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주말에 있었던 부산 출장을 비롯하여 잠시도 쉬지 못할 만큼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원래도 퇴근 시간이 넘어서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흔했지만 최근에는 8시가 넘어 퇴근하는 일들이 빈번했고, 때문에 낮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피곤한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바쁜 만큼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일들은 계속 쌓이고 넘쳤지만 어떻게든 많은 것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바람이 차가워지며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이 내 주위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의뢰인을 비롯하여 주로 다른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충분할 정도의 혼자 있는 시간들을 가졌다. 그래서 한때는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들이 아름답게 갈무리되어 밤하늘의 빛나는 은하수와 같이 내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리라고 믿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어둠이 완전히 내려온 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나는 늘 그렇듯이 바깥이 훤히 보이게 블라인드를 걷고 또 불을 대부분 끈 채 바깥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기대어 잠이 든다. 하루는 늘 고단하지만 잠이 들기 직전까지 나는 몸을 최대한 피곤하게 만든다(그래야 깊이 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날 밤에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어둠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무척 익숙한 이름의 녀석이다. 그는 숙명과도 같이 창틀에 멀끔히 기대어 분명히 어디선가 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정적이 흐른 후 그는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 느껴졌다.
' 그래서 지금까지의 너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고통*은 혀를 차는 듯이 느릿느릿 한 어조로 비웃듯이 말했다. 실제로 그 녀석은 분명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 객관적으로는 무척 기이한 일이라고도 생각했으나 어쨌든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자 숨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일종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쥐어짜며 겨우 ' 글 ㅡ 쎄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 그게 너의 문제야. 너의 고통에 신실하지 못하다는 바로 그 점- 말이야. '
고통은 그 점- 을 발음하며 강조를 하듯이 입을 길게 끌면서 동시에 답답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고통에게 손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지만).
' 너는 왜 이렇게 너의 삶, 너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거지?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만 집중을 하고 있느냔 말이야. 그것이 일종의 결핍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너는 언제까지 회피를 할 참이지? 그래서 나라는 고통이 어디 사라지기나 했나? '
그리고 그다음 말은 나의 머릿속을 울렸다.
' 대체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뭐야? '
그리고 그 녀석은 잠시 숨을 멈춘 듯이 침묵했다. 창문 밖으로는 멀리서 보이는 불빛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디에서도 산속에서 볼 수 있음 직한 아름다운 달과 대조되는 남색의 청명한 하늘은 없었다. 오로지 어둠 속에 미끄러져 온 고통*이란 이름의 녀석만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녀석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이 무척 우습고 괴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고통*을 상대로 좀 더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마침 잠도 멀찌감치 달아나 버린 상태이기도 했고. 만약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대로 상관이 없지 않은가?
' 내가 원하는 것이라 ㅡ, 그것은 흔적이 없는 삶이야. 소멸하고 싶은 삶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 그건 죽음. 을 원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야. 물론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든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나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 젊은 사람들일수록 언제든 자기가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어. '
그리고 나는 언젠가 잠이 들면서 그다음 날 간절히 눈을 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에는 나의 고통 속에 빠져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힘든 순간들을 거쳐오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어찌 되었든 나는, 아마도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 결핍감. 때문이겠지만 흔적이 없는 삶을 살려고 마음먹었어. 그것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삶의 방향이야. '
어둠은 이야기를 듣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을 빙빙 돌리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 그래, 그래서 너의 마음먹은 대로 되었어? '
나는 그의 질문에 생각해 봤다. 아니다. 전혀 아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면 그 편이 더 옳을 것이다
.
' 아니야. 나는 지금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아. 심지어 궁극적인 면에서는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야. '
어둠은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 생각해 봐. 시간은 많지 않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행복이 영원하지 않듯이 고통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다만, 너희 인간들은 그 영원하지 않은 감정들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찾아내야 해.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느꼈던 그 많은 감정들은 그냥 소모되는 거야. 알겠어?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
과연 그렇다. 감정들 속에서 가치를 찾을 수 없다면 그냥 소모되고 만다. 소중한 시간만 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 감당할 필요는 없어. '
고통은 마치 나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 아무것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감당하려고 하는 순간, 많은 것들이 틀어져 버린다고. 사실 너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도 되지 않아. 나와 같은 고통들은 당연히 차고 넘칠 수밖에 없는 거야.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오로지 버티거나 참는 것뿐이야. 물론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지. 하지만 기억해. 오로지 참거나 버틴다고 해결이 되지는 않아. '
이윽고 고통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젤리처럼 꾸물꾸물 형태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젤리는 나를 향해 스멀스멀 기어 오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그런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마치 일어났어야 할 일들이 그때에 맞춰 일어난다는 듯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 자 생각해 봐. 너를 둘러싼 이 고통이란 존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 지를. 어둠 바깥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빛을 말이야. 너는 빛 가운데 있었어. 그렇기에 그와 정량적으로 동일한 고통에 휩싸이게 된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