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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레오 Aug 26. 2020

부부싸움 후에 반드시 해야 할 것

[문선종 사회복지사의 실존육아] 전쟁 후에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부상자

전쟁의 목적은 적을 쓰러뜨려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사랑에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잔인하지만 한 때 시청률 20%를 넘나들었던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은 지금도 클립 영상으로 돌아다닐 정도로 인기 있다. 결혼을 하고 부부싸움을 해보니 왜 전쟁이라는 제목을 갖다 붙였는지 알 것 같다. 승패를 가리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어쨌든 총탄을 떨어지게 마련이고, 끝은 있기 마련이지만 부상자들의 부상은 조명되지 못한다. 이번 부부싸움을 복기하면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그들로부터 강력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 다시 복기해본 전쟁

보통 상황이 악화될까 봐 후퇴를 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그치는 아내의 말투와 나를 무시하는 말들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절대 물러서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언성은 점점 커지고, 식탁 위의 물 잔이 엎어질 정도로 식탁을 두드리며 상황은 급박하게 흘렀다. 첫째는 벙커(자기 방)로 숨어들었고, 둘째는 겁에 질려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멈추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여줄 것 같아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아내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며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시간을 가지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둘째는 갑작스럽게 나가는 나를 보며 혹시나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표정이다.      


감정을 가라 앉혀야 하지만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다. 목적 없이 걷다 보니 호수가 보이는 공원에 이르렀다. 20분 남짓 걷고 다른 생각도 해보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모기 때들이 달려들어 그냥 돌아갈까? 생각해봤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남는 게 없다. 분명 좋지 않은 감정으로 며칠을 보낼 것이고, 불편한 상황이 불편해 어쭙잖은 화해를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을 찬찬히 복기했다.  그렇게 30분을 걸으며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찰하며 결론을 내렸다. 툭툭 내뱉는 대화 속에서 자동적인 생각을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늘 아내는 아내여야 한다는 당연시, 타자와의 비교, 내가 옳다는 합리화가 그것이다. 인정하고 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첫째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집을 비웠다. 돌아가니 둘째가 아빠가 언제 오냐며 한 참을 울었다고 한다. 둘째에게 사과하고, 아내에게도 사과했다. 그러면서 첫째 율이 우리가 싸우는 동안 무엇을 적었다며 보여준다. 총탄과 폭탄이 터지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담담하게 10가지의 내용을 적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율의 글을 보고 참 부끄러웠다. 액자에 걸어 벽에 붙이기로 했다. 늘 내가 강조했던 삶의 태도들이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앞으로 자동적으로 생각하기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치고 힘들어도 율이 쓴 글의 모습을 한 아빠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천천히 뜨겁게 생각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율이 만든 10 계명이다. 매일 아침 보며 가슴에 새기기 위해 액자에 걸어두었다. ⓒ문작가

전쟁 후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부상자

며칠 후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데 둘째가 불안한 눈빛으로 현관문까지 미끄러지듯 뛰어나왔다. “아빠, 어디가?” 둘째의 모습에서 부부싸움 후 집을 나갔을 때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이 보였다. 불안한 정서를 다독이며 멀리 나가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고 하며 잠시 후 돌아온다고 전했다. 그리고 며칠 전 아빠가 심하게 싸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다시는 갑작스럽게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서 당시의 불안한 감정이 올라온 것이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신념으로 자리 잡는다. 잘못 형성된 비합리적인 신념은 마치 운명처럼 아이를 괴롭힐 것이다.       


부정적 생활사건이 자칫 비합리적 신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말초신경계를 각성시키고, 막연한 불안과 우울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어떠한 증상으로 우리 삶의 그림자로 나타날지는 모를 일이다.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실존을 무력화시키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깨트리며 살아왔는데 42개월의 둘째가 다시금 나를 깨우치게 만들었다. 한동안 둘째와 대화하며 아직 굳어지지 않았을 비합리적인 신념을 도려낼 계획이다. 이런 면에서 부부싸움은 아동학대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아동학대를 했다고 자백한다. 부부싸움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은 검색만 해도 넘쳐난다. 하지만 부부싸움 후에는 반드시 부상자를 치료하길 바란다. 



※위 글은 N0.1 육아신문 베이비뉴스에 연재된 글입니다.

칼럼니스트 문선종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와 결혼해 두 딸아이의 바보가 됐다.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생 시절 비영리 민간단체를 이끌었고, 구룡포 어촌마을에서 9년간 아이들이 행복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사업을 수행했다. 지금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실에서 어린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moons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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