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탈리아 여행기 9 - 03262023
붉은 도시에서 붉은 오리지널 라구를
# 현자들의 도시, 붉은 도시 볼로냐
베네치아를 떠나 피렌체로 향하는 여정 중에 볼로냐를 들러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 베네치아의 숙소를 나와 산타루치아역으로 향했다. 베네치아에서 볼로냐까지 2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서 오전 10시 50분경 Bologna Centrale 역에 도착했다. 이 날은 일요일로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주민들도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일요일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카페, 바 등의 영업은 외려 더 바빠지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일요일이면 대부분 친구,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로냐에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에 가까웠던지라 수많은 이들이 레스토랑,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휴일을 만끽하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볼로냐는 1088년에 세계 최초로 설립된 대학인 볼로냐대학교가 있는 도시로 유명하며, 이 덕분에 현자들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또한, 붉은 벽돌로 지어진 많은 건물 덕분에 붉은색이 도시를 감싸고 있어 붉은 도시 볼로냐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이 도시가 갖고 있는 좌파 정치 성향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볼로냐 시장들은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이탈리아 공산당, 좌파민주당, 민주당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좌파 성향의 시로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볼로네제 스파게티의 원조격인 라구 소스의 붉은 색깔도 붉은 도시라는 별명을 얻는 데 한몫했다 할 수 있다.
# 경쟁과 과시의 상징, 높고 높은 탑
볼로냐 시내를 다니다 보면 무조건 만나게 되는 건축물이 높은 탑들이다. 이 탑들은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졌다고도 하고, 가문들이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졌다고도 한다.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로 20개 정도만 남겨놓았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숫자만 해도 볼로냐를 탑의 도시라 부르는 데 이상할 것이 하나 없다. 그중 볼로냐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한 쌍의 기울어진 탑인 '두 개의 탑'이 볼로냐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그 외에 볼로냐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다른 탑인 'Torre Prendiparte'를 오르기 위해 입장권을 구매했다. 일단, 점심식사 전에 입장권을 구매해 놓은 후 오후에 이 탑을 올라보기로 하고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 오리지널의 맛, 볼로네제 라구 소스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파스타는 둥글고 긴 면으로 만든 스파게티라 할 수 있고, 그중에서도 붉은빛이 도는 토마토와 고기를 섞어 만든 소스를 얹은 스파게티가 가장 유명하다. 이는 한국에서 외식업이 발전하던 8-90년대 가장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된 파스타가 바로 토마토 미트소스 스파게티였기 때문이고, 이 스파게티는 사실 미국의 미트볼 스파게티가 그 유래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스파게티는 파스타라고 하는 음식 카테고리 중 하나이고 파스타를 만드는 방식 또한 수없이 다양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도 파스타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갖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한국에선 개인적으로 파스타는 사 먹는 음식보다는 해 먹는 음식에 가까웠고, 내 맘대로 만들다 보니 스파게티 면뿐 아니라 푸실리, 펜네, 파르펠레 등 다양한 면에 다양한 재료를 곁들여 만들어본 경험이 많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파스타는 특별한 메뉴라기보다 한국의 집밥과 가까운 음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파스타의 본고장은 이탈리아가 아닌가. 파스타의 원조인 이탈리아에서 만나게 될 파스타는 어떤 맛일지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 동안 맛본 모든 파스타에 대해선 역시는 역시, 원조는 원조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한국인이라면 가장 익숙한 토마토 베이스 미트소스 스파게티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메뉴를 원조의 도시에서 먹는다는 즐거움을 느껴보고자 미리 점찍어 놓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리가 방문한 레스토랑은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Sfoglia Rina로 전통적인 라구소스 파스타와 함께 한국의 만둣국과 비슷한 메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방문한 레스토랑 앞에는 어김없이 대기줄이 늘어서 있었고,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줄을 서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가게 내외부를 잠시 둘러보니 이곳 또한 식당으로만 영업하는 것이 아니라 파스타면이나 소스 등 식재료 판매도 함께 하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파스타면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가제면(自家製麵) 방식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듯했고 파스타면이나 소스 같은 식재료만 구입해서 가는 손님들도 많은 편이었다.(이후 이탈리아에서 만난 많은 식당들이 이런 식으로 영업하는 곳이 많았다.)
원래는 식당 앞에서 대기 줄을 서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대기줄이 보이면 아예 신속하게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미리 예약을 해서 대기하지 않도록 준비를 해놓는 편이다. 근데, 이곳은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이 아닌 타국인 데다 예약 또한 그리 쉽지 않다. 예약을 하려면 전화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외국어로 통화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예약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한국에선 잘하지 않는 대기를 30분이나 하면서 기다렸다. 그동안 우리가 만나게 될 음식에 대한 기대 반, 우려 반 같은 양가적 감정이 들었고, 마침내 대기 시간이 끝나고 식당 창가 한 구석 좌석에 자리 잡고 메뉴를 홅어 보았다. 근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Pasta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고, 죄다 이탈리아어로 메뉴를 만들어 놓아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파스타는 'Tagliatelle', 우리가 원하는 만둣국 메뉴는 'Tortellini in broth'임을 쉽게 알려주었고, 그의 안내에 따라 'Tagliatelle with Ragu'와 'Tortellini in broth' 두 가지의 메뉴를 주문했다. Tagliatelle, Tortellini, Tagliolini 등의 용어는 파스타의 양한 세부 종류들을 지칭하는 것임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이탈리아의 진짜 현지 맛집엔 영어 메뉴가 없다는 것!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을 주 대상으로 하기에 따로 영어 메뉴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우리 테이블에 도착했고, 두 메뉴 모두 훌륭한 풍미를 선사해 주었다. 라구소스 탈리아텔레는 두툼하게 다진 돼지고기에 잘 배어든 토마토 향이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맛의 균형을 잡아주었고, 두꺼운 면인 탈리아텔레는 마치 한국식 칼국수를 연상케 해 주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식 만둣국이라 해도 무방한 토르텔리니 인 브로스는 이탈리아에서 만나기 힘든 국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만족스러운 메뉴였다. 팥죽에 들어가 있는 새알심 마냥 작고 몽글몽글한 작은 만두 같은 토르텔리니와 따뜻하고 진한 고기육수는 여행의 피로를 덜어주는데 제격이었다. 이렇게 볼로냐의 상징 같은 메뉴지만 한식을 연상케 해 준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미리 예약해 둔 Torre Prendiparte로 향했다.
# 볼로냐의 중심 마조레 광장
어디에선가 유럽 도시의 공통점을 본떠 그린 지도를 본 적이 있다. 그 지도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럽 유명 도시 중심에는 큰 성당과 광장, 위인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아마 유럽 도시들을 다녀 본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도시건 중심에는 광장이 있고 거기에 그곳의 주요 거점들이 산재해 있다. 볼로냐도 마찬가지, 마조레 광장(Piazza Maggiore)이 도시의 중심이자 관광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유명한 두 개의 탑,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Basillica di San Petronio)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예약해 놓은 프렌디파르테 탑(Torre Prendiparte)을 오르기 전 마조레 광장과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은 볼로냐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원래는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큰 규모로 지어질 계획이었으나, 교황 피우스 4세의 지시로 베드로 대성당보다 작은 규모로 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바깥에서 볼 때도 압도적인 거대함이 느껴졌는데, 내부로 들어가 보니 성당의 층고와 넓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부의 장식도 마찬가지. 밀라노 두오모 같은 화려함은 아니지만 직관적으로 펼쳐져 있는 내부의 전경이 종교의 권위와 신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 300개의 계단을 오르다
피렌체로 향하는 여정 중에 잠시 들린 볼로냐였지만, 잠시 들린 것 치고는 꽤 많은 곳을 방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마조레 광장을 지나 프렌디파르테 탑으로 향했다. 이 탑은 볼로냐에 산재해 있는 많은 탑들 중 두 번째로 높은 탑으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탑보다 약간 낮은 높이(60m)의 탑이다. 우리가 이 탑을 오르기로 한 건 두 개의 탑 중 높은 탑인 아시넬리탑의 꼭대기까지 계단이 500개이고, 프렌디파르테 탑의 계단이 300개로 더 적기 때문이었다. 물론, 300개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500개보다는 나을 것이란 생각에 이 탑을 선택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탈리아의 유명한 탑 대부분은 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오로지 계단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지어진 지 오래되었기에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없었을 것이고, 이후 시간이 지났을지라도 건물의 안전 문제를 고려하면 엘리베이터 설치가 쉽지 않을 것이기에 루프탑에서 멋진 도시의 전경을 만나기 위해선 우린 두 다리를 믿고 계단을 오르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300개의 계단을 과연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꼭대기에서 만날 멋진 전경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입구로 들어섰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막상 계단을 따라 탑의 꼭대기를 올라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는데, 층마다 여유 공간들이 있어 휴식을 취할 수도 있어 육체적인 어려움은 예상보다 적었다. 문제는 좁디좁은 계단 통로의 폭이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폭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계속 오르다 보니 육체적 피로감보다 일종의 갑갑함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파르디 가파른 각도가 가져다주는 아찔함 또한 공포감을 더해주었는데 특히 가파른 계단을 내려갈 때 더더욱 아찔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좁고 가파른 300개의 계단을 올라 도착한 탑의 꼭대기엔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전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붉은 도시라는 볼로냐의 진면목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볼로냐의 아름다운 도시 전경을 끝으로 볼로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보석 같은 도시 피렌체로 향했다.
P.S. 루프탑에 올라가 볼로냐 시내를 내려다보며 멋진 경관을 즐기던 중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가기에도 빠듯한 좁은 계단에서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겹치면 어떡하지? 혹시 그래서 시차를 두고 사람들을 입장시키나? 이런 의문이 생겨 그에게 물어보았더니,,,,, "음,,,,, 모르겠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하. 역시나 시차를 두는 시스템 같은 건 없고 사람들끼리 알아서 오르내리면서 별 무리 없이 통행이 가능했다. 그때 또 생각이 들었다. 아, 여긴 한국이 아니지.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