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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소금 Sep 29. 2022

13. 비밀이라는 섬



암환자가 되면 한 가지 고민이 생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는 알리는데 그 외 범주의 사람들에게 어디까지 오픈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나는 나의 사정을 알리는 데에 별로 거부감이 없었던 터라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진단을 받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엄마가 당부하셨다. 친한 친구 몇 사람 외에는 다른 데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특히 교회에 비밀로 하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는 결혼도 안 한 젊은 딸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다고 하셨다. 구설수가 싫은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사실인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교회 친구들 중 상당히 친한 사람이 여럿 있는데 긴 항암 치료 기간,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시간에 그들에게 비밀로 하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가 생각이 많아졌다. '너만 알고 있어'라며 소수에게 말하는 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는 나의 비밀을 지켜줄지도 모르지만 아닐 확률이 훨씬 높으므로, 나는 그들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친한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공동체에 당분간 몸이 아파 지방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잠수를 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비밀을 만든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고립시키는지를..


하나의 비밀이 생기니 그 사실을 말하지 않기 위해 둘러대거나 새로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거나 누군가를 서운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몇 차례 심리적 피로감을 느끼고 나니 점점 지인들과의 접점을 멀리하게 되었고, 침묵을 선택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나의 상황만으로도 이미 지쳐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는 좀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점차 비밀이라는 작은 섬에 혼자 고립되고 있었다. 내가 어느 섬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내게 찾아올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 작은 섬 안에 나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일 때는 겹치는 인간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편하고 좋았다. 내가 무슨 상황이든, 무슨 말을 하든 말이 날 염려가 없다는 그 안도감에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으며 나의 외로움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8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항암 치료가 끝이 났을 때 여전히 나는 가발을 쓰고 지내야 했고, 생기 없는 얼굴과 핏기 없는 입술로 누가 봐도 환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이 보고 싶어 오랜만에 교회에 갔던 날이 있었는데, 그날 친한 동생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 그동안 성형수술받고 왔어? 집사님들 사이에 소문 다 났어~" 


이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인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활동을 열심히 했던 내가 정확한 사유 없이 아프다는 이유로 반년 넘게 교회에 나오지 않자, 집사님과 권사님들(대부분 부모님 또래 여성분들)이 내가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뒷담화을 하기 시작했고, 그중 누군가가 내가 성형수술을 받으러 간 것 같다고 말을 한 분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망상에서 시작된 허위 사실이 사실인양 온 교회에 소문이 퍼졌고, 권사님 딸이었던 청년부 동생의 귀에도 들어간 것이었다. 

오랜만에 교회에 간 내가 가발을 쓰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는지, 어른들은 다시 뒤에서 수군거리셨던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엄마의 당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남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집단이었구나. 또래 친구들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최소 20-30년 하셨다는 분들이 할만한 행동인가 싶었다. 앞에서는 걱정하고, 뒤에서는 소문을 만들어내는 그분들의 위선에 많이 실망스러웠고 조금은 슬퍼졌다. 한동안 소문을 만들어내고 여기저기 퍼트린 분들의 얼굴을 보며 웃어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기 위해 사실은 암 투병을 하고 왔다고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기도 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차라리 사실이 아닌 이야기로 수군거리는 게 덜 아픈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의 고난이 누군가의 뒷담화 소재가 된다면 그게 더 아플 것 같아 진실은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위기의 순간을 넘고 나니 나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무 잘 보였다. 옆에 둘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둘 사람들이 명확하게 갈렸다. 오랜 시간 알고 지냈다고 해서 나의 바운더리 안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면식 없는 이들과 같은 거리에 두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편이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없기 때문에 상처받을 일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암 투병의 시간은 내 인생의 많은 가치관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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