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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Feb 17. 2021

"많이 힘들었겠다." 남편이 말했다.

내 밑바닥을 보여주었을 때, 그가 내 남편임을 깨달았다.

<낭만 없는 인간의 좋은 연애와 결혼할 인연에 대한 고찰 3>


연인과 배우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가 만들어질 순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이창동 영화감독의 강의에서 들었던 말이다. 시나리오는 영화의 씨앗이자 근본이고 토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연애와 결혼, 연인과 배우자 문제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연인이 나쁜 배우자가 될 수는 있지만, 나쁜 연인이 좋은 배우자가 되긴 어렵다. 연애는 그 자체로도 즐거운 시간이긴 하지만, 한 사람이 지닌 씨앗과 근본, 토대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좋은 연인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겐 외모가, 어떤 이에겐 경제력이, 또 누군가에겐 성격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 최우선으로 꼽는 조건이 만족되는 경우, 다른 부분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잘 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니 폭력성처럼 절대적인 단점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좋은 배우자란 결국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 포기할 수 없는 일, 특히 무엇을 참지 못하는지 알고 있어야 내게 맞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다.


남편을 처음 만나고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은 편안함이었다. 연인이 되는 과정도, 연인이 된 이후에 결혼까지 가는 과정도 억지스럽지 않고 모든 일이 자연스러웠다. 처음 만난 날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꼈고, 헤어진 지 30분도 안 돼서 애프터 신청을 한 그에게 심쿵했다. 두 번째 만난 날,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내 얘기를 이렇게 줄줄 이야기 하나 싶었다.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 재미없죠?”라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재미있다고 했다. 정말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남편 역시 그 두 번째 만남에서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는 듯 재밌고 편안했다고 한다. 그때, 막연히 잘 될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는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고 다음 주에 또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두어 번쯤 더 만났을까. 치킨을 먹다 잘 못 마시는 술을 한 모금쯤 마신 그는 '저는 OO 씨에게 마음이 있다, OO 씨는 어떠신지 알고 싶다'라고 정말 담백하게 (낭만도 없지, 치킨 먹다 고백이라니) 말했다. 수수했지만 그 평양냉면 같은 심심한 고백이 나는 좋았다. 화려한 미사여구 따위 없는 그의 마음을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덥석, 잡아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만날수록 마치 나를 이성으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나와 참 많이 닮아있는 사람이었다. 그전까지 솔직히 결혼이란 아주 먼 일처럼 느껴졌다. 내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달랐다. 모든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로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었고, 또 정신을 차려보니 상견례를 하고 있었고, 결국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말했다. (사진/unsplash)


그런데 정말 모든 게 자연스럽기만 했을까?


나에겐 정말 사랑하지만, 여러모로 걱정되는 부모님이 있었고, 나 자신도 결혼을 위해 넘어야 할 벽과 산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사람이 결혼할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결혼을 망설이게 했던 그 모든 장애물을 그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연애할 당시 일어났던 사건 하나. 우리 부모님은 오래 장사를 하셨다. 당시 일흔 중반을 넘기신 엄마는 그만 장사를 접고 싶어 하셨는데, 변덕이 심한 아버지는 매일 마음을 바꾸었다. 어제는 접자고 하고, 오늘은 다시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불안했던 엄마는 아버지가 또 여느 때처럼 접자고 동의한 어느 날, 급하게 가게를 엉뚱한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평생 고생하셔서 얻은 가게를 상의도 없이 카센터에 넘겨주신 것이다.


카센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집 바로 아래층에 카센터가 들어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모님이 가게 위층에 살고 계셨던 것이다. 만약 카센터에 가게를 넘겨주었다면, 매일 들락거리는 자동차 소음과 기름 냄새를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해온 가게의 명맥이 끊기는 것도 아쉬웠다. 자잘한 사건 사고를 계속 만드는 아버지도, 가끔가다 대형사고를 치는 엄마도 힘들었다. 거기다 계약상 문제까지 있었다. 엄마는 평생 일만 해온 순진한 사람이었고 순진한 사람이 서두르니 일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당시 이미 부모님의 병환과 이러저러한 문제로 많이 지쳐있었다. 거기에 계약 문제까지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때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큰 힘이 돼 주었다. 손수 내용증명 등 서류를 준비하고 계약 파기를 위한 절차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둘이서 같이 어둑어둑한 저녁에 카센터 사장님을 찾아가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보기에 고압적이고 무서워 보이는 사장님이어서 엄청 떨렸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편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싫어하거나, 피하거나, 나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그저 함께 해결해주고 의지가 돼주는 사람.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새삼 나 자신에 대해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을 기다려왔구나, 하는.  


남편을 만나면서 이 사람은 나를 떠나도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가 알고 있는, 또 몰랐던 내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용기 내어 고백했다. 떠나도 괜찮다고, 혹시 나를 떠나더라도 당신은 내게 그저 고마운 사람으로 남을 거라고, 나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남편이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다..."


내 인생의 짐들은 사실 나로선 지고 가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고 고난이니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택하느냐 마느냐는 당연히 남편의 선택이었다. 결혼하면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짐들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해주고, 기꺼이 함께하겠노라고 했다. 본인의 인생에 덧대어질 피로는 개의치 않고.


그날, 나는 어쩌면 이 사람이 내 남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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