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탈리아 여행기 Prologue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이탈리아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들 한다. 사실 계획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오다 최근 몇 년을 계획, 실행, 평가의 연속인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들은 상처와 분노를 계속 쌓아갔고 언젠가부터 일상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의 계획과 의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해의 문이 닫혀버렸다. 그렇다. 나는 올해 다시 백수가 된 것이다.
무언가 애써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지만, 여전히 나는 고민과 후회와 원망, 그리고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두 번째 코로나19 확진이 찾아왔다.
또 한 번 일주일간의 격리 시간을 보내며 지난 시간들에 대한 회한과 쓸모없는 분노를 서서히 떠나보낼 수 있었다.
격리가 끝나고 배낭을 꾸려 제주로 떠났다. 여전히 바람이 매서운 1월 말의 제주지만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걷고 싶었다. 그렇게 10일 간 제주에서 올레 다섯 코스를 걷고, 친구와 지인, 가족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자 마음먹었었다.
아내(앞으로 Hong이라 부르겠다.)와 처음 연애를 시작하던 때,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Hong의 취향을 알고 "매년 해외여행을 함께 가겠다."라는 호기를 부렸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여행의 ㅇ도 모르는 촌스런 아저씨에 지나지 않았다. 해외는 주변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국 정도. 그것도 순수하게 여행이라기보다 연수와 출장에 가까운 일정들이었다. 심지어 불혹이 다 되도록 제주를 포함한 국내 명소도 별로 가보지 못한 여행 문외한이었다. 가난한 음악가에 지나지 않았던 처지에 더해 여행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즐기는 인물도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저씨를 처음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들에 발을 들이게 하고, 뉴욕 타임스퀘어의 위용에 압도당하게 만들었던 이가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Hong이다. 매년 해외를 나가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지만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뉴욕, 런던, 리버풀, 맨체스터,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오사카, 교토, 마닐라, 샤먼 등 많은 곳을 다양하게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나도 여행의 맛과 멋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백수가 된 올해가 시작되었을 때 Hong은 가끔, 그러나 자주 물었다. "올해 뭐 할 거야?"
나는 그 말이 그저 새로운 일자리를 언제 어떻게 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인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어느 날 무심하게 던진 "우리 함께 길게 여행 갈 수 있는 시간이 당분간 또 없지 않을까?"라는 얘길 들으면서 그 질문의 진위를 알게 되었다.
Hong도 재작년 본인이 운영하던 업장을 정리하고 1년 넘게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이곳저곳을 다니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내가 백수가 되었으니 이때 길게 한번 여행을 가자는 얘기였던 것이다.
좋다. 재밌겠다. 이런 기분,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라는 걱정도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남들에 비하면 티끌 정도지만 그래도 쌓아놓은 커리어를 이어나가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 노년이 얼마 남지 않은 적지 않은 나이를 고려할 때 뭔가 노후에 대한 기반을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걱정, 결국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이 내 머릿속에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항공권은 결제했다. 3월 20일 출국해서 4월 26일 귀국하는 일정으로. 밀라노로 들어가서 나폴리에서 나오는 여정. 이 말인즉슨 이탈리아를 쭈욱 훑어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Hong이 가장 애정하는 여행지가 이탈리아임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번 여행지 결정도 Hong의 취향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할 수 없다. 이미 이탈리아를 짧게나마 두 차례 다녀온 바 있지만 이번엔 아주 끝장을 보겠다는 듯한 결심이 느껴졌다.
나는? 잘 모른다. 남들 아는 정도? 그리고, 나는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이 좋다. 음악과 대중문화, 축구 등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여러 가지 들이 있는 영국을 좋아한다. 어쩌면 나에겐 영국과 사뭇 다른 남부 유럽에 위치한 미지의 국가가 이탈리아였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을 함께 다녀오기로 한 건 일종의 도전정신이 작용한 결과라 여기기로 했다. 도전정신이라고 거창하게 부르기엔 좀 부끄럽지만, 성인이 된 이후 늘 무언가 남들과는 다른 길로 가고 싶어 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던 나였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한 자체적인 중간정산을 해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많거나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해 열패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저, 나는 그런 걸 좋아하게 만들어진 인간인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번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는 지금 해볼 수 있는 36일의 여행이라는 도전을 선택했다. 물론, 이번 도전의 길잡이도 내 삶의 동반자 Hong이며, 이런 쉽지 않은 경험의 판을 깔아준 것도 Hong이기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느낀 이탈리아는?
현지 시간 기준 2023년 3월 21일부터 4월 25일까지 총 36일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내가 느낀 점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여행지로서 최적화된 나라
여행지로서 이탈리아가 유명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소위 관광자원이 이렇게나 많을 줄 미처 몰랐다. 그들이 가진 오랜 역사와 보존과 기록에 집착하는 철저함 덕분에 넘쳐나는 유물과 유적, 곳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맛있고 또 맛있는 음식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등 시쳇말로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간 사람은 없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이탈리아 아닌가 싶었다. 물론, 유럽 어느 나라나 그렇지 않겠냐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디테일에 강하고,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이탈리아만의 특성이 여행지로서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일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성당을 예로 들자면, 규모와 면적 등에서 압도당하는 건 다른 곳의 대성당과 비슷하지만 이곳 성당들의 장식과 전시품들의 아름다움과 디테일한 표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구조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나 벽면에 예수와 12제자 내지 성인들의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모든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들이 기가 막혔다. 생김새, 표정, 자세뿐 아니라 옷의 주름 모양까지 각각의 인물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걸 보면서 이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을 체감할 수 있었다.
Bella Italia.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기에 더 무엇을 더하랴. 이것이 이탈리아에 대한 나의 소감 한 줄이다.
2. 유물과 유적뿐 아니라 멋지고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있다
유럽의 뿌리라고 하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리스와 더불어 유럽 문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로마 문명의 수많은 유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중세-르네상스-바로크-근대로 이어지는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하고 그들의 작품, 건축물들을 켜켜이 쌓아온 나라가 이탈리아. 그렇게 이곳에 방방곡곡 산재한 유물, 유적을 만날 때면 인간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Respect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근데, 이것만이 아니다. 한국과 비슷한 반도국가인만큼 평원, 산, 바다, 섬 등 갖가지 자연환경을 경험할 수 있으며 곳곳에 아름다운 명소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명소들이 가진 시각적 스텍타클이 압도적이며 유럽의 다른 명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의 환경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고 보전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인간의 삶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되는 것 또한 더 큰 매력을 더한다. 이탈리아 하면 유물, 유적만 생각했던 내가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이들의 자연환경이었다.
3. 웬만해선 맛없는 것을 먹기 어렵다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 피자와 파스타의 원조 이탈리아. 커피와 와인의 천국 이탈리아. 그리고, 지역마다 그들만의 색깔을 가진 식문화까지. 이탈리아의 음식 문화와 미식여행에 관련한 콘텐츠들을 만날 때면 흔히 만날 수 있는 표현인데,,, 하나도 틀리지 않다. 진짜. 과장이나 거짓은 없다. 물론, 누군가에게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들의 음식은 대부분 훌륭했다.
아침마다 마시는 한잔의 에스프레소도, 거의 모든 레스토랑 메뉴에 포함되어 있지만 파스타라는 익숙한 메뉴명 대신 각각의 이름으로 적혀있는 파스타들, 가장 대중적이고 캐주얼한 식당인 Pizzeria에서 만나는 단순하지만 훌륭한 식감을 뽐내는 피자들, 어디서 어떻게 구매하고 마시든 너무나 훌륭한 퀄리티의 와인들,,, 마지막으로 그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전통음식들까지. 그야말로 혀가 즐거운 여행이 가능했던 이탈리아였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내가 볼 때 핵심은 재료였다. 이들이 요리에 있어 가장 중시하는 건 그 음식의 원재료들이었다. 신선한 재료가 가진 본래의 맛을 충분히 살리는 것, 이것이 맛있는 이탈리아를 만드는 비법 아닌 비법이었다.
4. 중요한 건 로컬이다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가 가능한 이유가 식재료라고 했다. 식재료 중에서도 자기 지역에서 생산된 것들을 제1의 조건으로 꼽는다. 어디를 가든 산지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
몇몇 예를 들면, 마트에서 채소나 고기 등을 고를 때면 이탈리아산, 혹은 토스카나, 시칠리아 같이 그 지역명을 원산지로 표시하고 있는 것을 만날 수 있다. 우리로 치면 국내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울, 경기, 제주 혹은 마포, 강남 이렇게까지 원산지 표시를 한다는 얘기다. 그만큼 지역에서 생산한 재료들을 중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묵었던 농촌 민박인 Agri turismo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거의 대부분 숙소가 속해 있는 농장 혹은 그 주변 지역에서 수확한 농산물로 만들어진 음식들이란 소개를 받았다. 이렇게 지역의 식재료를 중시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재료의 신선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 등이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를 만들 수 있는 핵심요소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오래된 소도시들 또한 이들의 로컬리티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소도시들은 대부분 예전 도시국가 시절의 수도였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찍이 지역마다 작지만 자랑스러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결과로 나 같은 머나먼 이국의 여행객들이 아름다운 소도시를 보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사실 이탈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 국가가 된 지 160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각각의 지역들이 서로 다른 공화국 내지 왕국으로 존재하였기에 지금도 그들은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지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각각의 환경과 문화로 인해 오히려 이들은 너무나 훌륭한 관광 자원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토록 강한 지역성들이 이들에게 부담이자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시하는 다양성이라는 전제를 놓고 생각하면 이들은 이미 그 조건을 확보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각기 다른 다양성이 충돌하고 또 경합하면서 국가 전체의 에너지 화려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탈리아는 방문객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가 될 수 있는 조건과 요소들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