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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Jun 01. 2024

지금은 아마 그 간극(間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고

마찬가지로 아무리 지난(至難)한 삶이더라도


한 가지에 빠지면 지나치게 몰입하던 태도는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잠을 자다가 두서없는 새벽에 깨는 것도, 그리고 몇 달 전부터 사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다가 어느 지점에 감동하여 하루에 몇 장씩만 읽기로 결심한 것도.


23년도 그랬지만 24년은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 벌써 6월이라니, 최근에는 대체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방전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상당히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고 책을 읽지도 못했다. 어떤 날은 그야말로 숨이 막히도록 바쁘거나 쉴 새 없이 전화를 해야 해서 오후가 되면 온몸이 혼미해지고 정신이 방전됨을 느꼈다. 몇 달 전부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인적인 약속을 잡고 있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서울에 나갈 일은 그전보다 더 많았다. 물론 서울에서의 일을 끝내고 누구와도 약속을 잡지는 않고 잠실에서 100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예전처럼 잠실에서 산책을 하지도 않는다.


주로 늦게 잠드는 통에 재판이나 상담이 없는 한, 사무실에는 늦게 출근하고 점심은 주로 혼자 먹었다. 최근에는 사무실 후문 바로 옆에 새로 생긴 '꼬모'라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치아바타 샌드위치와 커피로 가볍게 점심을 때웠다(나는 한 번 가는 가게는 그쪽에서 아는 척을 할 때까지는 계속 가게 되는 편이다). 이렇게까지 혼자 있다니 그야말로 '은둔형 외톨이'를 자처하는 셈이다. 한 계절이 바뀌도록 그야말로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몇 주전 금요일의 일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2017년 연수원을 수료 후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연락이 없었던 연수원 동기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뭐지?라고 생각하다가 아, 문득 오늘이 연수원 동기 모임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나의 핸드폰에는 많지는 않지만 단톡방들이 있고 종종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 참여한 적은 거의 없다). 스쳐가며 봤던 단톡방에서 아마 서초동이나 반포동 어딘가에서 모임을 가진다는 글을 얼핏 본 듯도 싶다. 어찌 전화를 다시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다시 전화가 와서 받았다.

 

' 현주야, 오래간만이지? '


목소리를 듣자마자, 뒤편에 시끌시끌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온다. 전화를 건 동기와 통화를 한 것은 사실상 8년 만이었고, 말투로 보아 아마도 잔뜩 술에 취한 것 같았다. ' 우리 언제 점심이나 한 번 먹자. ' 뭐 그 정도의 이야기가 오고 가고 갑자기 전화는 비교적 최근에 만난 다른 동기에게로 넘어갔다.


 ' 언니~ 잘 지내시죠? ' , ' 응. 오늘 모임이 있었나 보구나 ㅡ, ' , ' 맞아요. 언니, 저도 정말 오래간만에 나와가지고... ' , ' 그래, 다들 술을 많이 마셨나 보네. ㅎㅎ '


그러고 보니 이처럼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 놀아본 것인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밤이 늦은 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가 그곳의 분위기를 잔뜩 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전화를 받으며 거실을 흘끗 둘러 본다. 내가 전화기를 들고 앉아 있는 불이 다 꺼져있는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읽다 남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책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전화를 끊자, 사방에 적막이 몰려왔다.


바로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냉장고에 남아 있던 와인을 따라 천천히 마셨다. 일부로 불은 켜지 않았다. 우물 안에 온몸을 웅크리듯이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으려니 도대체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잠이 바로 몰려오지는 않는다. 어차피 하루하루 비슷한 날들이 반복되고 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비슷하고 아무런 색이 없으며 나에게 큰 의미를 남기지 않는다.


지루함의 계속이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주인공이 그 이상한 도시로부터 나온 시점부터 갑자기 장르가 바뀐다. 정체 모를 연애 소설에서 고독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로, 또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점부터는 판타지 장르로. 그는 16살, 고등학교 때 만났던 연인을 잊지 못해 40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첫 번째의 연애 이후부터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과정이 '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루키의 책에는 늘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인생의 고저가 있듯이  최고상대를 만나면 그 이후에는 돌처럼 굳어진 삶을 살게 된다는.


여전히 장르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애매하긴 하지만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영감을 준다. 70살이 넘는 나이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한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는 단숨에 읽어 내리지 않고 몇 장씩만 읽고 있다. 지금처럼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나 또는 엉킨 실타래처럼 무겁고 답답한 날에.


고민을 하다가, 다시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다. 막상 떠나고 싶은 나라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작년부터이지만 그래도 여행을 가야 조금이나마 제대로 쉬는 것 같다. 개업을 하고 일 년간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그 당시에 나는 며칠씩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갈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사무실을 비우는 것은 언제나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나와 끝이 없는 소통을 하고 싶어 했고 어떤 면에서 내가 쉬는 것은 죄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사무실 운영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그래서인지 주로는 상담을 하느라 늘 바빴지만 수임이 며칠씩 없는 날에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가면서, 또 어느덧 이 년이 지나가면서 나는 지나치게 몰입을 하는 나를, 스스로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자. 그러니까 조금은 호흡을 길게 해서 ㅡ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자.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생각 없다.


그다음은, 내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자.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ㅡ, 그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과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동안에는 마치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지난(至難) 한 삶이더라도, 내가 은둔(隱遁)을 하며 있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시간이다(새삼 변호사란, 사회성이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그야말로 어떤 모임이랄지, 회식이랄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처럼 비사회적인 변호사들도 송무일을 하는 것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정신은 고갈되더라도 몸은 충분히 바쁘기에 비사회적인 것이 좀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와인을 마시고 있으려니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하남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몇 있다. 그중에서도 '미사장'이라는 카페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곳은 숲속을 볼 수 있는 구조의 bar 형태의 테이블이 있다. 그 일렬의 테이블 위에 혼자 앉아 있으면 바로 눈앞에 초록 초록한 숲에 누군가가 뛰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주 전형적인 나무들이 우거진 모습이지만, 내가 그곳을 찾는 시간대가 대부분 오후 시간대라서 해가 진 이후의 컴컴해진 숲속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커피의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듯한 쇼케이스 안에는 아주 비싸고 맛있는 몇 가지의 조각 케잌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잘 가지 않지만 하남 경찰서에 법률 상담을 하러 가게 될 때마다 시간이 나면 나는 '미사장'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지금은 그런 조각조각의 기억들이 오히려 아주 먼, 아주 옛날의 일들로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듯이, 운의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마치 이사를 가듯,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시간이다. 지금은 아마 그 간극(間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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