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on Roa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지 Apr 20. 2020

바이런 베이 둘째 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루벤과 닉. 브리즈번에서 왔는데 도시랑은 다른 분위기를 느끼러 둘이서 며칠 잠깐 놀러 왔단다. 대학 때 내 전공이 특수교육이라 하니 루벤은 자기 아빠도 특수교사였다가 지금은 음악치료를 하신다고 반가워했고, 그다음엔 자기가 아는 특이한 행성들에 대해서 줄줄이 얘기를 늘어놓더니 결국 펍이 문을 닫을 때야 끝이 났다. 그보단 리나의 얘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리나는 다음날 일찍 시드니로 돌아가야 해서 그녀와도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야 했다.

 펍이 3시 전후로 문을 닫을 줄 알고 그때까지 펍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새벽 일찍 등대에 가보려 했던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히피 플레이스인데 12시에 문을 닫을 줄이야.
 고작 몇 시간 때문에 지금 호스텔에 하루를 더 묵기가 왠지 아까웠다. 와이파이가 무료인 은행 앞에서 핸드폰을 보면서 어떡할지 생각하고 있던 중에, 내 앞을 지나가던 리바이라는 내 또래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리바이도 바이런 베이에 오늘 도착했는데 잠깐 여행 온 나와는 달리 아예 여기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쭉 살려고 왔단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내가 앞으로 일하게 될 섬 바로 옆에 있는 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에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리바이도 나처럼 새벽 일찍 등대를 보러 갔다가 아침에 호스텔을 알아볼 예정이래서 리바이의 제안으로 즉흥적으로 같이 바닷가로 갔다. 타월을 깔고 앉아 새벽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리바이는 마약에 중독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불안장애가 심해져서 지금은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아직 완전히 정상적인 생활은 어려워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활한 지 몇 달째라고. 지금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3일마다 얼마씩 계좌로 돈이 들어오는데 그래도 기본 숙식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정도여서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섬에서 아빠가 하시는 페인트 일을 도와 같이 하면서 돈을 벌 수는 있지만 아빠와 갈등이 너무 심해져서 마지못해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인 이곳에 처음 온 거라고 했다. 그럼 여기선 무슨 일을 구할 거냐 물었더니 그냥 아무거나 되는대로 구하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여기 일하러 온 사람들 대부분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아니면 생각 없이 놀러 왔다가 마음에 들어서 갑작스럽게 눌러앉겠다는 사람들도 꽤 많은 듯.

 호주에 온 지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왜 이렇게 다들 사연이 많고 복잡할까. 유럽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여기서도 별반 다르지가 않은걸 보면 정말 인생살이라는 게 평범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왔으나 지금은 왜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이라고들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도 된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리바이랑 같이 뛰었다. 스쿨리 행사로 인한 임시 천막이 있어서 그나마 거기서 비를 피했다. 지난번 골드코스트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비가 올 것 같은 낌새조차 없다가 갑자기 봉변을 당했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 잠깐 내리다 그쳐서 그나마 다행.

 아직 캄캄하지만 등대에서 일출을 보고 싶어서 리바이랑 같이 걷기 시작했다. 금방 도착할 줄 알았지만 거의 쉬지 않고 걸었음에도 45분이나 걸렸다. 울창히 둘러싸인 나무들이 간밤에 살짝 내린 빗방울에 젖은 덕에 가는 길 내내 상쾌한 내음이 코끝에 퍼졌다. 가까이에서 본 새하얀 등대는 저 멀리 타운에서 바라본 것보다 더 예뻤다. 보기와는 다르게 지어진지 117년이나 되었단다. 리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리나는 언제쯤 여길 다시 오게 될까 궁금해졌다.
 길 중간에 보인 커피차. 나랑 리바이랑 각각 한잔씩 사들고 바닷가가 바로 앞에 보는 곳에 앉았다. 눈에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 덕에 커피가 더 맛있다. 단체로 체험학습을 온듯한 귀여운 초등학생들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등대를 보겠다는 목적도 달성했으니 이제 호스텔에 체크인할 차례. 브리즈번에서 묵었던 체인 호스텔인 Nomad가 여기도 있길래 그냥 묵으려 했는데 리바이는 안된단다. 왜냐고 물었더니 브리즈번에서 노마드에 묵은 적 있는데 방 안에서 흡연을 하다가 전국 노마드 블랙리스트에 올라서란다. 에휴, 한숨부터 나온다. 리바이는 다른 호스텔을 찾아 떠나고 나는 남았는데 체크인 시간이 12시래서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서 자꾸 눈이 감기는데 두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하지만 자기가 찾은 YHA 호스텔은 곧바로 체크인 가능하다고 리바이로부터 연락이 온 바람에 그리로 바로 옮겼다. 거기서 수영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수영장과 주변에 둘러싸인 울창한 야자수 나무들을 보니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리바이랑 다른 내방엔 아르헨티나에서 워킹홀리데이를 온 여자 3명이 같이 묵고 있었는데 리바이처럼 바이런 베이에 살면서 일하고 싶어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간밤을 샜으니 일단 잠부터 자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잠깐 눈만 붙이는 정도로. 깨고 나선 한 바퀴를 쭉 걷다가 한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지나갈 때마다 다른 뮤지션들의 버스킹 공연이 보였던 곳인데 인기가 많아서 늘 자리가 꽉 차 있지만 이번엔 딱 한자리가, 그것도 좋은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앉아버렸다. 일단 앉고 나서 메뉴판을 펼쳐보니 예상은 했지만 가격대가 비싼 편. 아무래도 자릿세 탓이 큰 것 같지만 그래도 식사하면서 여유롭고 느긋하게 버스킹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좋다.
 바닷가 근처일 때면 왠지 늘 피시 앤 칩스를 먹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민하지 않고 그 메뉴를 시켰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대학 동기 두 명과 졸업 전 아일랜드&아이슬란드에 놀러 갔을 때 아일랜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사 먹은 테이크아웃 피시 앤 칩스가 훨씬 맛있었어서 동기에게 얘기하니 그때는 춥고 배고플 때 먹어서 그렇다고 내게 일침을 날렸다.
 
 나보다 더 잠을 오래 자다가 늦게 일어난 리바이와 다시 만나 아직 안 가본 반대편 바닷가에서 노을이 질 때까지 편하게 쉬다가 근처 주류샵에서 7달러짜리 와인 한 병을 사다가 호스텔 맞은편 공원에 앉아 나눠마셨다. 어둑해진 하늘에 뭐가 막 날아다니길래 저건 뭐냐고 했더니 박쥐라고 해서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진짜로 박쥐 열댓 마리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동물원이나 가야지 볼 수 있는 박쥐를 여기선 너무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리바이는 파티를 간다 했고 나는 혼자 버스킹 구경하며 잠깐 산책만 하다가 호스텔로 돌아갔다. 호스텔답게 여러 사람들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게 신경 쓰일 새도 없이 곧바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다음날은 긴긴 하루가 될 테니 푹 단잠을 잘 수 있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버스킹 in Byron 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