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인가 싶은 이야기
❝ 이 글에 등장하는 내용은 모든 스타트업 환경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 브런치에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느낌 점'이라고 소개되었는데 디자인에 관한 내용은 아닙니다.
16년 초, 스타트업이라는 환경에 디자이너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꾸준히 성장해왔다. 회사의 크고 작은 목표에 내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얻게 될지 고민하면서.
17년 1월, 구글 캠퍼스 리크루팅 데이 행사의 패널토크로 참여했다. 나 또한 이 스타트업 채용행사를 통해 지금 회사와 연이 닿았는데 그 행사로 채용까지 이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행사의 한 부분으로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패널들은 여러 질문들을 나눠가졌다. 질문 리스트를 보며 그동안 내가 어떻게 일해왔는지 회고해볼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 써뒀던 답변들을 엮어 첫 글을 만든다.
앞서 말한 행사에서 스타트업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생각보다 큰 의사결정을 직접 하게 되는 것이 어려웠다고 답했다. 회사는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일을 잘한다는 것은 좋은 의사결정을 하고 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수도 없었고 특별한 인수인계도 없던 상황에서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나는 이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의사결정을 해줄 '윗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팀원들이 있었다. 다행히 나 자신의 역량을 알아감과 동시에 팀원들도 나를 알아가기 때문에 차차 익숙해졌다. 생각해보면 정말 야생의 환경이었지만 능동적인 업무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
회사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나 역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 각각의 목표들이 하나로 이어질 때 '동반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고에서 많이 보이는 문구다. 조금 구체적으로, 회사의 목표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아직 잘 모르는 방법이라면 연구해서 행한다. 나는 학습을 했고 회사는 KPI에 조금 더 다가섰다. 이 것이 가능할 때 직원에게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혹시 스타트업 인터뷰를 앞두고 있다면 어떻게 동반 성장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회사와 나의 관계는 중요하다.
그리고 성장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전사적인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 움직여야 가능하다. 회사의 KPI(MAU, MUD, 매출 등이 될 수 있겠다)를 매주 공유하고 구성원들은 목표지향적으로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서비스를 만들어간다. 내 반성을 좀 하자면 그 목표에 너무 익숙해져서 모두가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잊기도 하는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숱하게 볼 수 있는 '가족 같은 분위기'처럼 스타트업 구인 공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수평적 구조'다(이마저도 식상한 요즘이 되어버렸지만). 자율적인 분위기로, 인턴부터 이사까지 모두가 '00님'이며 농담도 하고 장난으로 디스도 한다. 의사결정도 모두가 참여 가능하며 반대 의견도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다. '내 서비스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이런 환경에서 '꼰대'가 탄생하거나 자리잡기는 어려운 듯하다. 스타트업 디자이너 네트워킹에서도 불필요하게 서로의 나이를 묻지 않아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생각보다 '수평적 구조'가 조직의 계층이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나 보다. 정확히는 구조가 아니라 4번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사업 초기에는 업무의 경계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 스타트업 환경이다. 하지만 규모가 커져감에도 수평적 구조를 고수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모두가 동등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지만 조직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0~20명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는 스타트업 환경의 특징인 빠른 의사결정 속도를 더디게 한다. 가위바위보도 3~4명 정도의 그룹으로 나눠서 하지 않는가. 합의된 의견을 냈던 사람은 자신과 의견이 달랐던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납득된 사람은 팀과 함께 그 결정에 대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면 업무 프로세스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특히 UX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이 몇 년간 밤을 새 가며 하는 워터폴 형식의 도출 과정은 스타트업에서는 쓸모가 없었다(내가 그랬다).
몇 주 동안 수십 장 짜리 문서를 만들 시간에 테스트하고 구현해 시도해볼 여건을 만들자. 그 기나긴 과정에 모두가 달라붙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태스크 단위로, 애자일 방식으로 일한다.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이 보장되지 못하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처음 UX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조금 자만한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기업 멤버십을 거치면서 UX디자이너 공고에 지원할 때 쓸만한 이력들을 만들어두고 들어왔기에. 그리고 자소서에 멋진 말만 쓰다 보니 아직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진짜 그렇게 된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공부해온 것들은 'UX디자이너'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용성이라는 것은 서비스를 만들면서 자연스레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잠시 무력감을 느꼈지만 모두가 UX기획자, UX개발자인 환경에서 '저는 심미성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용성을 만드는 UX 디자이너에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디자이너였다.
2년차에 접어든 지금, 스타트업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타트업 디자이너들이 무슨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배울 점이 참 많다. 요즘 스타트업 디자이너들과 열심히 네트워킹하고 있는데 하루하루 큰 자극을 받는다. 다들 툴은 물론, 개발, 마케팅, 데이터 분석, 협업 심지어 기업 문화, 인재 채용까지 고민의 범주를 넓게 가지고 있다. 회사의 지표에 어떤 형태로 기여할 수 있을지를 회사와 밀접하게 고민하는 내용들은 듣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스타트업 채용 혹은 강연 행사가 있다면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는 것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