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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틸 라이프 May 04. 2019

콜드워

<콜드 워>는 민요를 채집하는 빅토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슬라브계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 이 씨퀀스는 보편적 영화 예술에 지역성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에 집시의 시간을 담은 에밀 쿠스트리차나 청아한 음색의 베로니카를 클로즈업한 키에슬로프스키의 흔적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헐리우드권 영화에 관객이 갖는 흔한 착시다.

 합일된 남녀를 흑과 백으로 표현한 영화 포스터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도취된 듯 충만한 표정은 이들이 운명적 사랑에 빠졌음을 암시하며 얼굴과 손의 형태만 남긴 구도는 전혀 다른 색채를 사용한 클림트의 키스와 유사하다. 주위가 소거되고 남녀는 스스로 이룩한 세계의 황홀경을 탐닉한다.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금빛 이탤릭체 C는 알파벳 COLD의 머리글자를 형상화한 듯하다. 아마 이 사랑은 차가운 시대가 족쇄가 되어 투쟁하게 되리라는 안타까운 예감이 이미지에 드러난다.
<콜드 워>는 오직 사랑을 감각으로 형상화한 고전적 사랑연대기이다. 불멸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영화는 과거로 날아가 개인의 자유와 예술이 구속받는 공산주의 폴란드를 무대로 한다. 시간이 점프할 때 화면에는 그해의 숫자와 장소가 표기된다. 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그 인장(印章)은 비련의 책임이 역사에 있음을 믿게 하는 힘을 지녔다. 만남과 이별의 순간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실망과 가치관보다 시대의 탓이 가장 컸을까. 정언(定言) 같은 단단한 제목이 누르는 무게는 관객의 시선 확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영화는 함께 못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의 균열과 불행을 다룬다. 스토리는 간결하고 주변부 인물의 서사는 생략이 많다. 그들의 감정선 외에 주위의 상처와 파장 같은 것은 깊게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지의 감각적 효과를 강조하고 싶은 감독의 선택으로 보인다. 흑백의 색조와 영화를 관통하는 음악은 시대와 불화하고 무너지는 그들의 시간과 사랑을 상징한다. 과거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흑백화면은 시대가 주는 억압과 사랑의 낭만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와 시대의 선택은 빅토르와 줄라를 괴롭히는 서사 동인(動因)을 얻기 위한 도구로써의 혐의도 짙다. 무력한 개인의 사랑은 역사와 투쟁할 때 더욱 비극성을 획득하고 변심의 책임은 외면되거나 약해진다. 멜로가 역사와 만날 때 시대와 공간은 운명과 대결하는 불가항력적 조연으로 상투적으로 소비된다. 특히, 파리에서의 재회와 이별은 예술가의 욕망에서 오는 갈등과 맹목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에 기인함이 크다. 고향에서 민속 의상을 입고 마주르카를 추던 줄라는 도시로 와 화려한 드레스에 프랑스어로 노래한다. 하지만 자신의 언어를 버린 노래와 포장된 쇼 비즈니스에 공허함을 느끼며, 카페 레클립스에서 재즈를 연주하는 빅토르가 변한 것처럼 보인다.

<콜드 워>는 심장에 와닿는 노래가 정교하게 재단된 음악영화다. 두 음악가의 이야기를 시각과 청각으로 세심하게 마름질하고 심리에 따른 변주를 매력적으로 활용한다. 줄라 마음의 행로를 묘사한 주제가 ‘심장’은 그녀의 삶과 공간이 이동할 때마다 색깔이 달라진다. 부분 서사가 생략된 영화에서 가사는 인물의 드러나지 않은 내면을 대변하고 현실과 감응하게 만든다. 처음 시골 소녀가 소박한 민요로 부르던 ‘심장’은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혁명 음악을 거쳐 사랑의 갈등이 일어난 파리에선 슬픈 재즈로 변용된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인 빅토르의 음악은 쇼팽이거나 바흐를 사용해 장르를 구분하고 이들의 삶과 사랑이 자유롭지 못함을 음악으로 은유한다. 빅토르는 수용소에서 손가락을 잃고 그의 석방을 위해 맘보를 불러야 했던 룰라는 거짓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구토한다.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예술가는 스스로 삶의 마감을 택한다.

영화에는 스토리 라인과 무관한 이질적 쇼트가 두 번 나온다. 극 초반과 말미, 인적이 드문 폐허가 등장하는 씬이다. 그곳은 연인이 결혼식을 올리는 성당이다. 카메라는 성당에서 바라본 둥그런 하늘과 낡은 벽화에 남겨진 남자의 두 눈을 연이어 보여준다. (눈-하늘, 하늘-눈) 이 쇼트는 종교를 가진 줄라의 처음과 끝을 지켜보는 신의 시점으로 해석된다. 연인의 첫 만남 전에도 역순으로 등장하는 이 두 컷은 둘의 사랑이 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의 비극이 신화로 봉인되는 순간이다.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이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흘리네
두 사람이 함게 할 수 없으니까

줄라의 노래는 예언이 되고 흑백 프레임에 차갑게 담긴 그녀의 사랑은 영화가 끝나도 여진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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