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여유로운 하루 in Bruxelles

by 김민지

어젯밤 마티스와 제니퍼가 내 계획을 물었다.


"내일은 뭐 할 거야? 그랑플라스 가봤어?"

"글쎄. 원래 어딜 가든 그냥 무작정 걸어 다닐 생각이었어서 아마 그럴 거야. 그랑플라스가 뭐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광장인데 모르는구나! 관광객 맞아?"

"하하 글쎄 관광객인데 이렇게 너네 집에서 머무는 것도 신기하다!"

"여기 다음에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했었나? 언제 가야 돼?"

"응, 여기서 가까운 큰 도시가 거기더라고. 계획이 없어서 꼭 언제 가야 되고 그런 건 없어."

"너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얼마든지 있어도 돼. 옆방에 빈방이 있는데 거기 매트리스도 하나 있고 아무도 안 써서 거기서 더 편하게 지낼 수도 있고. 일단 우리도 내일 일 안 하고 쉬는 날이니까 너랑 같이 구경하러 나갈게. 다른 친구들도 같이 만나고 재밌을 거야."


아아, 제발 내가 가진 유레일 기차 패스가 무기한이었으면 좋으련만...

며칠이든 상관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제안이면서 솔깃했으나

안타깝게도 내 기차표는 개시한 뒤 한 달밖에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즉, 그 기간 내에 최대한 기차로 많이 여러 군데를 이동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이득이라는 의미였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시간적 여유만 된다면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은 이들과 계속 함께 지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일단은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언제 떠날지에 대한 고민은 내일로 미루고 잠이 들었다.


늦게 잠을 청한 것 치고는 아침에 눈이 일찍 떠졌다.

대각선 방향의 매트리스에서 마티스와 제니퍼를 슬쩍 바라보니 역시 아직 곤히 자고 있다.

고양이 마오만 야옹야옹 거리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일단은 여기서 하룻밤을, 혹은 그 이상을 머물 수도 있는데

기차역 락커에 넣어두고 온 짐들을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중간에 깰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짧은 메세지를 남겨두고 혼자 조용히 집을 나왔다.


길을 잘 찾는다고 늘 자부하곤 했던 나지만 과연 처음 와본 집에서 한번 가본 기차역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사실 기차역이야 물어물어 가면 되지만 기차역에서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도 주소는 몰랐지만 마티스의 전화번호는 있으니 내 기억력을 믿어보기로 하고 일단 길을 나섰다.

아빠는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길을 잘 찾으시는데

아빠를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나에게도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고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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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40866.JPG 마티스와 제니퍼네 집을 찾아 되돌아갈때마다 유용한 기준이 되어준 법원


어제 이즈마엘을 만났던 케밥집을 지나 아이들과 함께 걸어왔던 거리로 되돌아 따라 20분 정도 걸었을 즈음

소규모의 간이 놀이공원과 그 너머 저 멀리 기차역이 보였다.

생각보다 쉬웠고 돌아갈 때도 왔던 길을 잘 기억해두면 문제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역 락커를 꽉 채운 내 짐들을 다시 보니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이 짐들을 가지고 언제 다시 돌아가나 싶고 캐리어를 끌고 경사를 올라갈 생각에 약간은 귀찮기도 했다.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하는 기차역을 나와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는데

어떤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께서 여행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나를 보고 웃으며 여행 중인지 물으셨다.

핀란드인이지만 남편이 벨기에 분이라 여기서 사신지 꽤 되셨다고 했다.

얼떨결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게 됐는데 핀란드인을 만난 건 처음이었어서 그동안 궁금했던 핀란드의 교육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길이 갈려 헤어지기 전에는 교육과로 유명한 대학들을 추천해주시면서 기회가 된다면 알아보라고 말씀하시고는 작별인사를 했다.

여행이라는 건 신기하게도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구나 싶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삿길을 올라가는 길목에 벼룩시장같이 소규모 골동품 장터가 열렸는데

엄마가 봤으면 흥미로워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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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미끌미끌한 돌길을 지날 때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덜덜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길을 지나던 사람들도, 카페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부끄러웠다.

이마에 약간 땀이 맺힌 채로 나는 마티스와 제니퍼네 집 앞에 도착했다.

잘 찾아올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는데 신기하게도 막힘없이 잘 도착했다.

머릿속에 길과 방향에 대한 지도가 그려졌던 덕분인데 공부에 대한 기억력은 꽝인 내가 이런 건 어떻게 기억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만 이 낡은 집은 열쇠로 문을 열거나 안에서 누가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마티스가 쪽지에 적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한국으로도 국제전화를 안 걸어봤는데 외국인에게 처음 전화를 걸어볼 줄이야.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혹시 이 번호가 틀렸으면 어떡하지?'

'마티스와 제니퍼가 아직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하지? 깨우기 미안한데'라는 걱정이 드는 찰나

마티스가 전화를 받고서는 5초 만에 내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짐을 가져온 사이 마티스와 제니퍼는 잠이 깬 듯했다.

제니퍼가 요리를 하러 간다는 말에 같이 가서 도와주겠다며 얼른 따라나섰다.

건물의 1층에 샤워실과 마찬가지로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이 있었는데

아파트의 공용부엌이라니 왠지 낯설면서 신기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서 요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던 나와 달리 제니퍼는 얼핏 봐도 솜씨가 능숙해 보였다.

곁에서 간단한 재료 손질만 도와주고 나머지는 제니퍼가 요리하는 것을 구경하며 감탄하기에 바빴다.

무려 3가지 종류의 볶음밥을 요리했는데 유럽에서 처음 먹어보는 쌀밥이라 더욱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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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제니퍼와 마티스가 내게 그들 옆방을 보여주며 며칠이든 이곳에서 편하게 머물러도 된다고 말했다.

모서리 한 귀퉁이에 매트리스와 이불이 있는 것 외에 텅 빈 넓은 방이었는데

내가 돌아오기 전 제니퍼가 바닥을 쓸고 닦아주었다는 말에 너무 고마운 마음이 크게 들었다.

아무래도 커플인 그들과 한방에서 머물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이렇게 따로 방이 있으니 내 마음도 편해진 데다가 내 짐까지 모두 그 방으로 옮기고 나니 더욱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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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는 일을 나갔다가 3시간쯤 뒤에 돌아온다 하고 마티스도 일을 나갔다가 장을 보고 올 테니 갔다 와서 같이 시내로 놀러 나가자고 했다.

넉넉한 시간은 아니지만 집에만 있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라서

나는 혼자 잠시 밖에 구경하다 돌아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브뤼셀에 도착한지 하루 반나절만에 처음으로 시내를 구경한다니!

그렇지만 전혀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광장에는 한눈에 봐도 다양한 국가에서 온듯한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와플과 초콜릿의 본고장답게 골목 거리들마다 와플가게와 초콜릿 가게들도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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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항상 관광객들로 넘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생각은 어떨까?

한국에도 점점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관광이 활성화되지는 않은데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국적도 유럽에 비하면 훨씬 한정적이기에 문득 궁금해졌다.

거리를 무작정 걷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듯한 낯익은 동상을 맞닥뜨렸는데

그 유명한 오줌싸개 동상이 여기 브뤼셀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니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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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오래 돌아본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가 있었어서 급히 마티스네로 돌아갔다.

마티스와 제니퍼 둘 다 돌아와있었는데 새로운 얼굴도 보였다.

그들의 친구인 미겔은 사이프러스 태생인데 엄마가 벨기에분이고 현재는 벨기에에서 일한다고 했다.

미겔은 재밌는 사람이었다(그가 굉장히 재밌는 사람이라는 것은 2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제대로 알았지만).

보통 유럽 사람들이 초면에 나이를 말하는 경우는 드문데 자기는 30살이라며 30대가 돼서 좋다고 했다.

"왜? 젊을 때가 그립거나 좋지 않아?"라고 묻자

"남자들은 30대 때부터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 게 아닐까!"

제 딴에는 나름 진지한 이유 같으나 허세 가득하게 들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또 자기는 영어, 불어, 그리스어 등 7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길래 허풍인 줄 알고 나도 웃으며 학창시절에 얕게 배운 모든 외국어들을 할 줄 안다고 했는데 그는 정말로 7개 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에 기겁했다.

아무리 유럽 언어들의 계통이 비슷해서 배우기가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미겔뿐만 아니라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3개 국어 이상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놀랍고도 은근히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또 여행을 좋아하고 한 곳에서 오래 머물러 살기보다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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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와 제니퍼의 집(이라 할 수 없는 방)은 매우 어수선하긴 했어도 나는 그 분위기 자체가 너무 좋았다.

넷이 각자 소파 한 귀퉁이에 앉아 기대어 누워서

스피커 사이로 흘러나오는 마티스가 선곡한 노래(어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 취향과 비슷한지)를 들으며

널찍한 창문 사이로 비춰내리는 햇살을 받으면서 얘기를 나누는,

나는 개인적으로 불어가 듣기에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불어로 대화를 나누는

딱히 특별할 것은 없어도 그때 그 순간이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벌써 오후 5시쯤 되었을 때였지만 그들 답게 느긋하게,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느긋하게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나도 제니퍼가 건네준 열쇠로 내가 쓸 방문을 잠그고 나왔다.

스케이트파크를 지나 그랑플라스로 가는 길목에 왠 멋진 건물이 있어서 무엇인지 물었더니

브뤼셀 왕국이라고 했다.

푸른 하늘과 초록빛 정원과 하얀 왕궁의 조화가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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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림 속의 초록 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는데

마티스는 가방에서 스피커를 꺼내 음악을 틀었고

마티스와 미겔은 담배를 말고(담배를 마는 것을 어제 마티스네서 처음 봤는데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기했다)

제니퍼와 나는 얘기를 나누면서 햇살을 즐겼다.

문득 이런 게 진짜 '여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기분의, 이런 모습의 여유를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바쁜 학업, 일, 계획, 시간 등에 쫓겨 잠시라도 이렇게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생각조차 못했는데,

신기한 점은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지금 시간은 몇 시고 우리는 무엇을 할 거고 어디를 갈 거고에 대해 얘기 한마디 없다는 것이었다.

일상의 이런 소소한 여유를 소중히 여기고 즐길 줄 안다면

삶의 속도가 조금은 더딜지라도 그만큼 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꽤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우리는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아까 혼자 한번 왔었는데도 이들과 같이 오니 전혀 새로운 곳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왔을 때 와플이 먹고 싶었던걸 꾹 참고 고마움의 표시로 와플을 살 테니 먹자고 하니

자기들은 질렸다며 혼자 많이 먹으란다.

와플 하나에 1유로라고 써져 있어 싸다 싶었는데 직원이 묻는 말에 그냥 예스만 말했더니 각종 토핑이 추가돼 4유로로 가격이 껑충 뛰었는데 그 값에 비해 기대에 맛이 미치기가 않아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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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아까보다도 붐볐는데 아까는 없었던 큰 무대가 광장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었다.

그 무대에서 탱고 경연대회가 열리는가 보았다.

주말도 아닌 목요일에 시내 중심 한가운데에서 이런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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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광장을 서성이고 있는데 마티스가 저쪽 계단에 기대서 있는 남자 2명에게로 다가갔다.

알고 보니 프랑스와와 아드리는 마티스의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오랜만에 마주친 거라 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더니 자연스레 뒤에 서있던 동양인 여자애인 내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마티스가 이번에도 잠시 내 소개를 해준 뒤 내가 그 둘과 대화를 나눴다.


"아 그럼 마티스와 제니퍼랑 같이 지내는 거야? 혹시 언제까지 머물러?"

당장 내일 벨기에를 떠날 수도 있었기에 답하기가 애매했다.

"왜?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우리 둘이 내일 근교 도시에서 열리는 Lasemo 음악 페스티벌에 갈 건데 너도 같이 안 갈래?"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음악 페스티벌이라니 무슨 말이지

"응? 그게 뭔데?"

"매년마다 일주일 정도 열리는 야외 음악 페스티벌인데 우리는 2박 3일로 갈 거고 거기 캠핑장에서 자고 페스티벌 가고 그럴 거야. 가면 진짜 후회 안 할걸. 진짜 재밌고 우리는 거의 매년 가. 아까 마티스한테 제니퍼랑 갈 수 있는지 물어보니까 안될것같댔는데 너는 혹시 생각 있으면 마티스가 우리 번호 아니까 얘기해줘."


너무 갑작스러운 제의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사실 나는 페스티벌을 좋아해서 솔깃한 게 사실이었으나

마티스의 친구들이라지만 처음 보는 남자들과 예상치 못한 페스티벌이라니... 일단은 좀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광장 뒤편의 길을 따라 어떤 이름 모를 동상이 있는 계단에 앉아

좀 전에 마티스가 사 온 저렴한 캔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마티스의 친구 니콜라스도 와서 합류했다.

많지는 않지만 여태껏 본 마티스의 친구들도 다들 좋은 사람들 같아 보였다.

마티스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은 거겠지.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도록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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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이 된 우리는 광장 옆 펍들이 즐비한 골목을 걷다가 어떤 펍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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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늦은 시간도 아닌데 펍은 벌써 사람들로 꽉 차 왁자지껄 했다.

우리나라 술집과 가장 다른 점은 유럽의 펍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거한 안주 같은 것 없이 주로 술만 마시는 점인 것 같았다.

맥주로 다들 통일해 니콜라스가 모두에게 첫 잔을 돌렸다.

독일 맥주에 이어 그 유명한 벨기에 맥주라니

사실 나는 맥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맛에는 둔감한 편이라 그냥 다 맛있는데

스페인 친구들과 함께였을 때처럼 이 친구들과 마시는 맥주라 훨씬 맛난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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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 안쪽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사람은 많은데 칸이 두 칸뿐이라 줄이 꽤 길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에 어쩌다가 내 뒤에 서있던 어떤 여자랑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때는 앞으로 생길 일에 이것이 얼마나 큰 영향이 미치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 약간 놀란 그녀는 폴란드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보고 폴란드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묻길래 아직 없다고 했더니

"나는 Krakow라는 도시 태생인데 내가 자고나란 도시라서가 아니라 진짜 너무 아름다운 도시야. 혹시 여행 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쯤은 들려보기를 추천해."

폴란드라고 하면 기껏해야 바르샤바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밖에 알지 못해 크라코는 정말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여행을 오기 전 유럽지도를 보며 대강 어디를 갈지 살펴볼 때에도 폴란드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다른 나라들보다도 생소해서. 둘째, 공산 국가의 이미지가 남아있어서 괜히 불안해서. 셋째, 폴란드는 유레일 패스 사용이 불가능한 곳이라서였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왠지 내가 꼭 그곳을 방문해야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서 솔직하게 저런 이유들을 말하며 그곳에 방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난생처음 화장실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상황이 재밌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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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와 대화가 길어져서 자리에 돌아갈 때 혹시 큰 일을 봐서 늦은 것으로 오해하지는 않을까 싶어 좀 민망했다.

다들 첫 번째 잔이 거의 비워갈 무렵이라 두 번째 잔은 내가 돌리겠다고 했더니

마티스와 제니퍼가 나를 막으며 말했다.

"너는 앞으로도 계속 여행을 다녀야 되니까 최대한 경비를 아껴야지. 우리가 살게."

"아냐! 너네한테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하고 고마운데 내가 사야지."라고 반발했으나 결국 그들이 돌렸다.

흔히들 서양 사람들은 더치페이가 철저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친구들이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였어서 종종 놀라기도 했다.

미겔이 내게 압생트를 마셔본 적이 있는지 물어서

그게 뭐냐고 내가 반문했더니 압생트를 모르냐며 이따 압생트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우리가 있던 펍을 나와 미겔이 아는 다른 펍으로 발을 옮겼기 고선 주문한 압생트를 기다렸는데

차같이 생긴 이 괴상한 술의 생김새가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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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양이 적어 보여도 도수가 70%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 미겔이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70도!? 이거 어떻게 마시는 건데?"

"그냥 술 안에 각설탕 집어넣고 들이키면 돼."

다들 꽤 태연한 것으로 봐서 목이 데이는 것은 아닐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들이킨 순간 목이 빠르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으나 높은 도수에 비해 정신은 그래도 멀쩡했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압생트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까 낮에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은 제니퍼의 볶음밥과 좀 전에 마신 술 이외에는 먹은 게 없었는데

다들 배가 고파 광장 근처의 케밥집에 들어갔다.

유럽 어딜 가나 가장 흔한 스낵은 케밥이 아닐까.

일반 음식에 비해 저렴해서 부담이 덜하고 간편해서 우리나라의 분식과 같이 흔히들 많이 찾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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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벌써 해가 저물어 하늘은 깜깜해졌지만 반대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축물들의 야경은 더욱 화려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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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지나 아까 낮에 본 오줌싸개 동상도 지나 현지인인 친구들이 이끄는 대로 길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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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걷다 보니 펍이랑 클럽의 중간 정도 되보이는 바가 보였는데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바 안이 좀 작기도 했고 사람들도 많아서 밖에까지 웅성웅성했다.

우리는 바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는데 마티스, 제니퍼, 미겔, 니콜라스와 모두 친구인 데다가

마티스와 제니퍼네 건물에 같이 사는 이웃이기도 한 무사였다.

정원사로 일하는 그가 아까 마티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일 마치고 여기로 바로 온다고 했단다.

무사는 굉장히 체격이 좋고 키가 큰 흑인이었는데

산만한 덩치에 안 맞게 그 역시 굉장히 유쾌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무사를 생각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허당스러움에 웃음이 터지곤 한다.

미겔의 말이나 제스처가 너무나도 웃기다고 한다면 무사는 그냥 사람 자체가 웃겼다.

바에는 사람이 너무 많기도 하고 정신이 없어서 그냥 30분 내외 정도만 있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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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꽤 늦었다.

바 앞에는 넓은 인도가 있었는데 웬 무술팀 같은 길거리 공연이 있었다.

남자 대여섯 명이 카드처럼 서로 인간 탑을 쌓기도 하고 공중으로 점프해서 날아다니기도 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니

갑자기 마티스가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여기 이 여자애가 한국에서 온 친구인데 혹시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냐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뭐... 뭐라고? 어안이 벙벙하던 찰나에 남자들이 씩 웃으면서 나보고

어떤 두 남자의 허벅지에 양쪽 발을 딛고 다른 두 남자의 팔에 각각 내 팔을 걸치라며

지체할 시간 없이 내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내 몸은 붕 떠서 나 역시 인간 탑의 중앙에 서게 됐고

미리 내 카메라를 가져갔던 마티스가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거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한 광경을 구경하면서 브라보를 외치며 환호했는데

낯선 타국에서 이런 경험도 하다니 너무 즐거웠다.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배려해 먼저 얘기해준 마티스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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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들 피곤함이 얼굴에 여실히 묻어나왔다.

다른 곳에 사는 미겔과 니콜라스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한 건물에 사는 무사와 제니퍼와 마티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나올 때 외에 오늘 하루 한 번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도 밖에 나와서도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할지에 대해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과 계획에 쫓기지 않고 단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이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그 자체로 너무 소중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충만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마티스와 제니퍼가 열쇠로 자기들 방문을 여는 사이 나 역시 열쇠로 내 방문을 열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세게 이리저리 열쇠를 돌려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급하게 제니퍼와 마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남자인 마티스의 힘도 소용이 없었다.

제니퍼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땐 결국 열렸다고 했다.

문이 하도 낡아서 구멍이 잘 안 맞는 것 같았다.

마티스보다도 힘이 더 셀 것 같은 무사에게도 긴급 지원을 부탁했는데 무사마저도 문을 열기는 불가능이었다.

내가 방문을 잠그는 바람에 괜히 나 때문에 문이 고장 난 것만 같아 너무 미안하기도 하면서

안으로 옮겨놨던 내 모든 짐들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문이 정말 안 열리면 내 짐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도저히 방법이 없을까...'

한 시간 가량을 우리 넷이 달려들어 문과 씨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사와 마티스가 우리가 서있던 복도의 넓은 창문을 열었다.

"설마..... 에이 설마.... 여긴 4층이라고...! 떨어지면 그냥 바로 추락인데 절대 안돼!!!!!!!!"라고 말했으나

무사가 씩 웃더니 들은 척도 안 하고 잠긴 내방의 창문 안으로 휙 들어갔다.

다행히 날씨가 덥기도 하고 청소 후 환기를 시킨다고 나오기 전에 창문을 열어놓고 오길 잘했다.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간 무사가 안에서 문을 열려고도 시도해봤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할 수 없이 무사가 안에 있던 내 캐리어와 가방을 창문으로 우리에게 하나씩 건넸고

임무를 마친 그는 다시 무사히 복도 쪽 창문으로 건너왔다.

무사도 나처럼 약간은 두렵기도 했을 텐데 내색도 않고 이렇게까지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기껏 제니퍼가 방 청소까지 싹 다해줬는데 어이없게도 그 방은 출입 불가가 되어버렸다.

오늘 밤도 다시 이 커플과 한방에서 지내야 할 수밖에 없다니 굉장히 미안하면서 민망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마티스와 제니퍼가 미안하다면서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푹 자란다.


씻고 와서 어제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 창문 밖 까만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를 쭉 돌이켜봤다.

뭔가 많은 것을 구경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굉장히 알찬 하루를 보낸 것만 같았다.

만약 제니퍼와 마티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벌써 암스테르담이었을까?

방도 따로 못쓰게 된 이상 너무 오랫동안 이들에게 신세를 지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곧바로 떠나야 할까...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너무 빨리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쉬운데 기차표 기한도 한정돼있고...

여기서 떠난 뒤에는 또 무엇을 할지...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마구 복잡해져서 일단은 걱정하지 말고 잠들어야지 싶었다.

내일 일어나서 상황을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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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554.jpg 마티스와 제니퍼, 저 사랑스러운 둘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도 행복해지는 기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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