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앱VIP가 집밥러로 변모하기까지
고백한다.
결혼한 지 4년이 되어갈 동안,우리 집 가스불은 켜질 일이 별로 없었다. 특별한 날에 잠시 소꿉놀이하듯, 음식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종일 일에 시달리고 퇴근하고 나면 시간도, 기운도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일처리 하듯 배달 음식을 먹고 나면 또 잘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퇴근하고 만든 요리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참 대단하다고, 나는 절대 저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그러더라.
우울증이란 '과정'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거라고.
그래, 수년간 내 일상은 분명 모든 과정의 재미를 상실한 우울하고 우울한 그 무엇이었다. 그때까지 내 삶의 우선순위는 원가족인 내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보는 것, 일, 그리고 그다음이 나와 남편의 안녕이었다.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나는 뭣이 중헌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 가을 즈음, 휴가 때 만났던 제일 친한 친구가 말했다.
'삶의 우선순위를 좀 조정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결국 나이 들면 네 곁에 남는 건 일이 아니라 배우자일 것이라는 취지의 이야기였지만 내게는 '삶의 우선순위'라는 말이 제일 크게 들렸다.
사람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우선하여 살게 된다. 돌아보니 나도 남편도 건강을 많이 잃어가고 있었고, 일상에서의 '과정'의 재미 따위는 잃어버린 채로, 하루하루 미션 클리어하듯 우리에게 들이는 시간은 없이, 쥐어짜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그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때 생각했다.
서툴러도, 집밥을 해 먹자.
당시 우리의 식습관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두 번 모두 배달음식으로 해결하는 수준이었다. 배달앱 VIP는 나의 차지였고, 배달하면 건당 얼마씩 할인해주는 서비스도 매달 돈을 내며 이용하고 있었다. 배달된 음식은 아무래도 양이 많은 편이라 늘 과도하게 많이 먹었고, 체중이 마구 는 것은 물론 안 그래도 약한 위장은 언제나 불편했으며 쓰레기는 매 끼니마다 수북이 쌓였다.
더 이상 '과정'의 재미를 상실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아졌다. '맛있다'는 결과만이 아닌, 재료를 씻고 다듬는 것부터, 전 과정을 목격하고 싶었다. 또, 코로나 시대이니만큼 그 전 과정을 내가 완전히, 투명하게 알고 싶기도 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우리 집에 가져다주는지 모르는 음식이 아니라 만들어진 과정을 전부 목격한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외식이나 배달이 나쁘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그동안 너무 극단적으로 외식에만 의존해온 사람이 집밥을 하게 된 과정을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글일 뿐이다.)
제일 걱정되는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식습관이 안 좋은 편이다. 애기 입맛에다 치킨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 일주일에 기본 3-4번은 치킨을 시켜먹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입에 달거나 맛있지 않으면 절. 대. 안 먹는 사람이다. 얼마간 요리를 시도하다 결국 배달음식에 정착하게 된 이유기도 하다. 맛이 없으면 안 먹는 남편은 또 일이 힘든 날도 치킨, 배고픈 날도 치킨, 그냥 입이 심심한 날에도 치킨을 먹는 사람이었고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도 항상 끼고 살았다.
즉, 내가 집밥을 만들고 남편과 같이 먹을 수 있으려면 남편이 그토록 사랑하는 '치킨'을 집에서 만들어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적어도 치킨 그 비슷한 무엇이라도.
서론이 길었다.
그래서 뒤늦게 구입한 것이 에어프라이어다.
남들 다 살때, 집에서 뭘 해먹지 않았기에 전혀 있을 필요를 못 느꼈던 물건이다. 하지만, 남편이 치킨을 좋아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삭함'이었고 어떻게 하면 집에서 바삭한 치킨을 편히 만들 수 있을까 하다가 에어프라이어가 있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5리터짜리 에어프라이어를 바로 구입했다. 가격도 요즘엔 정말 많이 내려가서, 6만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구입했다. 이 정도면 치킨 2-3번 정도 시켜먹으면 끝나는 금액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에어프라이어로 치킨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닭볶음탕용 닭을 사서 꼼꼼하게 세척했다. 부스러진 뼈나 피도 깨끗이 씻고 잡내 제거를 위해 우유에도 담갔다가...치킨 가루를 입히고 빵가루에도 좀 굴렸다. 검색해서 양념치킨 양념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의 첫 홈메이드 치킨은 나름 대 성공이었다. 일단 남편에게 필수적인 '바삭함'이 살아있었고 양념치킨도 파는 맛이 났다.
더 큰 변화는 치킨 이후에 일어났다. 쉽고 간편한 에어프라이어 요리에 반한 내가 삼겹살도 구워보고, 만두도 굽고, 고구마도 넣어보고, 와플도 데우고, 붕어빵도 굽고, 간단한 토스트도 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요리를 어렵게 느끼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시작은 에어프라이어용 요리였지만, 점점 가스불로 하는 요리도 즐기게 되었다. 쌀 씻는 일조차 어려웠는데 이제 쌀 씻는 것 정도는 라면 물 올리는 일만큼 쉽게 여기게 되었고, 밥하는 일이 쉬워지니, 밥이 되는 동안 주메뉴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에어프라이어를 산 이후 우리는 거의 매 끼니 집밥을 먹게 되었다.
맛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지만 적어도 속은, 전보다 항상 편했고 몸무게도 단기간에 꽤 줄었다.
에어프라이어를 사면서 되찾은 것은 바로 '과정의 재미'였다.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요리를 귀찮은 것만이 아닌 과정의 재미로 인식하면서 신기하게 다른 일들도 수월해짐을 느꼈다. 요리를 하고 매일 우리를 위해 시간을 들이면서, 마음이 많이 밝아졌다. 집안은 좀 더 정돈됐고, 요리 냄새가 났으며, 남편과 나의 건강도 좋아지고, 이야기 나눌 것도 많아지고 추억도 많이 생겼다.
식구로서, 가족으로서 음식을 만들어 서로를 대접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만큼, 관심을 갖는만큼 행복해지더라는 진리를 몸소 체험했다. 남편이 내가 만든 요리를 잘 먹는 것을 보면 더없이 행복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프렌치토스트를 휘리릭 만들었는데, 둘이 앉아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며 기분 좋게 먹으니 그리 행복할 수가 없더라.
물론 식비도 많이 줄었다. 배달음식을 주로 먹던 때는 한 끼에 2만 원 이상 쓰는 게 일도 아니었으니까.
과정의 재미를 찾는 것은, 단순히 내 시간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삶을 정돈하고 나에게 내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우리는 집밥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은 뭣이 중헌지를 알아가는 것 같다.
좀 거창하지만, 에어프라이어는 나에게 하나의 문이 돼 준 것 같다. 집밥러로 이르는 문. 잃어버렸던 삶의 재미를 되찾기 위해 꼭 열어야 했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