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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Aug 06. 2023

0에서 1로 가는 중입니다.

그때 가장 많은 걸 배우죠.

"제로에서 하나로 갈 때 가장 많은 걸 배우죠. 그 이후부터는 발전 속도가 엄청나게 느려져요.

제 경우도 무척 느려졌죠. 비영화감독에서 영화감독으로 변모하면서 처음 두 편의 영화를 만들 때

많은 걸 배웠죠. 조금씩 실수를 줄여가면서 점차 능숙해졌고요."


                                      / 우디 앨런 인터뷰 중에서




이번 여름은 0에서 1로 가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아직 한창인 여름만큼 1로 가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는 것도 여전하다.

새 프로그램, 클래식이란 낯선 세계에 갑자기 떠밀리듯 입문하던 그 시기엔 정말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몸도 마음도 끝까지 지쳐있는 와중에 도착한 낯선 세계가 처음엔 못 견디게 버거웠다.

모든 게 0에 가까운, 0으로 곤두박질쳤던 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우디 앨런의 말이 떠올랐다.


"제로에서 하나로 갈 때 가장 많은 걸 배우죠..."


제로에서 하나로 갈 때...

0에서 1로 가는 중이라고, 향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 싶었다.

가장 많은 걸 배우느라 이렇게 힘든 걸 거라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전엔 늘 내가 다시 시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싶고 두렵기만 하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나도 그랬지만 그래도 막상 낯선 곳에 떨어지니 또 새로운 걸 보고, 듣고, 배우게 되었다. 힘은 들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내가 지금 새로운 것을 좋아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듣다 보니 치유받는 느낌이 들었다.

0에 가깝게 꽁꽁 얼어있던 땅에도 새싹이 돋고 가끔은 꽃도 피었다.


매일 방송하는 라디오 PD임이 버거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감사한 것이 데일리 방송은 폐지되지 않는 한 내일이 있고, 다음 방송이 있기 때문에

오늘 조금 아쉬웠다고 해도 내일은 더 잘할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털어낼 수 있다.

언제든 0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순간도 여러 번 있겠지만.

다시 1을 향해서 간다고 생각하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담백하게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루씩만 생각하고 걸어가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새 1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힘겹지만 그렇게 걸어가던 와중에 만났던 두 편의 영상이 있다.


93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가 90세 할머니에게 피아노 레슨 중인 모습. (출처:EBS 유튜브 캡처)

하나는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특별한 수업'이라는 EBS 다큐멘터리다.


93세의 할아버지 피아니스트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인데 정말 추천하고 싶다.  번스타인이 90세 할머니 진 크라우스만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는 모습을 쇼츠로 접하고 본편을 보게 됐는데 잘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 진지하게 피아노를 연습하는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연주가 잘 안 되는 부분은 몇 번이고 반복하고, 번스타인에게 조언을 받아 마침내 아름답게 연주하는 모습, 둘이 해냈다는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 무엇보다 그 나이에도 매일의 성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레슨을 마치고 피아노를 떠나 밖으로 나온 할머니는 혼자서 서 있기도 버거운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피아노 앞에서는 배우고 익히고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진지하게 악보를 보며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출처:EBS 유튜브 캡처)

이 다큐멘터리에는 당연하지만 세이모어 번스타인 본인이 연습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93세의 나이에도 악보 위의 한 음 한 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 음에서 저 음으로 넘어갈 때 어떻게 하면 잘 연주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방법을 시도했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방법을 시도하고 마침내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낸다. 매일 연습하다가 특별한 연주가 나올 것 같은 순간에는 어김없이 녹음기를 켜서 그 순간을 담아두려는 모습. 시간의 단위를 크게 보면 끝에 다다랐기에 그저 막연한 나이일 수도 있는데 하루하루, 순간순간에 집중하면 아직은 성장할 기회를 가진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90세가 넘었어도 특별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를 예민하게 놓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기 손으로 일상을 만들어가며 소중한 사람들과 차 한잔에 담소를 나누며 살아가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마침내 신의 때가 와서 자신을 부르시면 그 역시 편안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모습도. 누구나 신이 부르시는 자기의 때가, 그 시간이 있을 테니까.


95세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출처는 https://youtu.be/Z4Vr2dZLxEs 

두 번째는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을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이 곡을 연주할 때 나이가 95세였다고 하는데 그 나이가 돼서야 느껴지는 감정이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인생을 마무리할 때쯤 돼서야 비로소 이해하는 감정이 있는 걸까 싶을 만큼 감동적인 연주였다. 표정 하나하나, 주름진 손 끝 하나하나까지 모두 연주에 포함된 것 같았다. 95세의 나이에도 음에 담긴 감정을 저렇게 깊이 느끼는구나 싶어서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그의 명복을 빌며. 이렇게 좋은 연주를 남겨주심에 그저 감사할 뿐...


때로는, 아니 자주.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건지, 매일이 어디로 향하고는 있는 건지 막막하고 허무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그래도 걸어왔다.


3개월이 조금 지난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결국은 1을 향하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마음만 기억하려고 한다.


아직 성장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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