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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틈 Oct 17. 2022

골짜구니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서울애들 주게, 밤다구(1)

장재미 골짜구니의 파란 지붕 집 셋째 딸. 위로는 오빠와 언니, 아래로는 두 명의 여동생 사이에 끼어 눈치가 빨랐던 아이. 맛있는 게 하나도 없어 형제들 중 가장 작았던 아이. 영특하고 야무진 이 아이를 동네 아줌니들은 변호사라고 불렀다. 고등학생이던 막내 고모에게 한글을 배웠고 금방 깨우쳤다. 초등학생이던 언니의 음악책을 따라보고 동네방네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자 동네 아줌니들은 이 아이를 꾀꼬리라고 불렀다. 명숙이는 골짜구니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였다.


명숙이는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무서웠다. 작은 명숙이를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 자기 살기 바빠서 명숙이에게 따뜻한 품을 내 줄 여유가 그 집엔 없었다. 그래서 명숙이는 동수언니를 좋아했다. 친구처럼 잘해주는 동수언니가 친언니보다도 반가웠다. 지금도 유년의 기억으로 동수언니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을 보면 일곱 살 명숙이의 세상엔 동수언니가 전부였던 것이 분명하다.


명숙이는 동수언니의 학교가 마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렸다. 강호오빠네 집 앞으로 쭉 나가면 행길하고 연결된 길이 나오는데 그 경계에 폭신폭신한 흙더미가 있었다. 명숙이는 그 더미 위에 앉거나 누워 학교가 있는 윗동네를 틈틈이 바라보았다. 그곳은 하교하는 언니가 딱 보이는 장소였다.

동수언니를 따라다니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다. 동수언니는 대장이었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멱 감자 하면 멱 감으러 가고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엔 뒷산으로 밤을 주우러 갔다. 그럼 또 동수언니의 뒤꽁무니를 쫓아 고사리 같은 손이 뻐근해질 때까지 밤을 주웠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코가 빨개지도록 밤을 주웠다. 낙엽 냄새를 폴폴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명숙이의 주머니엔 큼지막한 밤들이 그득했다. 그날은 서울에 사는 할머니가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장재미 시골에 온 날이었다. 할머니는 한껏 충만해 보이는 명숙이에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밤 다구. 서울애들 주게. 밤 다구.”

그날의 밤들은 유난히 컸고 명숙이는 그날의 성취를 쉽게 내놓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로 조그맣게 싫다는 기색을 비췄다.


명숙이의 거절에는 밤이 큰 탓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애들은 뽀얗고 깨끗했다. 명절이 되어 도시에서 작은 아버지 식구들이 내려오면 그 집 애들은 그렇게 곱고 정갈할 수가 없었다. 명숙이는 입어보지도 못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가진 서울 동생들을 보고 있자면 속이 쓰렸다. 제 처지와 다른 저이들을 보면서 명숙이는 그때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명숙이의 발은 누더기가 지고 머리엔 딱지가 앉아서 이가 득실득실했다. 명숙이의 차림엔 가난이 군데군데 배어있었다. 깔끔한 고모들이 온 날이면 상북이 오빠네는 가난한데 딸만 줄줄이 낳는다고 사랑채 뒤편에서 씹어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서울 애들한테 밤을 빼앗기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명숙이는 할머니의 불호령에 눈치를 보면서도 용기 내 거절한 것이다.


할머니는 명숙이를 뒤란 아궁이 앞으로 끌고 가 밤을 휙 뺏어가지고는 던지기 시작했다.

“이 못된 년아. 이걸 서울애들을 준다는데, 이 못된 년아.”

할머니는 악을 쓰며 그 어린애를 나무랐다. 던진 밤을 다시 주워서 또 던지고, 주워서 또 던지고, 주워서 또 던졌다. 던져지는 밤 꽁지에 긁혀 명숙이의 마른 팔과 작은 손에는 실시간으로 생채기가 났다. 명숙이는 눈만 끔뻑 끔뻑 뜨며 그 밤들을 다 맞고 있었다. 야속한 밤들은 계속해서 던져지고 또 던져졌다. 명숙이는 밤들을 맞으면서 방금 전 곱게 내놓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서러운 마음은 밤 끝에 살갗이 긁힐 때마다 점점 더 불어났다. 명숙이의 엄마는 시어머니가 제 딸에게 호통치는 소리와 딸이 밤에 맞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진 밤을 하나 주워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께 그만하시라고 말도 못 하고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떨어진 밤을 하나 주워가는 일 그뿐이었다.


명숙이의 밤들은 고운 서울 애들의 간식이 되었다. 명숙이가 줍고 서울 애들이 먹었다. 명숙이는 동수언니를 기다리고 동수언니를 쫓아 다시 밤을 주우러 갔다. 장재미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이제는 오십이 훌쩍 넘은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100원이면 새우깡 한 봉지를 사 먹었다는 이야기, 초코파이 하나를 가지고 다섯 형제가 껍질까지 핥아먹었다는 이야기, 소풍을 갈 땐 햄도 없이 무생채만 넣어 김밥을 말았다는 이야기, 비 오는 날엔 우산이 없었고 눈이 와도 따뜻한 장화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었고 엄마도 어린이의 시절과 청소년의 시절과 청년의 시절을 겪었다는 것이 생경했습니다. 나와 비슷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엄마를 상상하며 귀를 기울이다 잠에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명숙이가 엄마가 된 나이가 되었습니다. 설화처럼만 듣던 이야기가 이제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엄마의 삶에서, 나의 삶에서,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명숙이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흘려만 듣던 엄마의 이야기를 이제는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 음성을 들으며 문장으로 옮기고 이야기에 살을 붙였습니다. 엄마의 해마 속에서 잠자다 한 번씩 입 밖으로 나왔던 꼬질한 이야기보따리를 한 편 두 편 꺼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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