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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Jan 17. 2021

진짜 내 짝을 만나는 일

낭만 없는 인간의 좋은 연애와 결혼할 인연에 대한 고찰 1

고백한다.

나는 '낭만 없는' 인간이다.

적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만큼은.


이상하게도 나는 아아를 마실 때 급하게 들이켜는 수준으로 마신다.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도 조금 했다가 빨대로 한 모금 빨고, 다시 다른 일을 하다가 조금 또 마시고, 이렇게 조금씩 마시질 못한다. 거의 음료 광고에서처럼 한 번에 꿀꺽꿀꺽, 마신다. 이런 나를 보고 친한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진짜 커피 마실 때 보면 낭만 따윈 없어 보인다'라고. 그래, 뭐 나의 '낭만 없음'이나 성급함이 어디 커피에 국한돼 표출됐겠느냐만 '아아'에 관한 한 정말 그랬다.


남편을 처음 만난 소개팅. 그때, 나이도 나이였지만 너무 외로웠다. 솔로였던 기간이 오래될 대로 된 터였다. 사실 난 혼밥, 혼영, 혼행 등 그 무엇도 혼자 할 수 있었다. 혼자 해외여행도 가능했다. 그런데 때가 된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 무엇을 혼자 해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소개팅'이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나섰고 그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계속 뉴스 속보를 들여다봐야 하는 시사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라 정말 미친 듯이 바빴던 시기였지만 난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체력소모가 가장 덜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에, 유일하게 쉬는 요일을 고르고, 몇 벌 없는 원피스도 챙겨 입고, 정성껏 공들여 화장도 했다.


시원한 아아를 벌컥벌컥 마시며 초코 마들렌을 먹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행복이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도 잘 통했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관한 내 습관이 하필 거기서 튀어나와버렸다. 나름 차분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나는 아아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있었고 내 눈앞에는 얼음만 남은 빈 잔이 놓여있었다. 나도 모르게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그 순간, 머릿속엔 전 연애의 안 좋은 순간들이 스쳤다. 특히 내가 '여자답게' 굴지 않았다거나, 어떤 습관이 본인의 눈에 차지 않는다고 상대방이 면박을 줬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남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더 긴장이 되었고,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두려움은 증폭되었다. 그런데 자리로 돌아온 남편의 손에는 또 다른 '아아'가 들려있었다. 그는 긴장한 와중에도 눈에 장난기를 품으며 말했다. '이거 더 큰 사이즈예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라고. 그랬다. 그는 한 사이즈 더 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러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기분 좋은 소개팅 후, 나에게 낭만 없다고 말했던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잔뜩 흥분하기 시작했다. 본인은 꼭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자기가 뭘 잘 먹으면 더 큰 사이즈를 사 오는 사람, 본인이 딸기 아이스크림을 잘 먹고 있으면 그걸로 되겠냐며 초코 아이스크림도 내미는 사람. 다소 음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동생이긴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 내가 소개팅 후 느꼈던 묘한 안도감이 이해되었다.


일단 그날 소개팅에서 내가 남편에게 들었던 생각은 딱 두 가지다.

1. 대화가 통한다.

2. 누군가에겐 큰 단점으로 보였던 나의 어떤 면이 그에게는 전혀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1번은 평범한 인연이 연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좋은 연애냐 나쁜 연애냐를 판단하는데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2번이 정말 결혼할 인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 같다.


첫 만남에서는 '아아를 빨리 먹는 습관'이라는 작은 것에 불과했지만, 나에게는 분명 크고 작은 단점들이 존재한다. 깊은 관계가 되기 전까지 오픈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것도 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드라마도 그렇지만, 관계도 사실 예고편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 돌아보면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고 백일 안에는 그 관계의 예고편을 보게 되었다.  그 기간 안에 서로의 단점과 연애를 지속하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연애가 지속됐던 건 순전히 감정이 식지 않았기에 예정된 이별을 부인하고 관계 연장을 위해 몸부림쳤기 때문임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남편과 만나면서, 진짜 내 짝이구나, 하는 징후는 이후에도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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