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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레오 Mar 23. 2019

예서야, 서울대 의대 정말 가고 싶었니?

[문선종 사회복지사의 아빠공부] 오직 너의 욕망을 욕망하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스카이캐슬!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모를 리 없는 드라마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꼬집은 드라마라 그런지 이를 두고 말들이 많다. 여기서 나는 '예서'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예서의 삶을 송두리째 쥐락펴락하는 예서 엄마에게 따끔한 충고도 덧붙이고 싶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예서'와 같은 아이들이 있다.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가져야 할 주체성이라는 불빛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막고 싶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부모가 좋아하면 아이도 덩달아 좋아한다. 아이는 부모의 욕망에 반응하며 사회성을 키워나간다. 진화론자들은 아기가 부모를 보고 웃는 것은 진심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맥락과 일맥상통한다. 쉽게 말해서 '눈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눈치로 부모에서 선생님, 친구 등으로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간다. 타인의 욕망에 반응하며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체성이 생기면서 자신의 욕망을 조금씩 알게 되고, 찾아 나서려 한다. 많은 부모들이 이것을 '똥고집'으로 치부해버리고, 꺾어 버린다. 

둘째는 아빠가 타보라고 한 그네에 탄 것을 엄청 후회하고 있다. ⓒ문선종

넌 어리니까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해. 어린 녀석이 뭘 안다고? 혹시 이렇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지 않는가? 부모의 욕망에 맞춰 살아가는 자녀들은 과연 성인이 됐을 때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까? 부모라면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한다. 


◇To have or To be?


예서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엄마의 욕망을 택했다. 하지만 늘 그 갈림길에서 힘들어할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예서야, 조금만 참아. 곧 끝날 거야.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아깝잖아." 그동안의 기회비용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쫒아온 엄마의 욕망을 내려놓기 어렵다. 철저하게 가지기 위한 삶, 소유하기 위한 삶이다. 타인의 욕망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 끝에 '행복'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곳에 다다르면 또 다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의과대에 들어갔다면 거기서 또 1등을 위해 달려야 하고... 시험에 결혼에 수많은 욕망들이 차고 넘치고 기다리고 있다. 삶에서 무언가를 소유해 나가고 있지만... 정작 그것이 된다는 건 무엇인지?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나는 스무 살에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수능을 다시 봤다. 불행하게도 꿈을 찾지 못해 공무원이나 해야겠다며 가장 만만해 보이는 사회복지학과를 택했다.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증이 있으면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대충대충 공부를 한 것이다. 이타주의자가 되어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직 봉사실적을 올리기 위해 봉사활동을 한 것이다. 이런 공허한 삶 속에서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려고 공부하는 건가? 진짜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공부하는 건가? To have? or To be?"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방황의 끝에 소유하는 삶을 관두고, 지금까지 한 번도 결정한 적 없는 삶, 내가 되고 싶은 삶을 선택했다. 온전히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을 위한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내 딸들아, 너희가 되고자 하는 길을 택하라!

아빠가 좋으라고 포즈를 취하는 걸까? ⓒ문선종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은 단언컨대 폭망으로 치닫는다. 책임의 칼날은 타인에 향한다. 나의 아버지는 전기기술자이며 고졸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공업고등학교로 가겠다고 했을 때 단호하게 반대했다. 내가 문과에 들어가 펜을 굴리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바랐던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삶이었기에 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당시 수능 400점 만점에서 딱 절반의 점수를 기록했다. 그 점수는 내가 어떤 학과를 갈지 정해줬다. 아무런 꿈도 없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스무 살의 첫 문턱을 넘었다. 그 시절의 방황은 아직도 시퍼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들이 이루어주길 바라는 것은 부모의 죄악이라고 본다. 내 삶을 자식에게 투사하면 안 된다. 이 시대에 예서와 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이 아닐까?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꼭두각시가 아니다. 이미 벌써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다. 나의 두 딸이 삶의 무대에서 타인의 환호와 박수가 없어도 온전히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 바란다. 


※본 칼럼은 베이비뉴스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문선종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와 결혼해 두 딸아이의 바보가 됐다.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생활 동안 비영리 민간단체를 이끌었으며 구룡포 어촌마을에서 9년간 아이들이 행복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사업을 수행했다. 현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실에서 어린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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