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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Jan 30. 2021

그는 날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낭만 없는 인간의 좋은 연애와 결혼할 인연에 대한 고찰 2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고백한다.

나는 내가 독신으로 살 줄 알았다.

남편을 만나기 몇 개월 전, 결혼은 내 인생에 없음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시사 프로를 하고 있었기에 매일 새벽에 달 보며 출근해서 별 보며 퇴근하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체력이 바닥나도록 일하고 들어오면 또 자야 할 시간이었다. 기력이 탈탈 털린 채 이불속에 들어가면 피로와 불안이 온몸을 감쌌다.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웃음도 잃어갔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귀찮은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 새로운 인연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 내가 좋다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못하는 일이 없었기에 이대로 혼자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회사 선배가 나에게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정확히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생에는 결혼을 못할 것 같아요. 독신으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자신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도, 사랑받을 자신도 없었다. 내가 아는 내 수많은 단점들, 사랑받기 어려울 것 같은 조건들이 내 마음을 잠식해갔다. 앞선 글에서 '아아'를  낭만 없이 마시는 내 습관에 대해 잠시 언급했지만, 그런 건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지만, 나에겐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셨고, 몇 년 간 계속돼 온 고질적인 집안 문제도 있었다. (차마 공개된 공간에 내 모든 단점이나 어려움을 다 밝히지 못하는 점은 양해를 부탁드린다.)


 결혼할 인연, 신기하게 말이 통하더라


지난번 글에도 썼지만 내게도 더는 혼자로 지낼 수 없다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혼자 할 수 있던 내가 이젠 그 무엇을 혼자 해도 재미가 없어졌을 때, 내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지인이 소개팅을 제안해왔던 거다. 그때까지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개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바로 수락했다.


주선자가 전해준 상대에 대한 몇 가지 정보 때문이었다. 취미 생활로 극단에서 연극을 했으며, 착하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주선자의 군대 선임이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나가기로 했다. 군대에서 2년을 지켜봤는데 괜찮은 사람이라면 정말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주선자는 남편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사무실에서 업무 보조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순간 이거 공부하는 사람 뒷바라지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 역시 취직이 안 돼서 오래 준비했기에 오히려 말이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차피 만나서 바로 결혼할 사람을 찾는 선도 아닌데 어떠냐, 나가보자 싶었다.


첫 만남인데 남편도 늦고 나도 늦었다. 차가 너무 막혀서였다. 약속 장소가 강남역. 둘 다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너무 막혔던 거다. 웃긴 건, 남편도 나도 평소에 시간 약속을 엄청 잘 지키는 편이라는 점. 남편은 특히 시간 약속에 엄격해서, 처음에 내가 '늦을 것 같아서 죄송하다' 고 문자를 보냈더니 문자 답장에 바로 찬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웬걸. 정작 나보다 남편이 더 늦었다. 처음에는 싸늘하게 답하던 남편이 나중에 보낸 문자에선 어찌나 죄송해하던지. 나중에 남편 왈, 자기는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은 무조건 거르고 보는지라 내가 늦는다는 문자를 보고 이 사람은 아니구나, 별로구나 했단다. 근데 본인이 길이 너무 막혀서 더 늦게 도착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 다행히 난 관대한 편이다. :-)


아무튼 그렇게 어렵게 만난 남편의 첫인상은 웃고는 있는데 긴장한 것 같았다. 주선자는 남편이 어린 왕자 같은 느낌이라고 했는데... 음...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는데 소개팅 차림으로는 너무 신경을 안 쓴 거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본인은 그게 나름대로 제일 멋있게 보이는 옷이라서 입고 온 거라고 하더라.


몇 년 전 속초 여행 때, 닭강정을 옆에 두고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남편의 뒷모습


첫 만남부터 대화가 통했다. 남편이 예약한 음식점에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대기장소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편했다. 각 잡고 이야기하지 않고, 가볍게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 나이가 같아선지 공통 관심사도 비슷했고, 좋아하는 것에 대한, 특히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잘 통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밴드를 좋아하더라도 서로 다른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같은 노래를 좋아했더라도 동질감을 느끼고 좋았겠지만, 큰 관심사가 일치하면서도 나와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다른 것 같아서 흥미가 생겼다. 우리는 신해철과 넥스트, 서태지와 서기회에 대해 이야기했고, 넬과 더 콜링 등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대화가 통한다는 건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경우는 음악이었지만, 나의 주요한 관심사와 상대방의 관심사가 비슷하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유머 코드도 중요하다. 같은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머 코드를 보면 가치관까지 엿볼 수 있다. 나의 경우, 내가 혐오하는 요소를 가지고 웃는 사람과는 연애 감정이 절대 생기지 않았다.


아무튼 첫 만남에서 나는 남편이 남자로 바로 좋아졌다기보다는, 말이 정말 잘 통하는 친구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기도 어려운데... 그날 헤어지면서 막연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적어도 한 번은 더 보고 싶었다.


'말이 정말 잘 통하는 친구 같은데, 애프터가 없으면 다시는 못 보겠지? 친구로 보는 건 의미 없겠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다. 소개팅에 오는 남자가 여자에게 기대하는 건 로맨스라고. 설렘을 느껴야 한다는데 과연 저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매력을 느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밥 먹고 아직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남편은 집에 가자고 했다. 대화는 통하지만 이성으로 매력을 느끼는 건 역시 다른 영역의 문제일까 생각하며 지하철역 가려고 걷던 중 서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거기서 작은 반전이 하나 있었다. 그때까지 실례될 질문인가 싶어 하지 않았던 이야기, 시험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다 했다. 개의치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그런데, 헉. 이게 웬일인가. 남편은 이미 합격해서 일하고 있다는 거다. 알고 보니 주선자가 남편과 연락한 지 오래돼서 그간의 사정이 업데이트가 안 됐던 거였다. 솔직히 그때 약간 안심이 됐다. 다행히 수험생 뒷바라지는 안 하겠구나 싶어서.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아직 잘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지금 뭐하나 싶었다. 보통 밥 먹고 차 마시는 게 코스라고 들었는데 밥만 먹고 보내다니. 에이. 역시 아닌가 보다. 그러면서 지하철을 오르는데 헛헛했다. 그래도 기분 좋은 만남이었으니 그날 하루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과 헤어지고 주선자에게 전화를 했다. 느낌이 괜찮았다고,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고, 그런데 잘될진 모르겠다고. 검색창에 멍하니 '애프터 신청'을 검색했다. 소개팅 다음날까지는 말해주는 게 예의라고 했다. 밀당이 어쩌고, 타이밍이 어쩌고. 에휴. 내 성격에 들여다보니 머리만 아팠다.


그때 문자가 왔다. 다시 한번 뵙고 싶은데 다음 주 주말에 시간 어떠시냐고.


물론 남편이었다. 헤어진 지 30분도 안 된 상황이었다. 여기서 남편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남편은 차분하지만 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고민하게 하거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저게 나를 좋아한다는 사인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이 잔잔하지만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빠른 애프터 신청은 그런 그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거였다. 문자를 보고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바로 답을 보냈다.


'네, 좋아요!'라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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