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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Mar 01. 2021

"여보 눈엔.. 정말 내가 예뻐?"

나를 좋아하게 되는 연애, 나를 싫어하게 되는 연애

<낭만 없는 인간의 좋은 연애와 결혼할 인연에 대한 고찰 4>


"저 여자들 꾸미고 다니는 것 좀 봐."


그 소릴 들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20대에 만나던 사람이 던진 말이었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곳에 반짝반짝 꾸민 여대생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었다. 눈으로 넌 왜 저렇게 안 꾸미고 다니는 거니,라고 묻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한껏 꾸미는 여자이길 바랐다. 옷도 사주고, 구두도 사주고, 본인이 비용을 내겠다며 네일아트를 권하기도 했다. '핏' 때문에 다이어트를 고민하던 나날들.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두고 자기가 지켜줘야 하는 장미라고 했다. 장미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칭찬으로 들리기보단 민망하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 잘못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의 렌즈에 투과돼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과 아주 달랐다. 물론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그의 마음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아주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그림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 나와 맞지 않는 퍼즐 조각 같은 인연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연애 초반에는 꿀 떨어지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시간이 흘러간다. 점점 상대방의 시선을 통해 나를 다시 바라보고 인식하게 되고,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연애가 진행될수록 나 자신에 대한 느낌은 두 갈래로 나뉜다. 나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경우, 스스로가 싫어지는 경우. 그는 내게 후자의 인연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금 보면 다행스럽게도 헤어졌다. 연애 후반으로 갈수록 나 자신이 부족하게만 느껴졌으니까.


남편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만나면서 나 자신이 자꾸만 더 좋아 보이고, 성격이 부드러워지며, 자신감이 생겼다. 그가 좋아지면서 나 자신도 조금씩 더 긍정하게 됐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든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고, 쉽게 상처 받는 약한 부분도 있다. 그 약한 부분을 자꾸 건드릴수록, 관계는 깨질 확률이 높다. 더구나 절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본성에 가까운 부분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우리도 연애 과정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남편은 지난 연애 상대에게 연락 문제로 상처를 받은 적이 많았다고 했다. 남편은 성격상 연락이  돼야 안심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가 만났던 사람은 다른 이성을 포함해 여럿이서 등산 가면서 연락이 끊기는 스타일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남편이 가진 불안을 자극하는 것이 문제였다. 남편이 연락 문제에 대해 말하면 그녀는 일단 화부터 내며 자기를 구속한다고 여겼다. (참고로 나는 구속당하는 기분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 남편은 그녀를 만나며 마치 자기가 이상한 사람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사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남편의 요구를 이해하며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가 너무나 다른 나머지, ‘저 멀리서부터'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많이 힘들었던 남편은 이별을 고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욕할 수 있을까. 그저 안 맞는 것뿐이다. 오히려 연락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사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연락이 잘 되는 사람은 아니다. 친한 친구와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연락할 때도 많다. 특히 일할 때는 멀티플레이가 잘 안돼서 핸드폰을 못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남편과 연애할 당시 제일 바쁜 시사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고, 분 단위로 움직일 때가 많았다. 새벽 6시도 되기 전에 출근해서 저녁이 돼야 숨을 돌리는 날들이 많았던... 그런 시기였다.


당연히 우리 연애에도 연락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저녁, 전쟁터에서 총알을 피하는 기분으로 일을 마친 후 뒤늦게 폰을 보니 남편의 차가운 카톡이 와 있었다. 늘 톡에 상냥하고 다정한 이모티콘을 쓰던 그가, '앞으로는 일할 땐 내가 기다리지 않게 그냥 네가 연락하는 게 좋겠다'라고 차갑게 식은 문장을 남긴 것이다. 내가 바쁜데 자기가 자꾸 연락을 하니 나는 부담이 될 테고, 본인은 기다리게 되니 힘들다는 거였다.


오전, 오후 내내 답을 기다렸을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남편에게 그날 화장실도 못 가고 일을 했으며, 지금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게 목표인 군인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야 한숨 돌리고 있다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아무리 바쁘더라도 남편에게 연락이 오면 지금 어떠 어떠한 상황이니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다소 과장된 애정 표현으로 그의 마음을 안심시켜주려고 했다. 물론 나도 타고난 부분은 아닌지라 아직도 부족할 때가 있지만.  


남편은 그때부터 나와의 만남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지난 연애 때 고민했던 부분, 즉 연락 문제에 진심인 남편은 스스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고, 본인의 감정에 공감해주고 미안해하며, 개선의 여지(?)를 보여준 나를 더 좋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와 맞는 상대를 만나면 단점은 작아지고, 장점은 커진다. 남편을 만난 후, 적어도 남편 때문에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파고들며 우울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감정적으로, 현실적으로 약한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


저는 장미가 아니랍니다. (이미지@unsplash)

전 남자 친구를 만나며 외모에 대해 열등감이 생겼던 나는 남편을 만나며 스스로의 모습을 많이 긍정하게 되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장미가 되지 못해 부족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따뜻한 마음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한 번은 진짜 궁금해서,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눈엔.. 정말 내가 예뻐?"  


그는, 그럼 당연하지. 여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제일 귀한 존재를 보듯 부족한 나를 바라봐주었다. 언젠가 나를 장미라 했던 전 남자 친구가 떠올라 남편에게 나를 보면 떠오르는 꽃이 있냐고 물었다. '닭꼬치'라고 대답하고 한 대 맞은 남편은 그제야 진지하게 답했다.


"들꽃. 들풀들 사이에 환하게 핀 들꽃.”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장미가 아니라, 꿋꿋하게 살아온 들꽃에 가까운 사람이다. 내 남편은 그런 나에게 장미가 되라며 다그치지 않았다.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따스한 눈으로 나의 성장을 기꺼이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남편을 만나고, 나는 비로소 들꽃인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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