습니다. 그중에는 중간관리자 격인 실장님도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직원들이 제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는 경우는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 '드릴 말씀이 있다'라고 말을 꺼내면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아직도 긴장이 올라오는 건 여전합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진료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도 있지요.
요즘은 제가 고민을 채 묵히고 키우기도 전에 남편이 벌써 대안을 찾아서 들고 옵니다. 성질이 급해서 저에게도 빠른 답을 내놓으라 독촉을 하긴 하지만 필요하면 선생님들과의 면담도 직접 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누구에게든 예전처럼 날카롭게 말하지 않고 부드럽게 우회하는 화법도 많이 늘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평소 저는 샘들에게 늘 다정하고 잔소리도 많지 않은 대표원장입니다. 사실 바빠서 말할 기회가 적고 기대가 없어서 화날 일도 없는 냉정하고 건조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오히려 여전히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고 더 기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남편이야말로 샘들에 대한 애정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직원들이 우리 둘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남편은 (말로는) 자기는 악역이라도 상관없다고 하니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